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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87화 (287/805)
  • 287화

    에제인은 그의 부하들을 돕기 위해 대가도 받지 않고 나서 주었다는 사냥꾼 차림의 각성자에게 옷 안에 달린 금단추 여러 개를 떼어주며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사내는 그저 동료였던 이들에게 배신당해 죽을 뻔했다는 사연에 공감하여 도와주려 했을 뿐이니 이런 것까지는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에제인의 반복된 부탁에 결국 머쓱한 얼굴로 단추를 받아들었다.

    “아니, 거참. 됐대도 그러시네……. 이건 저 같은 놈보단 먼 길 가셔야 한다는 귀하신 분들께 더 필요한 물건 아니요? 아무튼 이야기들 편히 나누시오. 나는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기괴하게 비틀린 꼬챙이 같은 손가락과 흉터투성이 얼굴이 몹시 흉흉해 보였었으나 그 각성자는 사실 순박하고 동정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워준 뒤 에제인은 부하들에게 비로소 그간 자신이 겪은 일들을 편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부하들은 왕자가 들려준 시종들의 배신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그가 각성했다는 사실에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칸나는 망토에 달린 모자 사이에 얼굴을 숨긴 키시아르의 지시를 받아 몰래 슬쩍 능력을 썼다. 그들이 머물던 공간 곳곳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줄곧 진심으로 에제인을 걱정스러워했던 부하들의 기억이 정보가 되어 머리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녀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각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각성자를 꺼리는 이들이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군. 그 이유로 나를 모시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들 역시 굳이 나를 따라 귀국할 필요는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도 이곳에 온 뒤 각성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전에 왕자님께서 넬라른도 제국처럼 각성자를 등용해 보자는 말씀을 하셨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에제인은 전부터 넬라른도 제국처럼 각성자를 등용해 보자는 주장을 조금씩 펴 왔으나 여태까지는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도 각성자가 되었고, 측근들 또한 각성자의 힘을 몸소 보았으니 제대로 귀국만 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바뀔 터였다.

    칸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직도 여기저기서 배척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각성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운이 좋게도 직접 말하지만 않는다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능력을 각성했고, 마병단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를테면 이 마을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칸나는 오는 동안 읽어냈던 정보를 통해 이 마을이 나그란의 별 거점임을 알아차리고 내심 몹시 놀란 상태였다. 조직의 거점 중 하나라기에 대단히 위험한 공간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본 거점의 첫인상은 그저 주변이 대삼림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인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다.

    칸나에게서 몰래 이 마을의 정체를 보고받은 키시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일단 에제인 쪽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가는 쪽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일이 생각처럼 그리 쉽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들이 막 의견을 정리하자마자 밖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이 우르르 달려가는 소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에 놀란 칸나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집주인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손을 내저었다.

    “별것 아닐 거요. 그래도 당신들은 얼굴을 내밀지 마시오. 내가 보고 올 테니까.”

    “뭐지?”

    에제인 또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반응하여 긴장감을 드러내자, 그의 부하들이 대답해 주었다.

    “아마 이 마을 경계에 몬스터가 나타났거나, 아니면 저희처럼 대삼림 내에서 발견된 평범한 이들을 데려온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경우가 흔한가.”

    “저희가 이 마을에 머문 며칠간 몬스터가 계속 나타나 저런 소동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그렇군……. 너희 같은 이들을 구해 마을로 데려오는 경우도 많다고 하던가?”

    “생각보다 많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화전민들이나, 요즘 늘어나는 노예 무역 때문에 잡혀 오다가 도망친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하더군요. 여기 머무는 각성자들 중에는 인정 넘치는 이들이 많아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에제인의 부하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디나 인정 있는 자들만 있지는 않지요. 힘들게 숨겨둔 마을에 각성자가 아닌 평범한 이들이 점점 늘어나니 그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잦아지는 듯했습니다. 저희의 목숨을 구해준 각성자들이 그 이유로 인해 마을의 다른 각성자들과 크게 싸우는 모습도 보았으니까요.”

    이곳이 나그란의 별 거점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타인의 박해를 받던 각성자들이 저들끼리 모여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만든 마을에 더 가까워 보이니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내분이었다. 칸나는 곧장 시선을 키시아르와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면면에서 각자의 생각이 복잡하게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느껴졌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집주인 사내가 심각한 얼굴로 에제인의 부하들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몬스터가 나타났나 해서 가 봤더니, 새벽에 당신들처럼 도망치다가 우리 마을 사람이 주워 온 어떤 놈을 찾는다고 검 든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온 모양이요.”

