288화
“단장님도 그러셨어.”
“응?”
“단장님도 그렇게 하셨다고.”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말해준 칸나가 키시아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이내 설명해 주었다.
“일단 키가 그렇게 큰 분이 앞으로 나서니 그쪽에서는 무척 긴장했지. 넬라른의 왕자님께서도 싸움이 날까 걱정되셨는지 직접 나서 설명하시겠다며 얼굴을 가리던 망토를 벗으려고 하셨어. 그때 누군가가 그 움직임을 오해하고 실수로 공격을 했는데…….”
“누가?”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내포된 뜻은 전혀 그렇지 않은 질문을 들은 칸나가 눈을 깜박였다.
“어… 흙모래를 움직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어. 힘 조절에 서툴러서 가족에게 버림받아 흘러들어 왔다고 하더라. 걱정 마. 두 분 다 하나도 다치지 않으셨으니까.”
잠시 싸늘하게 식었던 머리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다행이네.”
칸나의 이야기에 의하면, 키시아르는 그와 에제인을 향해 쏟아진 공격을 눈 깜짝할 사이에 완벽하게 막아냈다. 미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모래알들이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땅으로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그 마을 내에 있던 모든 이들은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멀리서 울던 아이조차 단숨에 울음을 그칠 만큼 대단한 힘이었다. 그가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는 오랫동안 마병단 내에서 그를 보아 온 칸나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주저앉은 이들의 얼어붙은 시선을 마주한 채로, 그는 천천히 에제인에게 눈짓을 했다. 물러나라는 신호를 받은 왕자가 망설이다 천천히 뒤로 몸을 물리자 이내 낮은 목소리가 키시아르의 망토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거친 방법을 쓰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이쪽도 약속을 지키려면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잠시 그대로들 앉아서 내 말을 들어주겠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아한 말투였다. 평범한 이들은 그가 내뿜은 힘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완전히 느끼지 못했으나 각성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 압도적인 힘이 키시아르에게는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며, 이곳의 그 누구도 저 존재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 말을 들어주겠냐니. 형식만 요청이었을 뿐 그것은 이미 부드러운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듯한 침묵 속에서 키시아르는 그들이 타이누의 영주와 일절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서부 마법사 연합을 돕고 있는 자들이며, 마을 바깥에 있다는 검사들 또한 우리의 동료다. 여기 있는 타국의 귀한 분들과는 어쩌다 인연이 닿아 험한 대삼림을 거쳐 제대로 귀국하실 수 있도록 잠시 도움을 드리는 관계일 뿐이지. 중간에 배신자들이 나타나고 도망치면서 일이 복잡해졌지만 하루빨리 이곳에서 떠나고 싶은 건 오히려 우리 쪽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군.”
마을 내의 각성자들은 에제인 왕자의 부하들과 오늘 새벽 들어온 부상자가 모두 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눈치채고 있었다. 타국과 국경이 얽혀 있는 대삼림의 특수성이야 모두가 알고 있는 바였고, 나그란의 별보다 먼저 이곳에 머물렀던 서부 마법사 연합의 이름 또한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비록 서부 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은 이 마을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나, 그들을 피해 다니며 거점을 만들어 온 각성자들은 마법사들이 타이누의 영주와 얼마나 사이가 나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들은 마법사들이 대삼림에 나타나는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타이누의 영주 대신 얼마나 고생했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숨은 이웃이었다.
올해에 이르러 드디어 마법사들이 참지 못하고 폭발하여 타이누의 영주와 크게 싸웠다는 소문이 퍼져 있던 참에, 다른 곳에서 그들을 도울 힘을 지닌 이들을 불러왔다면 짐작할 만한 정체는 하나뿐이었다.
“당신들… 용병이었군.”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 키시아르는 답변하지 않았다. 각성자들은 그것이 긍정을 뜻하는 태도라고 믿었다. 키시아르와 마병단이 서부 마법사 연합과 타국에서 온 귀족 나으리들을 위해 고용된 각성자 용병들이라 짐작하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빠르게 누그러졌다.
칸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단하다…….’
