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이봐! 괜찮아?”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를 걱정했다. 근처에 그를 돕기로 한 각성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더는 바람의 힘으로 공격을 정신없이 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혹시 검, 있으십니까?”
“뭐, 검?”
“떨어트렸습니다! 여분이, 있다면 좋겠지만, 없다면…….”
말을 잇던 도중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귓가를 스쳤다. 입을 다물고 키가 큰 나무의 가지 위로 뛰어오르자 페투아멧이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들리지 않는 한쪽 귀까지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 만큼 독기 서린 소리였다.
유더는 머릿속이 멍멍해지는 기분에 나무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알겠어! 검이란 말이지! 찾아다 던져줄 테니 일단 가쇼!”
다행히 말하고자 했던 뜻은 제대로 전해졌는지 상대가 제대로 된 답변을 돌려주었다. 유더는 그대로 거대한 나뭇가지를 밟고서 뛰었다. 그가 나아가는 길을 따라 밑에서 페투아멧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모든 것을 몸으로 밀어버리며 달려오는 몬스터 때문에 땅이 무너지고 숲이 부서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페투아멧의 몸에서 흘러나온 독이 자아낸 연기가 어둠 속의 숲을 메우니 마치 대삼림의 멸망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페투아멧을 유인하는 작업은 유더 아일이 죽음에서 되돌아온 뒤 수행한 모든 일 중 가장 어렵고 힘겹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몬스터의 시선을 제게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너무 빨리 도망쳐서는 안 되는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능력을 써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순간 그 힘마저 흡수해 더 커질 것이 뻔하니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만 했다.
유더는 중간중간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몬스터들을 정리하는 마법사들이나 각성자들의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속도를 늦추려 하는 페투아멧의 주의를 끌기 위해 몇 번 위험을 무릅쓰고 불이나 물의 힘을 사용했다. 최대한 흡수할 틈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페투아멧은 어느 샌가 처음 유인을 시작했을 때보다 배는 더 커진 상태였다.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나무를 피해 몸을 날리면서,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황금빛 나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번에는 그 황금빛이 켜지기까지 이전보다 시간이 더 걸린 것을 보면 그쪽도 쉽지 않은 상황임이 느껴졌다. 저 황금빛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폭음도 모두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그를 바른 경로로 안내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마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를 훔치며 유더는 땅을 딛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흥분으로 날뛰며 전신의 근육과 폐가 터질 것 같았던 감각도 어느 순간 한계를 넘으면서 도리어 조용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어딘가에서 여태까지 쫓아온 황금빛이 아닌 붉은색 나무가 환한 빛을 켜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드디어.’
붉은색은 유더가 요청했던 가장 높은 지형 바로 앞에 다다랐을 때 표시해주기로 한 색이었다. 서부 연합 마법사들이 기어이 어둠 속에서 수많은 장애물을 뚫고 그를 끝까지 안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고요했던 세상이 사라지고 막혔던 소리와 속도감이 모두 평소대로 되돌아왔다.
그아아아아아-
유더는 시야를 뒤흔드는 페투아멧의 고함에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집만큼 커 보이는 동공과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는 페투아멧이 이를 드러내며 독을 뿜어내기 위해 멈춘 일순간을 노려 도망치던 도중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온 돌을 날려 보냈다.
바람의 힘을 실은 팔로 날려 보낸 돌은 페투아멧의 한쪽 눈 안에 제대로 들어가 박혔다. 검은 체액이 사방으로 튀며 고통에 찬 발광이 또다시 주변을 찢었다.
제대로 자신을 쫓아오게 만들려면 페투아멧의 눈이 멀쩡할 필요가 있었기에 여태까지는 그 부위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곧 있으면 목적지이니 조금이라도 더 치명적인 공격을 먹여 기운을 빼 두어야 했다.
바람을 밟고 뛰어 마지막 황금빛 나무를 지나치고,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나무를 향하여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공격이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여태까지보다 훨씬 거칠어진 공격에 다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본능과 반사신경, 그리고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의 기억 덕이었으리라.
“이쪽입니다! 여기예요!”
멀지 않은 곳에서 마법사 로브를 걸친 누군가가 크게 손을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저 앞으로 가시면 언덕의 끝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알려주길, 아까 거점에……!”
팔을 흔들며 위치를 알려 준 마법사의 용감함은 칭찬할 만했으나, 그는 때마침 꼬리로 땅을 내리쳐 부순 페투아멧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느라 미처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다행히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낡은 옷을 걸친 젊은 각성자가 불쑥 나타나 그의 겨드랑이를 잡고 나무 위로 피신했기에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제대로 협력 작업이 이루어졌을지 의문이었는데, 아무래도 다급한 상황에 힘입어 서로 도움을 잘 주고받은 모양이니 다행이었다.
“주변에 계신 분들 모두 이제 멀리 물러나십시오!”
유더는 끝이 보이는 언덕 너머를 향해 달려가면서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다.
“끝에 도달하는 순간 이곳 전체를 무너뜨릴 겁니다!”
“잠깐만! 그 전에 검!”
마법사를 피신시켰던 젊은 각성자가 먼 나무 위쪽에서 크게 외쳤다.
“우리가 당신 검을 찾아왔으니 받아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긴 검을 망설임없이 내던졌다. 유더는 바람의 힘에 휩싸여 날아오는 제 검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었다. 몇 번이나 보통 무기는 제대로 박히지도 않을 만큼 단단한 몬스터를 내리치고 온갖 것을 부식시키는 독이 서린 체액을 뒤집어썼음에도 그 검의 예리함은 변함없었다. 과연 최고급 유칼락티움으로 만든 검다웠다.