    이 위험한 시기에 대삼림에 들어온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자들이 대체 왜 이리 많은지! 사내가 욕설을 섞어 탄식하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아직까지는 마을 근처만 맴도는 모양이지만 그자들을 이끄는 놈이 아주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니 일이 어찌 될지 모르겠군. 외양은 남국인이라던데……. 남국인이 대체 여기까진 뭣 하러 왔는지…….”

    칸나는 순간 남국인 특유의 붉은 피부를 지닌 키시아르의 부관기사, 나단 주커만을 떠올렸다. 그를 떠올린 이가 그녀만은 아니었는지 여태껏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키시아르가 처음으로 앞에 나섰다.

    “새벽에 이곳 근처에서 발견한 사람이라……. 그자는 어떤 사람이지?”

    “그건 우리도 모르오. 아무튼 이 험한 삼림 내에서 부상을 입고 도망치는 모습이 불쌍해서 도와준 거라고 하니까.”

    각성자들에게 구출된 사내는 기절해 있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한동안 이곳에 숨겨준다면 비싼 보석을 얼마든지 주겠다고 말했는데, 걸친 옷이나 외양으로 보아 한눈에 보아도 제국인은 아니었다. 도망쳐 온 화전민이나 노예들과는 달리 비싼 옷을 걸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그 사내 때문에 새로운 침입자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마을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던 참이라고 했다.

    “당신들이야 어찌 된 사정으로 그 꼴을 당했는지 곧장 알려줘서 우리도 치료만 해 주고 내보내는 쪽으로 빨리 결정할 수 있었지만, 그자는 그렇지 않으니까 우리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그런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이름도 말하지 않았나? 인상착의는?”

    “음… 베이누인가, 제이누인가. 막 깨어났을 때 이름을 불어보니 그렇게 말했다던 것 같수. 생김새는… 적갈색 머리였던 것밖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데 이건 왜 자꾸 묻는 거요?”

    그 말에 이번에는 에제인과 그의 부하들 쪽에서 큰 덜컹 소리가 났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일어난 에제인 왕자가 키시아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젠인 것 같습니다. 아니, 젠이 확실합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렇다면 마을 밖에 있을 추적자들이 누구인지도 분명하겠군요.”

    그들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 주다 내보내려 했던 집주인 사내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일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본래 그들은 에제인 왕자와 먼저 산장에 도착한 뒤, 배신자 시종들을 데리고 조금 늦게 따라올 펠레타 기사단을 기다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에제인의 부하들을 배신한 자들과 하필 그 산장 근처에 존재했던 나그란의 별 거점으로 인해 모든 일이 크게 틀어졌다. 그들은 순식간에 마을의 중심에서 몰려온 거점 내의 다른 각성자들과 마주하게 되어버렸다.

    “당신들은 누구요? 대체 누군데 저 밖에 몰려온 놈들하고, 새벽에 주워온 자에다 며칠간 누워서 치료약만 축낸 자들과 죄다 아는 사이란 거요. 우리에 대해 뭘 알고 있지? 설마 타이누의 영주가 보낸 자들인가?”

    경계심에 가득 차 흉흉한 표정을 지은 각성자들을 보며 칸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걸 어째…….’

    태도를 보아하니 아니라고 말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서부 대도시의 영주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 보낸 이들이 아니겠느냐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의 시선이 점차 분노로 치닫는 기색이 선명했다.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 해도 그들의 능력이 저들에게 뒤지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상자가 많은 이쪽이 지나치게 불리했다.

    그녀의 불안한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키시아르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다른 이들 앞에 당당히 나섰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유더는 칸나의 이야기가 잠시 멈춘 틈을 타 초조하게 질문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나라면…….”

    유더 아일이 그곳에 있었고 키시아르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일단 흉흉한 기세로 구는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을 한꺼번에 제압한 뒤 머리를 좀 식히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했을 터였다.

    “…이야기를 들을 상황을 만들고 나서 대화를 했겠지.”

    칸나가 알면 안 될 생각을 갈무리하며 짧게 대답하자 그녀가 좀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단장님도 그러셨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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