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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85화 (285/805)

285화

손가락 하나 들 수 없을 것처럼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 의지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도 눈앞이 검고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지금 제가 땅에 쓰러졌는지, 아니면 그냥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전신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소진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이런 현상을 겪은 것이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지만, 이전에는 몇 번 겪어 보았던 일이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한 사람이 몸에 담을 수 있는 기운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이전 생에는 꾸준한 수련을 통해 마나 홀에 들어가는 힘의 양을 늘렸지만 지금은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한계 수치가 훨씬 낮은 상태였다.

유더는 눈을 감고 느릿하게 호흡을 이어나갔다. 문득 이와 비슷한 현상을 처음으로 겪었던 날이 떠올랐다. 벌레처럼 우글대며 몰려든 몬스터들 앞에 나서 서부의 골짜기 하나를 무너뜨려 메워 버렸던 때였던가. 전신의 감각이 실처럼 뚝 끊어졌다가 다시 회복되고 나니 눈앞에 키시아르가 있었다.

그는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유더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웃는 것 같기도, 혹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향하여 유더는 단 한 마디 말만을 힘겹게 내뱉었다.

재를 치우는 방법, 열 가지 모두 찾았습니다.

그 직후 다시 기절했기에 키시아르의 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때 느꼈던 기분만은 아주 선명히 되살아났다.

그간 안고 있었던 모든 불안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한 시원함과 기쁨.

그리고 가슴 안쪽이 아프게 저릴 정도로 짓누르던 어떤 찡하고 격렬한 감정.

제 것임에도 남의 것 같고, 남의 것 같으면서도 제 것 같던 그 낯선 감정의 기억을 자연스레 이어 떠올린 순간 유더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뭐지?’

시원함과 기쁨까지는 확실했지만 그다음은 무언가 이상했다.

그때 제가… 그런 감정도 느낀 적이 있었던가?

“…….”

유더는 싸늘한 전율과 함께 번쩍 눈을 떴다. 아주 오랜 시간 기절해 있었던 것 같았는데, 눈을 뜨자마자 보인 페투아멧의 시체를 보니 그렇지는 않았던 듯했다. 검게 가물거리는 시야가 답답해 팔을 들어 올리려 하자 누군가가 손을 붙잡아 부드럽게 만류했다. 코를 찌르던 역한 비린내가 아닌 익숙한 향이 훅 일며 몸을 감싸 안았다.

“…부로 ……면 안 돼.”

귀가 먹먹한 탓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으나 일부분만으로도 정신이 단번에 깨어나기는 충분했다. 유더는 제 몸을 받쳐 안은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몇 번을 노력하고 나서야 겨우 누군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처음 밝힌 빛이 그러했을까.

유더는 3일 만에 보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깨어난 순간 되찾았다 생각했던 현실감이 도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단장님?”

제 목소리임에도 잘 들리지 않아 못 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잠시 후 잡혀 있던 손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그의 말을 들었다는 확실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파도 같은 감정을 읽어냈다. 절로 등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슬쩍 시선을 피하자 겨우 주변 풍경이 어느 정도 머리에 들어왔다.

그들은 유더가 페투아멧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거대한 덫 속에 있었다. 절벽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무어라 소리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작은 빛 덩어리가 그들의 주변을 떠다니는 걸 보면 상황이 모두 잘 정리된 모양이었다.

유더는 제가 죽인 페투아멧의 시체를 향해 다시 한 번 눈길을 돌렸다. 혀를 잘라내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데, 꿰뚫린 채 미동도 않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확실히 놈을 죽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페투아멧이 죽었다. 정말로 이번 생에는 유더 아일이 저 악몽 같은 몬스터를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몸 상태는 엉망이 되었지만 사지가 잘려 나가는 수준의 부상을 입지도 않았고, 마병단이나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도 않았다. 부서진 건 서부의 마을이나 도시가 아닌 사라인 대삼림뿐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키시아르 또한 이번에는 더없이 멀쩡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오랜 미련과 숙원을 해결한 것처럼 시원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웃어?”

머리 위에서 키시아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꼴로 지금 웃음이 나오나?”

제가 웃었던가? 스스로는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볼 수 없으니 정말 웃었는지 아닌지 확신이 어려웠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약속은… 확실히 지켜 주셨군요.”

