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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78화 (278/805)

278화

무슨 말이느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로 어디선가 작게 와작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낙엽을 느리게 밟는 듯한, 혹은 버석대는 무언가를 씹는 듯도 한 희미하면서도 오싹한 그 소리.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이나 짐승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더는 전신의 감각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본능이 경고하는 싸늘한 감각을 쫓아 고개를 위로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거대한 나무 위쪽에서 와작거리며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몬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몬스터!”

“뒤로 물러나십시오.”

유더는 비명을 지르는 로나를 뒤로 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 몬스터는 유더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흔들거리면서 계속 나뭇잎을 뜯어먹기에 바빴다. 몸집은 손바닥만 한 새끼 강아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혀가 아주 길고 두툼했으며 이빨이 날카로웠다. 보랏빛 얼룩이 번진 검고 매끄러운 털가죽과 몸통보다 훨씬 길고 굵은 꼬리 끝에 박힌 가시들을 보자 일순 헛웃음이 흘러나올 뻔했다.

‘저걸 보려고 어제 그 꿈을 꾸었나.’

이전 생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작기는 했지만 보자마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페투아멧을 아주 작게 줄여둔 듯한 그 몬스터였다.

“저 몬스터에 대해 혹 아시는 게 있습니까?”

“없어요. 처음 보는 몬스터예요.”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을 지닌 몬스터가 나타날 확률은 몹시 낮아 너무 비관적인 상상이라더니, 지금 그 가능성이 정말 실제로 구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나는 무어라 말할까. 조금 궁금해졌으나 유더는 아직 답이 확실하지는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확인해 보지는 않기로 했다.

본래 거대한 페투아멧과 작은 무리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은 아주 긴 이름을 따로 붙였었다. 그러나 유더의 추측대로 페투아멧이 우연히 증폭마법을 삼켜 거대한 모습이 되었을 뿐, 사실은 작은 무리들과 같은 개체였다면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유더는 저 몬스터를 일단 그저 페투아멧으로 지칭하기로 마음먹으며 몬스터의 주변을 살폈다.

‘이전에는 무리를 지어 다녔는데 여기엔 한 마리밖에 없나?’

무리로 나타나는 몬스터는 대개 나타날 때도 다 같이 나타난다. 저놈이 여기 있다면 똑같이 생긴 무리도 주변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주변의 나무 위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른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유더는 계속해서 나뭇잎을 뜯어먹는 페투아멧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불꽃이 흘러나와 몬스터가 올라앉아 있는 나뭇가지 끝을 태웠다. 잠시 후 흔들대던 가지가 뚝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페투아멧이 몸을 뒤집은 채 무력하게 바둥거리다 겨우 꼬리를 세워 몸을 바로 했다. 놈이 느릿느릿 유더를 향해 검은 체액을 찍 쏘았지만 그 맥없는 반항은 발끝에도 닿지 못한 채 애꿎은 땅과 풀만 약간 태우고 끝나 버렸다. 이전 생에 보았던 무시무시한 위력에 비하면 고작해야 성냥불만 한 힘이었다.

이렇게나 작고 가소로운 놈이 정말 이전 생에 보았던 그놈인가. 주먹으로 한 대만 때려도 죽을 것처럼 연약해 보여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유더는 짧은 팔다리를 흔들며 숨을 곳을 찾아 기어 다니는 몬스터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꼬리 끝부분의 가시가 땅을 긁으며 자국을 남겼다.

“어……. 저 자국, 어제부터 여기와 유적 근처에 계속 남아 있던 그 자국과 같네요. 다른 몬스터가 아니라 저 녀석이 낸 거였나 봐요.”

뒤로 물러나 있던 로나가 예상보다 훨씬 무력해 보이는 몬스터를 보고 마음이 놓였는지 가까이 다가와 말을 보탰다. 유더는 방금 전까지 마정석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던 마법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 남겨진 희미한 흔적과 지금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페투아멧이 내는 자국이 그녀의 말대로 몹시 비슷해 보였다.

“…그렇군요.”

이번에 이상발생으로 나타난 몬스터의 대부분이 대형 크기였기에 저 자국을 남긴 놈도 어련히 그럴 줄 알았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나니 또다시 이전의 추측들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자국들이 하필 마력이 가득한 이 부근에만 남아있던 것도 아주 우연은 아닐지 모르지.’

“아일 님. 이 녀석이 자꾸 마법진 쪽으로 가는데, 일단 죽이고 살펴보시지 그러세요.”

로나가 그를 불렀다. 유더가 생각에 잠긴 동안 제자리를 돌던 페투아멧이 어느덧 방향을 잡고 느릿느릿 발을 옮겨 마법진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가는 동안에도 눈에 띄는 풀과 낙엽을 욕심껏 혀로 감아 집어삼키고는 했지만 워낙 몸집이 작아서인지 별다른 티도 나지 않았다.

유더는 페투아멧을 죽이기 위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려다 잠시 멈칫하면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저 녀석이 왜 자꾸 마법진과 마력의 샘 근처를 돌아다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혹 잠깐 지켜봐도 될까요.”

“네?”

