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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81화 (281/805)

281화

루산에게 부탁한 일은 본인의 생각보다 더 중요했다. 각성자인 유더에게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미약한 질시나 경계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던 마법사들이지만 사제의 앞에서는 달랐다. 여태까지 그 어떤 보답도 받지 않고 마법사들을 도와 준 루산이 묻는다면 그동안 몰랐던 다른 정보를 알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더는 루산에게 치유를 받기 위해 장갑을 벗었다. 며칠간 힘을 많이 쓴 상태였지만 반점은 그리 많이 번지지 않았고 색도 아주 옅었다. 다만 키시아르에게서 힘을 흡수했다고 추정되는 일 이후 줄곧 강하게 발현되던 힘은 이제 효과가 다한 듯 평소와 다름없는 정도로 안정된 상태였다.

‘나 자신을 매개체라 생각해 보면… 안에 흡수한 힘이 다 떨어진 상태 정도로 보면 되는 건가.’

키시아르의 내부에 든 힘을 더 흡수한다면 다시 이전처럼 힘이 강하게 발현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변화가 생기게 될까. 그에 대해 생각하면서 루산이 치유를 위해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고 있던 중, 유더는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제님! 사제님! 여기 계십니까?”

“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루산이 대답함과 동시에 유더는 도로 손에 장갑을 꼈다. 문이 열리며 얼굴을 내민 어느 마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마법진을 살피러 거점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몬스터에게 공격당했습니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바로 봐 주실 수 있으실까요?”

마법사의 손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루산의 안색이 변했다.

“몬스터라니. 또 이상발생이 일어난 건가요?”

“아뇨. 그게, 적은 한 마리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놈이었는데 글쎄 공격을 할 때마다 계속 더 커지면서 강해졌다더군요. 마도구로 아무리 공격해도 죽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꼬리에 달린 가시에 찔려 부상을 입은 사람이 발생해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는데, 거기에 아무래도 독이 묻어있었던 모양입니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페투아멧이었다.

기어이 이전 생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루산 사제님. 아무래도 방금 드린 이야기는 잊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더는 루산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이며 몸을 돌렸다. 대삼림에 내리는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들이 불길하게 흔들거렸다.

***

“으윽, 크으으…….”

“정신차려! 해독 마도구는 어디 있어? 뭐? 아까 그게 끝이라고?”

“사제님은 아직 못 찾았나?”

“찾았습니다! 여기 계십니다!”

거점에서 유일하게 멀쩡히 남은 건물 1층은 부상자와 주변을 둘러싼 마법사들 때문에 때아닌 아수라장이었다. 유더는 루산을 이끌고 뛰어가는 마법사의 뒤를 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중앙에서 초조하게 움직이던 수장 미칼린이 루산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사제께서 곧장 오실 수 있도록 물러나라.”

마법사들이 일제히 물러서자 루산이 부상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유더는 그 너머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마법사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와 함께 멀쩡히 이야기를 나누었던 로나 베잇이 검게 물든 얼굴로 그곳에 누워 있었다.

“상태가 심각하군요. 일단 신성력을 써 보겠지만, 피를 내어 독을 빼내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돕겠습니다.”

유더는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이런 작업에 익숙하지 못할 마법사들보다야 그가 좀 더 나을 터였다. 유더의 얼굴을 본 미칼린의 입매가 굳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더는 누군가가 가져다 준 단검을 뽑아 페투아멧의 꼬리에 찔린 상처가 남은 로나의 팔을 베었다. 어설프게 배어 나오던 검은 피가 순식간에 줄줄 흘러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찔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는지, 조금 시간이 지나자 흘러나오는 피의 색이 좀 더 맑아졌다. 그것을 확인한 루산이 더욱 강한 신성력을 퍼붓고, 마법사 여럿이 해독 마법을 완성하여 힘을 보태자 로나의 얼굴빛이 서서히 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미칼린을 마주보았다.

“왜 이분께서 다친 겁니까? 숲에는 낮에 이미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당신과 대화를 나눈 뒤 아무래도 내가 그곳을 직접 살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미칼린이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유더는 그의 옷과 손도 이전과 달리 피와 얼룩, 그리고 상처로 더러워진 상태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계속 그곳을 살펴 온 로나와 다른 마법사 몇 명을 데리고 갔는데 제어진을 살피던 도중 당신이 말한 그 몬스터가 나타나더군. 마도구로 공격하여 죽이고 뒤쪽에 대충 치워둔 뒤 마저 점검을 끝내려 했지만… 그것이 사실 완전히 죽지 않고 근처에 있던 증폭진의 마정석 일부를 집어먹었다는 걸 점검이 끝난 뒤에야 깨달았소. 그리고는…….”