말을 돌리자 키시아르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좀 일어나기는 했지만 말이지…. 낮은 목소리와 함께 감정이 담긴 손길이 유더의 몸을 추슬러 품에 안았다. 키시아르보다야 작다지만 저 또한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충분히 껑충하게 큰 사내인데, 아이처럼 가볍게 안는 모습을 보니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묘하게 실감이 났다.

하지만 실감은 실감이고, 안겨 가고 싶지 않은 감정은 그것과는 또 별개였다.

“제 발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 손을 스스로 들어 올릴 수 있다면 내려주지.”

“…….”

유더는 팔에 힘을 주어보았다. 그러나 손끝만 조금 움찔거렸을 뿐, 몸은 조금도 주인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키시아르가 그 모습을 보고 또다시 깊은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몹시 말하고 싶은 듯하면서도 참는 기색이 느껴졌다.

“다들… 어디에 두고 혼자 오신 겁니까.”

유더는 다시 한 번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키시아르의 표정은 그 질문을 듣고 더욱 딱딱해지기만 했을 뿐, 조금도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그 부분은 지금 신경 쓸 게 아닌 것 같군. 아픈 곳은 없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도 어디가 아픈지 모를 만큼 심각하다는 뜻이군.”

짤막한 대꾸와 함께 몸을 받쳐 안고 있던 손가락에 또다시 힘이 꾹 들어갔다가 풀렸다. 유더는 순간적으로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던 마병단 단장실 문을 떠올리고 말았다.

‘역시 그건 키시아르가 낸 자국이었겠지.’

그런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제 몸을 안은 사내의 팔에서는 그저 단단한 안정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타인의 팔 안에 있음에도 불안하지 않다는 사실이 문득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불안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건 마치…….’

“왜 그렇게 보지? 아픈가?”

“…아닙니다.”

유더는 묘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걱정스레 저를 보는 붉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이번에는 눈을 뜨기 전 떠올렸던 과거의 기억 일부가 물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데도,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속 어느 부분이 찡하게 아려 왔던 낯선 감정.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 중이었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키시아르였나.’

제가 다른 이도 아닌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니. 머리는 그 사실을 몹시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가슴은 아주 오랜만에 잃어버렸던 빈 조각을 되찾은 듯 놀라운 감격으로 떨었다.

가벼운 혼란을 느끼는 동안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하다고 판단했는지, 키시아르가 미간을 찌푸린 채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닙…….”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키시아르가 한 손을 뻗어 유더의 눈을 가렸다. 그의 손에서 흰빛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유더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기절을 맞이했다.

***

주변이 너무나 시끄러웠다. 도저히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기에 유더는 어렵사리 이를 악물고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떠들썩한 소리가 한층 더 커지더니, 마침내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가 되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유더. 정신이 들어?”

“……칸나?”

유더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들리는데도 낯익은 동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왜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눈앞이 무언가로 가로막힌 상태인 듯했다. 그는 멍하니 손을 올려 눈을 문지르려 했으나 누군가에게 곧바로 붙잡혀 만류 당했다.

“안 돼. 얼굴 만지지 마. 붕대를 감아 놨어.”

“왜…….”

“몬스터의 체액을 전부 뒤집어썼다면서. 대체 왜 그랬어.”

칸나의 목소리 속에 떨리는 감정이 뒤섞였다.

“너 혼자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면서 네가 제일 크게 다친 것 알아?”

“……상태가 심각해?”

“그걸 말이라고 해?”

오른쪽 어깨 부근에서 찰싹 때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화가 나서 때린 듯했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엉망이야! 눈이랑 귀도 심각하고, 갈비뼈도 부러졌었고, 힘도 하나도 안 남아 있었다고 그랬고, 또……!”

“거기까지만 들을게.”

유더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을 들은 것치고는 그리 아프지 않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단장님은?”

“단장님은…….”

대답하려는 듯했던 칸나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건 몰라도 돼. 일단 더 쉬어.”

“칸나?”

단순히 말을 미룬 것이라기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페투아멧은 죽였는데, 그러고 보니 왜 아직도 이렇게 주변이 어수선하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들. 고함. 신음. 그리고…… 폭음.

‘……폭음?’

유더는 멍하니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끝난 게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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