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279화 (279/805)

279화

노마법사는 들고 있던 책을 놓고 안경을 벗었다.

“해 보시오.”

“오늘 마주쳤던 몬스터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유더는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페투아멧이 보인 행동 양식, 왕성한 식욕, 마법진과 유적지 근처를 맴돌며 줄곧 남긴 흔적, 마정석을 집어삼키려 한 뒤 혀에서 반짝이던 빛까지 그가 본 모든 일을 설명한 뒤 간결하게 제 추측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저는 그 몬스터가 수장님께서 말씀하신 마력 흡수 성질을 지닌 몬스터라 생각합니다. 일단 두 놈을 죽이기는 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 몇 마리가 더 있을지, 혹은 더 나타날지 모르지요. 빠른 대응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정말로 마력 흡수 성질을 지닌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겠군. 대응이라면… 토벌을 말하는 거요?”

역시 노련한 마법사는 눈치가 빨랐다. 하지만 유더의 목적은 토벌과 관련한 사항만이 아니었다.

“네. 숲속에 놈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찾아내어 전부 정리해야겠지요. 그건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최소한의 보호마법 이외의 다른 마법진은 수복을 멈추고 잠시 해제해 주십사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마법진을 해제?”

“네. 단순히 몬스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기는 합니다만…….”

미칼린의 주름진 눈가가 순간 움찔 움직였다.

“어렵겠소.”

유더의 말을 잘라내며 단호하게 대답한 노마법사가 잠시 후 낮게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보시오. 이곳에 와서 마법에 대해 조금 알게 되기는 한 모양이지만, 마법진이라는 게 그리 쉽게 마음대로 해제했다가 다시 설치할 수 있는 게 아니라오. 차라리 빠른 수복을 추진하면 모를까, 해제는 안 될 소리요.”

“아예 해제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불가능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오. 그곳에 설치된 증폭진을 해제하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려. 수많은 돈과 시간, 인력을 들여 여기까지 끌고 온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라는 뜻인데,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소?”

미칼린이 머리를 저으며 ‘안 될 소리지.’ 하고 반복하여 중얼거렸다.

“그 몬스터는 아주 연약한 놈이라고 하지 않았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는군.”

“부담스러우신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곳의 파손된 진들을 제대로 수복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만약 그 몬스터가 증폭진을 일부라도 흡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더 이상 그저 연약한 놈이라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 안 봤는데 상상력이 좋으시군. 그런 문제는 각성자가 아니라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우리 마법사들이 판단할 일이니 더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상상이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는 아마도 실제로 일어났을 일이었다. 그러나 미칼린은 그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각성자와 마법사를 동시에 언급한 이유는 유더의 행동이 그들에게 지나친 간섭과 월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힘겹게 되돌려 놓은 신뢰 관계다. 여기서 그를 더 자극하는 건 좋은 행동은 아닐 터였다.

‘알고는 있지만…….’

하지만 미칼린이 내보인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이전에 협력을 약속했던 때와는 다소 달라진 태도가 유더의 과거 기억을 자극했다. 페투아멧을 쓰러트린 뒤 무너지는 절벽 위에서 흔들거리던 키시아르의 뒷모습까지 떠올린 뒤, 그는 잠시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셔야 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치솟은 감정이 불꽃처럼 심장을 집어삼켰다.

‘역시 그냥 물러서는 건 안 되겠어.’

유더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수장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진을 해제하자는 그런 말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하시오.”

“저희가 며칠 전 나누었던 협력 관련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

유더는 이전보다 약간 서늘해 보이는 미칼린의 얼굴에 드러난 미약한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살피며 입을 열었다.

“수장님과 저희는 모두 대삼림과 마력의 샘에서 목격된 이상한 균열과 몬스터의 이상발생 간에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여 협력을 하기로 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늙었지만 머리는 아직 멀쩡하오.”

“그 균열이 목격되기 시작한 시기는 마력의 샘에 증폭진이 완성되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때와 같으며, 몬스터가 이상발생하기 시작한 시기와도 거의 비슷합니다.”

