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유더는 그들이 또다시 페투아멧을 공격하려 하는 낌새를 느끼고 몸을 날렸다. 양측의 공격을 물과 바람의 벽으로 동시에 가로막자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으며 상황이 잠시 소강되었다. 평소보다 엄청난 힘을 소모해야 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은 듯하니 다행이었다.
“마, 마법사인가?”
“아니야. 각성자야!”
“당신, 누구요?”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유더를 보고 깜짝 놀란 각성자들이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유더는 그들의 면면을 살피며 낮게 물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당신들이야말로 누구입니까? 왜 여기서 몬스터를 상대하고 계신 겁니까.”
곧장 마법사가 아닌지 의심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서부 연합 마법사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인 듯했지만, 정체가 확실히 짐작가지 않았다. 유더의 질문을 들은 각성자들 중 한 명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린 그냥, 마을에 저놈이 접근하는 걸 막으려고 유인을 하려다가…….”
“너,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조용히 혀!”
“악! 하, 하지만 저쪽도 각성자라면 굳이 안 이래도……!”
“그냥 닥치라고!”
입을 연 이의 등을 다른 각성자가 거세게 후려쳤다. 그러나 이미 들을 건 다 들은 뒤였다.
‘마을이라고? 여기 산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상인이나 용병으로는 보이지 않는 평범한 차림새들만 보면 로나가 말했던 화전민일 가능성이 제일 커 보였다. 하지만 이 많은 이들이 전부 각성자인 집단을 과연 단순한 화전민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말없이 의심의 시선이 오고 가는 동안 유더의 기억 속에서 정체를 추측할 만한 집단이 하나 더 떠올랐다.
‘……혹시?’
서부에 오기 전, 칸나는 나그란의 별 출신 형제 가일과 두일에게서 그들의 거점 중 하나가 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읽어낸 적이 있었다.
유더는 나그란의 별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가장 먼저 연상 작용으로 떠오른 나한의 화상 입은 얼굴을 머릿속에서 떨쳐낸 뒤 미간을 찌푸렸다. 저들이 정말 나그란의 별이라면 몹시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좀 더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으나 콧숨을 몰아쉬던 페투아멧이 또다시 그르렁대기 시작했기에 대화를 더 이어나가는 건 일단 미뤄두기로 했다. 유더는 각성자들을 등지고 몸을 돌리며 곧장 입을 열었다.
“저 몬스터는 공격할수록 점점 커지는 몬스터이니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십시오. 이제부터는 제가 상대할 것입니다.”
“저놈이 공격할수록 커지는 지랄맞은 놈이라는 건 우리도 아는데, 그걸 혼자서 어떻게 죽이려구? 당신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나?”
각성자들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애꾸눈 사내가 물었다. 유더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아들며 페투아멧이 휘두른 꼬리를 바람의 힘과 함께 막아냈다.
살덩이와 부딪쳤다기보다는 마치 철갑 덩어리와 충돌한 것처럼 엄청난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거세게 밀려났다. 검을 타고 전해지는 압력에 저절로 이를 악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전 생에서 마주쳤던 크기에 비하면 아직 작다고 할 수 있는데도 힘이 껑충 빨려나가며 발뒤꿈치가 땅에 약간 파묻힐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작은 인간 하나가 내보인 여태까지와는 다른 힘에 깜짝 놀란 듯한 페투아멧이 움직임을 멈춘 사이 유더는 질문을 한 사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대답은 이걸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저걸 진짜 혼자 막네…….”
뒤에서 들려온 얼이 빠진 듯한 중얼거림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유더는 뒤늦게 쫓아와 고개를 내민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목표는 발견했습니다. 곧 유인을 시작할 테니 피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쪽에 계신 분들은 누…… 흐억.”
각성자들을 발견하고 제 눈을 의심하듯 입을 벌렸던 마법사들이 새로운 적의 등장을 감지하고 몸을 돌린 페투아멧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페투아멧이 느리게 쿵쿵거리며 그들을 쫓아갈 기세를 보였다.
‘안 되지.’
마법사들은 유더가 페투아멧과 조우하는 즉시 주변의 다른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한편, 앞서 나아가면서 목표 지점까지 가는 길에 있는 나무 위쪽 나뭇잎의 색을 바꾸는 마법을 써 길을 안내해 주기로 계획한 상태였다. 유더는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나무 하나의 위쪽 잎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며 각성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이 몬스터를 잡는 데 도움을 주실 의향이 있다면 저 마법사분들과 함께 다른 몬스터를 잡는 작업을 도와주시고, 없다면 방해가 되지 않게 물러나십시오.”
“뭐, 뭐요?”
“어쩌실 겁니까.”
서로의 얼굴을 다시 마주본 각성자들이 이내 애꾸눈 사내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애꾸눈 사내는 욕을 한 번 중얼거리고는 ‘알겠수다.’ 하고 결정을 내렸다.
“당신네들이 실패하면 그 다음은 우리 마을로 올 테니 도리가 없지.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아무튼 당신이 저걸 잡을 수 있다고 하니까 일단 끝나고 얘기하자고.”