생각해 보면 그 검을 만들어 하사해 준 이도 키시아르였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유더는 다급한 상황조차 잊고 잠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키시아르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검 손잡이를 다시 쥔 순간 마치 그가 등 뒤에 버티고 있을 때와 같은 기이한 안정감이 몸을 감쌌다. 피부를 자극하는 페투아멧의 살기도, 멍멍한 귀와 머리도, 모두가 잊혀지는 듯한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짧게 스쳐지나갔고 유더는 다시 현실에 내던져졌다. 그는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을 삼키려 달려드는 페투아멧을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바람을 밟고 높이 뛰면서 지형을 살피자 구부러진 나무로 뒤엉킨 언덕 끝 아래 펼쳐진 가파른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괜찮겠어.’
높이는 부족한 편이지만 그건 그만큼 땅을 깊이 부수면 되는 문제였다.
‘단 하나 걱정되는 게 있다면 남은 힘이 받쳐줄지의 여부인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생각보다 훨씬 많은 힘을 썼다. 지형을 바꾸어버릴 정도의 힘을 짜내는 건 이전 생에서도 하루에 한 번 이상 해내기 어려웠었다. 키시아르의 몸 속 힘 덩어리를 흡수한 듯했던 날 이후 내내 유더를 불편하게 했던 과도한 힘 발현이 하필 필요할 때 진정되었다는 사실이 이제와 참으로 아쉬웠다.
‘그랬다면 약간의 힘만 써도 원하는 바를 손쉽게 이룰 수 있었을 텐데… 뭐 어쩔 수 없으니 있는 힘으로 하는 수밖에.’
유더는 언덕의 끝을 조금 앞두고 멈춰 섰다. 쫓던 사냥감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으며 돌아서자 페투아멧 또한 움직임을 멈추고 경계하는 태세를 보였다. 곳곳이 흉하게 부풀어 오른 몬스터와 그보다 훨씬 작은 한 인간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대치하는 광경을 보며 주변에 몸을 숨긴 이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과연 저 사내가 장담했던 대로 혼자서 악몽 같은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이제 판가름 날 시간이었다.
“…….”
긴장감 속에서 페투아멧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가시 박힌 거대한 꼬리를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 흔드는 몬스터의 앞에서 여전히 몸을 피하지 않는 유더를 보며 마법사와 각성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삼켰던 바로 그 때,
우르릉.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지진……?”
근처에 숨어 있던 어느 마법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페투아멧 또한 움직임을 움찔 멈추었다. 공격하려던 시도를 멈추고 독기 서린 숨을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몬스터의 시선이 점점 크게 떨리는 발밑을 혼란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공기가… 아니, 대삼림 전체가…….”
유더에게 검을 던져주었던 젊은 각성자가 부르르르 떨리는 나뭇가지와 잎을 보며 숨막힌 목소리를 흘렸다. 그의 말대로 흔들리는 건 땅만이 아니었다. 우르르 떨리는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나무가, 바위가, 공기가, 마침내는 그 너머의 하늘까지 흔들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주 작았던 흔들림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고 크게 튀어 오르는 공처럼 절정에 달한 그 순간,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언덕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악!”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땅이 뒤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먼지와 연기, 피부로 전해지는 엄청난 힘의 파동이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것은 경이였다.
여태껏 누구도 인간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한 적 없던 대자연이 누군가의 의지를 따르는 소리였다.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언제나 그곳에 멈춰 있었을 거대한 자연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동안 누구도 감히 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거대한 압도와 공포, 경이만이 그들의 전부를 지배할 뿐이었다.
마치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지진과 먼지가 잦아들었다.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어느 마법사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손에 쥐고 있던 마도구를 흔들자, 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밝혔다.
“맙소사…….”
작은 빛 아래에 그들이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단히 웅크린 거대한 짐승처럼 버티고 있던 높은 언덕은 반 넘게 사라졌고, 그 아래 인위적으로 잘라낸 듯 날카로운 절벽만이 보였다. 그 아래 펼쳐진 끝도 없이 파헤쳐진 구덩이는 골짜기라 부르는 쪽이 더 걸맞아 보일 만큼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그 아래 아무렇게나 비죽비죽 솟아난 창과 같은 바위들 위로, 추락하여 꿰뚫린 몬스터의 몸뚱이가 얼핏 보였다. 여태까지 그토록 크고 무시무시해 보였던 몬스터는 무력한 작은 짐승처럼 으스러진 채 긴 혀를 빼물고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 앞에 검을 들고 선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보며 모든 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누구도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소리내어 표현할 수 없었다.
유더는 아주 느리게 검을 들어 올렸다가, 푸른빛이 반짝이는 혀를 향하여 팔을 내렸다. 어린아이라도 피할 수 있을 듯 느린 공격이었으나 페투아멧은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늘어진 몸이 몇 번 움찔거렸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잠시 후, 거대한 혀가 검 아래 썩둑 잘려나가며 엄청난 양의 체액이 비산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것을 뒤집어쓴 사내는 잘려나간 혀에서 푸른빛이 깜박이다 멈출 때까지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모든 빛이 멈추고 페투아멧의 찢어진 동공이 풀리자 유더의 손 안에 쥐고 있던 검 또한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몸을 보며 모든 이들이 막 무어라 입을 열려던 순간, 멀리서부터 순식간에 날아온 그림자가 서슴없이 아래로 뛰어내려 그를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