로나가 기겁을 하거나 말거나 유더는 페투아멧의 움직임을 쫓아 시선을 옮겼다. 수복되다가 만 제어진 근처까지 간 페투아멧은 잠시 냄새를 맡는 듯한 모습으로 코를 하늘 위로 치켜들고 킁킁거렸다. 몸에 비해 큰 입을 쩍 벌려 긴 혀를 내밀었지만 보호진이 만든 투명한 벽은 몬스터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허공에서 그대로 튕겨냈다.

몇 번을 튕겨나가도 멈추지 않고 혀를 내밀던 페투아멧은 아쉬운 대로 쩝쩝거리며 주변 풀을 뜯어먹었다. 그러고는 막이 쳐진 주변을 따라 어슬렁대며 계속 우물대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재빨리 혀를 쭉 내밀었다. 이번에 감아올린 것은 어두운 푸른색을 띤 돌 부스러기였다. 손톱보다도 작은 부스러기가 빛을 반사하여 반짝 빛난 순간 로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벌렸다.

“저건 아까 제가 치우다 만 마정석 파편 같은데……!”

그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페투아멧은 그것을 제 입속에 쑥 밀어 넣었다.

“안 돼!”

로나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마도구를 사용했다. 손에 쥘 수 있는 짧은 곤봉 형태의 마도구에서 날카로운 바람의 마법이 발현되어 몬스터의 머리를 내리쳤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페투아멧이 검은 체액을 토했다. 온몸이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검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전신이 혹처럼 울룩불룩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로나가 고함을 질렀다.

“계속 보기만 하실 건가요? 어서 처리해야죠!”

유더는 검을 뽑아 손잡이를 거꾸로 잡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힘차게 페투아멧을 찔러 내렸다. 몸이 땅에 꿰인 몬스터는 몇 번 경련을 하다 입 밖으로 긴 혀를 힘없이 내밀었다. 검을 뽑아내어 그 혀를 잘라내고 나서야 꿈틀대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역시 이전 생과 마찬가지로 저 긴 혀가 바로 약점이었다.

유더는 로나가 황급히 마법진으로 달려가는 동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죽은 페투아멧의 시체를 살폈다.

“없군요.”

“뭐가요?”

“입 안에 넣었던 마정석 조각이 없습니다.”

“삼키기 전에 죽였으니 어디 떨어졌겠죠.”

로나는 그게 뭐가 중요하느냐는 듯 마법진을 살피기에 바빴으나 유더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죽은 페투아멧의 벌어진 입 안과 주변 풀밭 어디에도 마정석 조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검은 체액투성이가 되어 잘린 채 널브러져 있던 혀 덩어리 사이에서 문득 아주 희미한 파란 빛이 깜박이는 모습을 보았다.

“아, 여기…….”

서둘러 그것을 집어 들었지만 그 빛은 한 번 더 깜박이고 나서 툭 꺼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젠장. 간만에 뇌까린 욕설이 입 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하지만 잘못 본 건 아니야. 로나에게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말은 해 봐야겠지.’

이건 페투아멧이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의 몬스터라는 제 추측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러나 마법진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는 로나를 본 순간, 그녀를 불러 잘린 혀를 보여주고 말을 하려던 생각이 갑자기 바뀌었다.

‘…내 말을 과연 어느 정도로 진지하게 믿고 생각해 줄까.’

그들은 페투아멧이 나타나기 직전까지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그런 몬스터가 정말 나온 것 같다는 말을 한다 해도 착각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연구를 방해하려 든다 여겨 경계를 할 듯한 강한 예감이 들었다.

‘저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진행 중인 마력의 샘 연구의 지속이다. 그것을 방해할 수도 있을 요소에 대한 화제는 어느 쪽이든 기꺼워하지 않아.’

그러나 유더는 제가 착각한 게 아니라고 강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본 빛은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페투아멧의 잘린 혀에서 깜박이던 마법진의 일부와도 동일한 색을 띠고 있었다. 유더는 잠시 손에 쥔 페투아멧의 혀를 내려다보다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이건 일단 가져가서 미칼린에게 보여줘야겠군. 이제 같은 종류의 몬스터가 안 나타난다면 더 좋을 텐데.’

하지만 그가 느끼는 좋지 않은 예감은 이런 경우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마법진 수복을 중단하고 마력의 샘으로 들어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 다시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또 다른 페투아멧과 마주쳤다.

“아까 그 몬스터잖아요!”

크기는 이전에 죽였던 페투아멧보다 더 작았다. 유더는 검으로 다시 한 번 놈을 죽이고 로나를 보호하며 빠르게 거점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곧장 미칼린이 있는 곳으로 향해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어제의 유더는 로나가 하는 보고를 그저 한 발짝 뒤에서 듣고만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마법진과 마력의 샘 상태는 한없이 길게 설명하고 몬스터에 대해서는 그저 한 마디 정도만 덧붙인 그녀의 보고가 끝난 뒤 함께 나갔다가, 잠시 후 혼자서 몰래 다시 미칼린에게로 되돌아갔다.

바쁘게 책을 확인하던 미칼린이 그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흠? 뭔가 더 할 말이 있소?”

“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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