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286화 (286/805)

286화

“끝난 게 아니었나?”

“아니야. 진정해, 유더.”

급히 몸을 움직이려 하는 유더를 칸나가 힘겹게 누르며 막았다.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났지? 여긴 어디야?”

“서부 마법사 연합 거점이야. 단장님이 널 데려오셨고, 루산 사제님이 치료를 끝내신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렇다면 페투아멧과의 전투가 끝난 지 아직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혹 제가 죽였다고 생각한 페투아멧이 사실 완전히 죽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그게 아니라도 남아 있던 다른 몬스터가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어떻게 되어가는 상황이지? 키시아르는…….’

그가 입술을 깨문 순간, 칸나가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사유는 절대 아니니까 마음을 가라앉혀. 저 밖에서 들리는 소란은 마법사들과 우리 쪽이 다투고 있기 때문이야.”

“……다투고 있다고? 왜?”

“왜겠어?”

칸나가 한숨을 내쉬며 유더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단장님께서 네가 깨어나더라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게 하라고 명령하셨어. 그러니까 루산 사제님이 이따가 다시 오실 때까지는 여기서 절대로 움직이면 안 돼.”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칸나가 있으리라 예상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화나셨어?”

“안 나셨다면 그쪽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나도 화가 났거든.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엄청 화났어. 하고 뒷일이 조금 걱정되는 말을 한 칸나가 유더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확실한 건, 널 데려왔을 때 그런 단장님 얼굴은 처음 봤단 거야…….”

잠시 창밖의 먼 곳으로 향하는 칸나의 푸른 눈동자를 유더는 볼 수 없었다. 상념을 지운 칸나는 유더의 눈을 두껍게 감은 흰 붕대를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보다, 유더. 우리가 3일간 뭘 하고 왔는지는 안 궁금해? 엄청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듣고 싶지 않아?”

그의 주의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꺼낸 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더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글쎄 말야, 에제인 왕자님이… 각성을 하셨어.”

순간 바깥에서 들려오던 모든 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유더는 제 반응을 몹시 기다리는 게 분명한 칸나의 시선을 느끼며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각성?”

“그래. 우리와 같은 그 각성 말이야. 뭐야, 안 놀라네?”

물론 놀라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에제인이 각성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각성한 시기 때문이었다.

에제인 왕자는 본래대로라면 지금이 아니라 더 뒤에 각성했어야 했다. 이전 생의 그가 어떤 상황에서 각성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왕위 다툼이 에제인의 각성으로 인해 단숨에 마무리되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니 각성 시기가 이전 생과 달라지더라도 당연히 넬라른으로 돌아간 뒤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마병단과 함께 있는 동안 각성을 했다니. 머리가 순식간에 바쁘게 돌았다.

“아니, 나도 놀랐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우리가 그분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였어. 본래 왕자님이 말했던 인원보다 훨씬 적은 사람들이 있기에 어째 낌새가 좋지 않다 싶더니, 역시나 배신자들이 왕자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공격하고는 기습을 위해 거기 숨어 있던 거였지 뭐야.”

배신자들은 마병단원들에게 금방 제압당했지만 일부는 숲속으로 도망쳐 달아났다. 에제인 왕자는 그들을 몸소 심문한 뒤 목숨을 거두는 힘든 일을 홀로 맡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잠시 빈틈을 보인 사이 제압당한 배신자 중 한 명이 왕자를 죽이려 달려들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으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에제인 왕자가 각성했던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랐어. 그런 능력은 처음 봤거든. 뭔지 알겠어?”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유더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빛이 팍 터져서 눈을 감았다 떠보니까 공격하려고 달려든 사람은 죽어 있고, 왕자님 주변에 신기한 기운을 띤 뭔가가 돌고 있었어. 처음에는 빛 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돌이더라.”

맥이 빠진 듯한 칸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더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역시.’

유더는 그가 알던 에제인의 능력이 이번 생에도 똑같이 발현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했다.

이전 생에 만난 에제인의 이명은 여섯 별이 따르는 은의 제왕이었다. 그 이름은 언제나 그의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주인을 지키는 여섯 개의 빛 덩어리 때문에 생겨났는데, 겉보기에는 영롱하기 그지없는 빛 안에 든 알맹이가 실은 그저 평범하게 생긴 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유더 또한 그를 직접 만나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정보였다. 아마 멋없는 정보라고 생각했기에 에제인 왕 또한 그 사실을 크게 알리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에제인은 그 빛덩어리들을 이용하여 누구보다 강력한 방어의 힘을 발휘했다. 각성한 이후 그를 물리적으로 상처입힐 수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방벽의 수호자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전 생의 에제인도 이번과 비슷한 이유로 각성했던 게 아니었을까.’