나한만을 알고 있었던 때의 유더였다면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 해도 나그란의 별로 의심되는 이들에게 이런 요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각성자가 된 이후 주변의 배척으로 인해 떠돌면서 배를 곯다 나그란의 별에 합류하게 되었다던 가일과 두일 형제의 정보를 말해주던 칸나의 얼굴을 떠올리자 무작정 적대적인 모습부터 보일 수가 없었다.
일단 저쪽도 이 상황을 예상치 못한 채 맞닥뜨린 건 확실한 모양이니, 페투아멧을 처리하는 데 도움을 줄 지원자가 더 생겼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합지졸 각성자들 집단이 공격마법을 거의 다루지 못하는 마법사보다 훨씬 나을 듯했다.
유더는 상황 판단을 미루고 일단 바람을 밟고 뛰어올라 페투아멧의 머리를 검으로 내리쳤다. 검은 체액이 튀면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불타는 듯한 증오를 담고 유더를 노려보았다.
전신이 따끔거릴 만큼 강렬한 살기에 반응한 몸이 저절로 위축되었으나 유더는 빠른 심호흡 한 번으로 그 감각을 떨쳐냈다. 그는 검을 고쳐 쥔 채 고개를 돌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나뭇잎이 가리키는 경로를 훑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사라인 대삼림 안에서는 지척에 있는 동료의 기척조차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페투아멧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보랏빛 독이 내뿜는 빛만은 눈이 시릴 만큼 확실히 잘 보였다. 적어도 어두워서 목표물을 놓칠 일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었다.
“그래……. 날 봐라.”
이전 생에는 저놈을 직접 죽일 수 없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이번 생에 페투아멧을 죽이는 자는 키시아르가 아니라 제가 될 터였다.
유더는 그를 쫓아오기 시작하는 페투아멧을 향해 뒤로 물러나면서 공격을 퍼부었다. 바람의 힘을 십분 활용하여 빠른 속도로 위치를 옮기고, 제대로 된 공격은 검으로 하는 게 이 유인 작전의 핵심이었다.
이전 생에서 본 키시아르의 움직임을 참고하는 것 같아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이 방법은 확실히 아주 잘 먹혔다. 페투아멧은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쫓지 않고 유더만을 쫓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몬스터의 몸에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꺾이기를 반복했으나 거슬리는 작은 인간을 잡아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된 페투아멧은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유더는 머리 위를 스치는 꼬리를 피해 몸을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날아든 독과 체액이 드러난 피부에 스칠 때마다 간간이 불에 데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바람을 밟고 위로 뛰어올라 페투아멧의 등 뒤를 벤 다음, 찢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었다. 몬스터가 그의 위치를 잘 볼 수 있도록 잠깐 불꽃을 불러내자 거센 발톱이 그것을 터트려 죽이려는 것처럼 우악스레 날아들었다. 그러나 페투아멧이 움켜쥘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약이 잔뜩 오른 몬스터가 울부짖는 소리가 삼림 내를 울렸다. 그 사이에도 조금씩 더 부풀어 올랐는지 갈수록 울음소리가 더 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보다 더 커졌을 때는 울음소리만 들어도 코피를 흘리거나 고막이 터져나가는 이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유더보다 힘이 약한 마법사들도 이 울음을 듣고 있을 텐데 멀쩡할지 의문이었다.
유더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페투아멧이 쏘아 보낸 독을 피해 또다시 몸을 날렸다. 그 대신 독을 받아낸 나무 몇 개가 일제히 녹아내리며 비통하게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려다본 숲 너머에 황금빛으로 위쪽 잎사귀가 빛나는 나무가 또다시 보였다.
‘저쪽이군.’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유인이 잘 되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하루쯤 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아직 작은 부상 하나 입지 않았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중이었다.
“자… 와라. 더 따라와…….”
유더의 중얼거림에 응답하듯이 페투아멧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머리가 띵한 감각과 함께 귀 안쪽이 근질거린다 싶더니, 무언가가 주륵 흘러내렸다. 잘 들리던 소리가 반쯤 조용해진 걸 보니 아무래도 그의 고막도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한쪽이 나간 모양이었다.
‘저 시끄러운 소리를 안 들을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된 셈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곧 오감을 모두 활용하여 몬스터의 기척을 감지하면서 피하던 작업에 차질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쪽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페투아멧의 꼬리를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끝에 얻어맞고 말았다.
‘아. 이런.’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나무 몇 개를 스치고 날아간 몸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유더는 곧장 제 위로 떨어지는 페투아멧의 공격을 피해 몸을 굴렸다.
쿠웅 하는 어마어마한 진동과 함께 누구라도 몸이 으깨졌을 법한 거대한 몸체가 머리 옆쪽을 스쳤다.
‘제길!’
옆을 더듬었으나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갔는지 잡히는 게 없었다. 어둠 속에서 검을 찾을 시간을 벌 수는 없었기에, 유더는 실책을 뼈아파하면서도 곧장 다시 몸을 움직였다.
“이봐! 괜찮아?”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를 걱정했다. 근처에 그를 돕기로 한 각성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