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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80화 (280/805)

280화

‘키시아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제가 아니라 키시아르가 이곳에 있었다면 로나도, 미칼린도 설득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 상황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아도 그리 생각하면 실패를 한 건 아닌가 싶은 초조함이 문득 떠오르고는 했다.

유더는 계속해서 매만지던 사탕을 꺼내려다, 반대쪽 주머니 속을 불룩하게 차지한 덩어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대화가 중간부터 격렬해진 탓에 페투아멧의 혀를 그 안에 넣어두었다는 사실조차 어느새 잊고 있었다.

‘미칼린에게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이젠 쓸모없어졌군.’

다시 꺼낸 혀 덩어리는 검고 딱딱하게 굳어 타다 만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유더는 그것을 버려야 할지 고민하느라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향하여 다가오는 기척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유더 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돌아본 곳에는 사제 루산이 서 있었다. 그는 피로에 찌든 안색이었음에도 유더를 만나 반가워하는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잠시 수장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님께서는…….”

“저는 이제야 위급했던 분들의 상태가 모두 나아져 좀 한숨을 돌리고 식사하고 온 참이었어요.”

대답한 루산이 유더의 손에 들린 페투아멧의 혀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그건 뭐죠? 어쩐지 굉장히 안 좋은 냄새가 나는데요…….”

“몬스터에게서 잘라낸 혀입니다.”

“네?! 혀, 혀요?”

루산이 기겁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런 흉한 것을 왜 가지고 계세요. 몬스터의 사체는 그 자체로 거의 독이라는 걸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

“보호 효과가 있는 장갑을 꼈으니 괜찮습니다.”

유더가 언제나 끼고 있는 검은 장갑을 본 루산이 ‘으, 음. 그랬군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하고 중얼거렸다.

“몬스터의 사체는 정말 조심해서 만지셔야 해요. 유더 님은 손의 상태가 그렇지 않아도… 으흐흠. 흠. 아무튼, 그러시니 더 조심하셔야지요. 여기엔 지금 저희 둘뿐이잖아요?”

익숙하게 유더를 걱정해 주는 루산의 눈빛 속에 친밀함이 그득했다. 그가 내보이는 따뜻함은 이곳에 함께 남은 하나뿐인 동료를 향한 동질감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유더는 자신이 이곳에 혼자 남겨진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새삼스레 자각했다. 싸늘하게 식었던 몸속에 조금씩 온기가 되돌아왔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그런데 대체 그 혀는 어디에 쓰시려고 갖고 오신 거예요?”

유더는 페투아멧의 혀와 루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해도 될까 싶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제가 쓰려고 갖고 온 건 아닙니다. 그냥… 어쩌면 이것 때문에 마법사분들과의 협력관계가 끝장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

루산이 또다시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제가 치료에 여념이 없는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아니, 아닙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조용한 데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죠. 아. 그래. 저희 숙소에서 말씀해 주세요. 거기가 좋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이틀간 환자들의 곁에서 잠을 청한 루산은 그들의 숙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결국 유더가 그를 이끌어야 했다. 루산은 멋쩍은 얼굴로 침대에 앉아 결연하게 주먹을 쥐고 심호흡을 하다가, 문득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보고 깜짝 놀라 도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저 피는 뭐죠? 혹시 다치셨었어요?”

유더는 그가 발견한 피가 간밤에 암살자들이 흘린 흔적임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루산에게 그 이야기도 해 주어야 할 듯했다.

“아뇨. 제 피가 아니라 간밤에 침입한 암살자들이 흘린 피입니다.”

“암살……? 설마, 그……?”

루산이 눈동자를 사정없이 떨며 입모양으로 ‘넬라른 왕자님을 노리고 온 건가요?’ 하고 속삭였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들은 이미 처리하여 옆 건물 지하에서 잘 자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간 유더가 마법사들을 따라다니며 마력의 샘에서 발견한 정황들이었다.

유더가 마법사들을 돕고, 그들과 함께 마력의 샘 유적지를 따라가 보고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동안 루산은 한번 가로막는 일도 없이 집중하여 끝까지 들었다. 마침내 오늘 나타난 몬스터와 미칼린과의 대화까지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나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유더는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루산을 향해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까지 상황은 이렇습니다만, 사제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계속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니 너무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유더 님은 그러면 이제 단장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실 생각이세요?”

유더의 말을 가로막으며 나직한 질문이 울려 퍼졌다. 연한 새싹처럼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니시죠?”

“…….”