수도 없이 목숨의 위기 앞에 홀로 내던져졌던 왕자가 얻어낸 유일한 무기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돌 몇 개라는 사실이 상당히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빛이 난다 해도 결국 돌은 돌이었으니까.

“다들 깜짝 놀랐지. 왕자님 본인도 너무 놀라셔서 어찌 해야 할 줄을 모르셨어. 그래도 일단 남은 배신자들은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쫓으러 갔는데… 우리가 쫓을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들이 이미 다 때려잡아 놨더라구.”

칸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알고 보니 사라인 대삼림에 있던 나그란의 별 거점에 머무는 각성자들이었어.”

유더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깨어난 이래 머리가 멍해 잠시 잊고 있던 나그란의 별이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나그란의 별이라면, 나도… 본 것 같은데.”

“응. 들었어. 네가 만났던 사람들도 나그란의 별이고,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도 나그란의 별이야. 덕분에 우리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었지.”

“무슨 소리야? …나그란의 별과 단순히 마주치기만 한 게 아니었어?”

“놀라지 마. 우린 그 사람들이 사는 마을까지 다녀왔어.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전에 내가 말했던 나그란의 별 거점 중 한 곳에 다녀왔다고 해야겠지.”

“뭐?”

나그란의 별이 만든 거점에 갔다니. 그건 또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들을수록 점점 더 의문만 강해져 고개를 기울이자 칸나가 드디어 원하던 반응을 얻어 만족스럽다는 듯 코를 울렸다.

“놀랄 거라고 했잖아. 세상에, 왕자님을 모시고 가기 위해 대삼림까지 왔다가 배신자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죽을 뻔했던 그분의 부하들이 거기 사람들에게 구해져 머물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은 장난스럽게 내뱉지만 그때는 정말 식은땀을 흘렸다며 칸나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병단원들은 눈앞에 널린 시체를 보며 말을 잃었다. 막 마지막 배신자의 배를 맨손으로 뚫어 죽이고 시체를 버린 사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평범한 사냥꾼처럼 옷을 입고는 있지만 철처럼 딱딱하게 변한 기괴한 손가락은 숨길 수 없었다. 칸나는 그가 각성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뭐야. 또 있었네? 당신들도 이자들과 한패요?”

“그 반대다. 우린 그들을 쫓고 있었어.”

“아…. 그래? 우리 쪽 사람들은 이자들이 엄청 못된 사람들이라고 하던데? 흠.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네.”

사내가 등 뒤에 있던 이들을 눈짓으로 가리켜 보이며 투덜거렸다. 하나같이 어딘가 심하게 다친 듯 보이는 부상자들이 마병단원들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저 부상자들은 각성자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 하는 집단일까.’

의문 속에서 순식간에 긴장감이 팽팽해졌던 그때, 한발 늦게 창백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에제인 왕자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너희는?”

“와, 왕자님?”

부상자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뭐야. 기다리던 분이 드디어 오신 거였수?”

각성자 사내가 귀를 파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시체가 쌓여 있는 산장이 아니라, 사내가 안내한 그들의 마을로 향했다. 그곳에 에제인의 살아남은 부하들이 몇 명 더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원래는 안 된다고 지럴들 하겠지만, 힘들게 살린 손님들이 기다리던 분이고, 다들 각성자라고 하니까 이번은 좀 봐주겠지 뭐. 대신 여기서 본 건 모두 비밀로 해 주쇼.”

처음에는 믿지 않았었는데, 그가 안내한 곳에는 정말 마을이 있었다. 대삼림의 음침하고 빽빽한 숲속에 그토록 정상적인 마을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이들의 충격을 이해한다는 듯 그들을 안내한 사내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우리가 여기 산다는 건 아무도 몰라. 능력으로 숨기느라 힘깨나 썼지. 요즘은 사람이 많아져서 좀 아슬아슬하긴 한데… 저 멀리 사는 마법사 나부랭이들 정도만 아니면 좀 들켜도 상관없다는 게 내 생각이요. 마을이 들키는 것만 아니면야 마주쳐도 다들 화전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더라구.”

사내는 마병단원들이 에제인의 부하라 지레짐작했다. 에제인은 다시 만날 줄 몰랐던 부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번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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