유더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 모든 것에 서로 연관이 있다면, 유적의 변화를 불러온 원인인 증폭진에 대해서도 당연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미칼린의 얼굴에서 표정이 스르르 사라졌다. 유더는 그가 또다시 증폭진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에 몹시 큰 불편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으나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샘을 둘러싼 증폭진에 문제가 생긴 뒤부터 현재까지 새로운 균열이 목격되지 않고 몬스터 이상발생도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모든 상황에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수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틀간 로나의 보고를 듣고, 거점을 고치며 수습하는 동안 수장인 미칼린 또한 유더와 비슷한 추측을 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는 가장 큰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태까지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고, 유더가 몬스터를 이유로 증폭진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화제를 바로 잘라버리기까지 했다. 결국 그 또한 연구를 우선시하는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마력의 샘이 지니고 있는 마력, 사라인 대삼림, 그리고 샘을 변화시킨 증폭진과 그때부터 나타난 균열과 몬스터의 이상발생. 거슬러 올라갔을 때 이 모든 일의 시작 부분이 결국 마법사들의 연구에 닿는다면 단순히 연구가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증폭진을 멀리 떨어트려 놓고 생각해야 할까.

해야 할 답은 뻔하다. 그것을 외면 중인 건 마법사들이었다.

“단순히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증폭진 관련 이야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수장님과 서부 연합의 마법사분들은 몬스터의 이상발생 때문에 이미 많은 피해를 입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그리고 지금도 입고 있을 서부의 다른 국가와 제국의 국민들도 생각해 주십시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어떤 쪽인지 저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일이 더 생긴 다음에는 늦습니다.”

미칼린을 처음 만나 그에게 협력을 요청했던 순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미칼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행 중이던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거나, 혹은 아예 중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현실적으로 더해진 것만으로도 보이는 태도가 이렇게나 바뀐 것이다. 거칠고 노련한 맹금류와 같은 샛노란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고민이 파도처럼 너울대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당장 대답하기는 어렵겠소.”

미칼린은 결국 유더의 시선을 외면했다.

“차라리 샘 근처에 설치한 마법들의 구동원리를 알려달라거나, 대삼림의 지리, 혹은 몬스터 토벌에 전격 협력해 달라고 말했다면 나았을 거요. 하지만 증폭진은… 나는 거기까지 손대야 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소. 그것이 불러올 결과에 모든 것을 건 이들이 이곳에는 너무 많아. 그걸 빼고 다른 협력은 얼마든지 곧바로 해줄 수 있소. 하지만 이건 나 혼자서 그러겠노라 결정하기가 힘들다는 걸 이해해 주시오.”

“진리를 쫓다 일어나는 일에서 눈을 돌리고 있던 것이 부끄럽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말입니까?”

폐부를 찌르는 말에 미칼린의 회백색 눈썹 끝이 부르르 떨렸다. 노마법사는 스스로를 향한 부끄러움과 간절히 바라온 연구목표, 그리고 눈앞의 건방지고 당돌한 젊은이를 향한 복잡한 마음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협력 사항을 의논하기로 한 건 지금이 아니라 당신의 일행들이 돌아온 다음이었지 않소? 아직은 그때가 아니오.”

“…….”

“나가 주시오.”

결국 축객령이 떨어졌다. 유더는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내일 키시아르 일행이 약속대로 돌아온다면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어쩌면 그들이 돌아오기 전 미칼린과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이제까지의 협력적인 태도를 아예 뒤집기로 결정할 가능성도 있었다. 돌아온 마병단원들이 황당해하거나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미안해졌으나, 유더는 방금 전 미칼린에게 내뱉었던 말들을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애초에 타이스 율만의 소개편지 한 장으로 구한 협력이었으니 마냥 잘 되기를 바란 것부터 이상했을지 모르지.’

마법사들이 나쁜 이들은 아니었다. 로나도, 미칼린도 모두 충분히 상식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건 그들이 연구하는 분야를 제외한 곳에 한해서였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니 어차피 일어났어야 할 상황이었어.’

이곳을 책임지는 미칼린조차 설득할 수 없다면 그 휘하에 있는 이들과 대화한다 하여 더 나아질 일도 없다. 이후 미칼린이 협력을 완전히 거부한다면 이들과의 협동을 바라지 않고 차라리 여태까지 늘 그래왔듯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쪽이 나을 듯했다.

혼자서 움직이는 데에는 이전 생부터 이골이 났다. 남을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보다는 그쪽이 유더에게도 훨씬 더 편했다.

하지만 불편해진 마음을 이상하게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내가 약해진 건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힘이 필요한 때인데 걱정스러웠다. 유더는 주머니 안에 든 마지막 사탕을 손 안에서 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