키시아르가 내뱉은 몇 마디 안 되는 말은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이 마을에 머무는 각성자들의 속내를 꿰뚫는 핵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적의 적이나 마찬가지인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고, 동시에 같은 힘을 지닌 각성자들에게 유했다. 각성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왔을 이들답게, 머무는 집단과 관련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빠른 속도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면… 당신들 모두 오늘 새벽에 들어온 부상자만 넘겨주면 바로 마을에서 나가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키시아르는 각성자들의 앞에서 몸소 제 말이 맞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마을 근처에서 흉흉하게 검을 들고 돌아다니던 집단은 역시 펠레타 기사단이 맞았다. 주군이 혹여나 암살자들과 만날까 걱정되어 속도를 높여 대삼림으로 들어온 기사단은 이상발생한 몬스터와 만나 싸우던 도중에 젠을 놓치고 그를 추적하던 중이었다.
주군을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나단 주커만과 펠레타 기사단은 몹시 놀랐으나, 이내 눈치 빠르게 그의 말에 대충 박자를 맞추면서 키시아르를 따라온 마을 각성자들을 안심시켰다. 각성자들이 배신자 젠을 키시아르에게 도로 넘겨주기로 하고 자리를 비운 사이, 일행들 사이에서는 그간의 정보가 빠르게 오갔다.
“이런, 나단. 네가 그 배신자를 놓칠 만큼 방심할 줄은 몰랐는데?”
“부끄럽지만 대삼림에 들어오자마자 이상하게도 몬스터가 계속해서 나와 발목이 잡혔습니다. 전투로 어지러운 틈을 타 그자가 도주했는데, 함께 잡혀 있던 다른 시종이 그의 도주를 막기 위해 싸우다 부상을 입었습니다.”
소드마스터인 나단 주커만이라도 여러 사람을 건사하며 이상발생한 몬스터를 해치우는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키시아르 일행이 혹 에제인을 뒤쫓는 암살자들에게 피해를 입을까 걱정했던 마음도 기사단원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데 크게 한몫했을 터였다.
무사한 주군을 보고 나단 주커만이 안심한 사이, 에제인과 그의 부하들은 도망치는 젠을 막으려다 부상을 입은 또 다른 시종 멜번을 만났다. 그가 넬라른의 가장 큰 적국인 듀번에서 보내진 첩자 출신임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만난 주종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멜번. …왜 도망치는 젠과 함께 가지 않고 그를 막았지?”
“왕자님께서 넬라른에 돌아가 처분을 결정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비록 저는 죄인이지만, 그놈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마지막 명까지 어기려 하는 모습만은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칸나는 에제인 왕자에게 감화되어 진정으로 그를 섬기게 되었다던 멜번의 고백이 진심이었음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에제인 왕자는 복잡한 눈빛으로 크게 다쳐 누워 있는 과거의 시종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무어라 짐작했는지 멜번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각성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힘을 얻으셨으니 이제 누구도 왕자님을 해치지 못하겠지요……. 저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잊으십시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그래. …너도, 넬라른에 도착할 때까지 죽지 말고 있도록 해라.”
그 말에 놀란 듯 멜번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뒤에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제인의 부하들 또한 깜짝 놀란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칸나는 짧은 기간 동안 에제인 왕자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힘을 사용해서 알 수 있었던 정보는 아니었다.
이후 각성자들이 누워 있던 부상자를 데리고 왔다. 그는 불길한 미래를 예상했던 듯 발버둥친 흔적이 역력했다. 예상대로 그 사내는 도망친 젠이었고, 에제인 왕자는 두 번이나 그를 배신한 자에게 더 이상 미련 같은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저희도, 저분들도 각자의 길로 돌아갈 일만 남았네요.”
“그래. 내일이 지나기 전에 돌아가려면 꽤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다소 복잡하지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칸나가 키시아르에게 말을 걸자, 담담한 답이 되돌아왔다.
“그런데 왜 내일이 지나기 전인가요? 그 안까지 서부 마법사들의 거점으로 돌아가려면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문득 궁금한 마음에 물은 칸나는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모자 속의 붉은 시선을 마주하고 혹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했던가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다행히도 돌아온 목소리는 그녀의 질문에 불쾌함을 느낀 듯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안에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했거든.”
“약속… 아, 아까도 그런 말씀을 하셨었죠. 그런데 누구랑요?”
키시아르는 그 질문에는 이전처럼 빠르게 답해 주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문득 그의 얼굴을 덮은 천이 펄럭였다. 드러난 코 아래의 입술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호선을 그린 듯했으나, 눈을 감았다 뜨자 그 광경은 곧 신기루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