당연히 아니었다. 미칼린을 설득하지 못했다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를 페투아멧을 생각하면 절대로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저녁 어둠을 틈타 몰래 거점을 빠져나가 마력의 샘 근처로 다시 향할 생각이었는데, 루산은 마치 그를 읽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밤에 잠시 마력의 샘 쪽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가 그 주변을 돌아다니도록 놓아둘 수 없으니까요.”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해도 가실 거지요?”

“예.”

단호한 대답을 들은 루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이야기를 듣고도 생각했지만 역시 유더 님은 뭐랄까…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절대로 타협이 없으시네요. 아, 나쁜 뜻이 아니고 물론 칭찬입니다 칭찬.”

타협이라. 마법사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확실히 하룻밤 정도는 타협하여 얌전히 기다리는 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 페투아멧이 불러올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이가 자신뿐인 이상, 유더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타협한 결과가 이전 생과 같은 미래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러한 의미를 담아 침묵하자 루산이 턱 아래를 긁적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기서 아픈 마법사분들을 치료하는 동안 저도 보고 들은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곳 수장님께서 한발 물러서신 이유는 알 것 같아요. 여기 계신 분들만큼 연구를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분들은 처음 봤거든요.”

“…….”

“하지만 유더 님이 그것 때문에 물러나셔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병단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서부에서 몬스터의 이상발생 때문에 고통 받을지 모를 많은 분들을 돕기 위해서잖아요? 지금 하시려는 일도 그것을 위해서고요.”

루산이 결연한 눈빛으로 유더와 시선을 마주했다.

“사실… 유더 님의 추측을 듣고 난 뒤 저는 경전의 1장에 쓰인 말씀을 떠올렸어요. 아시겠지만 경전은 빛의 공평함을 가르치지요. 때문에 균형이 흔들리는 일을 무엇보다 경계합니다. 천칭의 한쪽이 흔들리면 반대쪽도 당연히 그만큼 움직이게 되는 법 아니겠어요?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던 마력의 샘의 균형을 흔든 일이 이러한 결과로 나타났다고 추측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르죠.”

유더는 순간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마력의 샘의 균형을 흔든 일이 이러한 결과로 나타났다는 그 말이 묘하게 감을 자극했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답이 당장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저도 이젠 마병단 소속입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보탤 테니 말씀해 주세요.”

약간 쑥스러운 듯 말을 덧붙인 루산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유더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낯선 기분을 느꼈다.

사제 루산은 이전 생에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페토 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 도중 우연히 마주쳤고, 뛰어난 신성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키시아르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의료부에 들어온 이후에도 이논이나 다른 단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 콧대 높은 태양신 대신전 소속이었던 사람 같지 않다는 칭찬을 종종 듣고는 했다.

유더는 이전 생에 루산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해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그가 자신을 같은 곳에 소속된 동료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사실에서 이전 생과 지금의 차이를 강하게 느꼈다.

스스로를 향한 의심과 초조함이 스르르 사라지자 머리도 갑자기 이전보다 잘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루산을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방금 주신 말씀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 아니. 무슨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아닙니다. 사제님께서 이곳 연합 마법사 분들에게 줄곧 헌신적인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번 일은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요.”

그 말에 루산의 뺨이 일시에 붉어졌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네요. 사실 제가 무슨 대단한 봉사 정신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대신전에 있었을 때는 사제다운 태도가 하나도 없다고 얼마나 욕을 먹었었는데요. 제가 헌신적으로 보였다면 그건 그냥 여러분의 임무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일 거예요.”

사실 방금 전 마병단 소속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제 주제에 건방지다 여길까 싶어 내심 긴장했었다고 속삭이는 루산의 얼굴에서 기쁜 감정이 넘쳐흘렀다.

“자, 뭐든 좋으니 제가 진짜로 도울 일을 말씀해 주세요. 어서요.”

그 기운찬 얼굴을 보며 유더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젊은 사제는 그냥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루산의 말마따나 그 또한 이제는 마병단에 소속된 한 사람인데, 그렇다면 굳이 동료를 제쳐두고 혼자 일을 어렵게 진행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 대삼림의 기운에 다 적응하지 못한 듯 보이는 젊은 사제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는 없더라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충분히 많았다. 이를테면…….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일단 여기서 제가 나갔다 왔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마법사분들에게 서부 연합에서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정보도 좀 더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할 수 있지만 정말 그거면 되나요?”

유더는 소리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도 나가시기 전까지 더 도와드릴 일이 없을지 생각해 보세요. 아, 그 전에 손도 치유받고 가시죠. 혹시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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