페투아멧은 공격을 받을수록 조금씩 더 부풀어올랐다. 몬스터는 자신을 죽이려는 마법사들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진을 이루던 재료와 마력을 서슴없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뒤늦게 유더가 몬스터의 혀를 잘라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로나가 나서다 부상을 입고, 페투아멧의 울음소리를 들은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기척이 느껴지자 마법사들은 급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유더의 예상대로 전개된 이야기를 하던 미칼린의 눈이 자책으로 일그러졌다.

“아마도 그 몬스터는 마력이나 다른 힘을 흡수할 때마다 그것을 육체 증폭에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되오. 본래대로라면 일정 이상 육체가 확대되었을 때 견디지 못하고 터지는 시기가 올 텐데, 우리가 만든 증폭진에 중첩된 보호의 힘 때문에 아마도 그 한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겠지…….”

그때, 멀리서 음울한 울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미칼린이 입을 다물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불안하게 건물 바깥을 향했다.

“아무래도 곧 이쪽으로 따라올 모양이군……. 당신과 사제께서는 이 안에서 상황을 살피도록 하시오. 우린 대응을 준비할 테니.”

미칼린은 대응을 말했으나, 거점의 방어 마법진도 완전히 수복하지 못한 데다 부상자가 가득한 서부 마법사 연합에서 페투아멧을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마법사들 또한 죽을 날을 받아둔 듯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유더는 상처투성이가 된 미칼린의 손을 내려다보다 침착하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후퇴하시기 전, 그 몬스터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보였습니까?”

“그건 왜 묻는 거요.”

“이곳은 몬스터가 먹어치울 수 있는 마법진과 마력이 가득한 곳 아닙니까.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전에 나가서 반대쪽으로 유인하여 상대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야 그쪽이 낫겠지. 하지만 어둠이 내린 대삼림에서 그런 위험한 일을 대체 누구에게 시키란 말이오. 유인하기도 전에 죽지 않으면 다행일 거요.”

“그건 제가 할 겁니다.”

순간 주변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 방금 내가 한 말을 못 들었소?”

미칼린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아무리 당신이 강한 힘을 지닌 각성자이고 그런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을 예견해냈다 해도 무적은 아니요. 내게도 체면과 염치가 있소. 이 일은 당신이 아니라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이란 말이오!”

“하지만 이 안에 얌전히 있는다고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죠.”

서늘하지만 진실을 담은 말이었다. 미칼린은 그 말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공격할수록 커지는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부상자로 가득한 이곳을 등 뒤에 두려 하는 쪽이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환자는 제 발로 도망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유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사들이 그의 얼굴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보고 있었다.

“당연히 저 혼자서 전부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당신, 정말로 저 밖에 있는 놈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낯이 조금 익은 마법사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일단 조금이라도 작을 때 처치해야 하니 시간을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곧바로 나가서 그 몬스터를 찾겠습니다. 주의를 끌어 저를 쫓아오게 만드는 동안 여러분께서는 증폭진을 삼킨 몬스터 이외의 다른 몬스터들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가장 높은 지형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알려주십시오.”

“그거면 된다고요?”

“그거면 됩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요?”

어안이 벙벙한 마법사들의 곁에서 미칼린이 주름진 눈가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채 물었다.

“우리에게 화나지 않소? 사제만 데리고 당장 나가겠다고 말해도 우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대체 왜 가장 위험한 일을 굳이 나서서…….”

“큰 산불로 번질지 모를 불씨를 발견했다면 아직 작을 때 끄는 쪽이 맞겠지요.”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보다 좀 더 불을 잘 끌 수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딱히 누군가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현재의 페투아멧이 이전 생과 같은 커다란 피해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니 괜찮았다. 몬스터를 상대하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기는 해도 몸집이 그리 커지지 않은 상태의 페투아멧이라면 이전 생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도와주실 분은 없으신 겁니까?”

유더의 질문에 마법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잠시 후 손을 올린 지원자들이 연이어 ‘제가 하겠습니다.’를 외치기 시작했다.

유더는 지원자들끼리 서로의 역할을 정리하는 짧은 시간 동안 아직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칼린에게 주머니 안의 검은 덩어리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게 뭐요?”

“제가 낮에 보았다고 말했던 그 몬스터에게서 잘라낸 혀입니다.”

순간 미칼린이 저도 모르게 검은 덩어리를 떨어트릴 뻔하다가는 다시 붙잡았다.

“혀, 혀라고?”

“마정석 부스러기를 삼키고 빛을 내다 꺼졌던 그 혀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수장님이시라면 혹 뭔가 알아내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가져왔었습니다.”

유더의 말에 미칼린이 검은 덩어리를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가 허 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 흔적이 혹 아직 이 안에 남아있다면, 밖에 있는 몬스터가 흡수한 증폭의 힘을 다시 해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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