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277화 (277/805)
  • 277화

    “아일 님? 왜 그러시죠?”

    “아뇨. 잠시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해서 확인해 보았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소리요? 무슨 소리 말씀이신가요.”

    유더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던 숲 속 깊은 곳에서 시선을 뗀 후 로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오늘도 마력의 샘 유적지를 살피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함께 했던 다른 마법사 두 사람은 막바지에 이른 거점 보호진 재정비 작업을 우선시하겠다며 동행하지 않았지만, 로나는 혼자라도 상관없으니 마력의 샘과 주변 창고를 두른 마법진 제어지점을 꼭 살피고 싶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열정이었고, 증폭진을 다시 살피기로 한 유더의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열정과 공포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로나는 유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피는 순간마다 불안한 눈빛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유더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사람 목소리 같은 게 들린 듯해서 말입니다. 몬스터는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안심한 로나가 마도구를 꽉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대삼림의 울창한 숲은 소리를 흡수하지 않고 반사하는 성질이 있지요. 몬스터가 이상발생한 지 이틀이 지났으니 용기 있는 상단이나 용병들이 근처를 지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혹시 화전민들이 낸 소리를 들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여기에 화전민도 있습니까?”

    어제는 인신매매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오늘은 화전민이라니. 사라인 대삼림 내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묘한 정보가 이곳에 꽤 많은 듯했다.

    “가끔 있어요. 서부 쪽 국가들에서 탈출한 자들이 대삼림 내로 숨어들어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더군요. 아시겠지만 그쪽은 나라 간 정세가 어지러운 지 오래되었고 이곳에선 추적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으니까요.”

    가볍게 대답한 로나가 잠시 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대삼림의 힘은 평범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죠. 대개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유더는 이전 생에서 에제인 왕이 치세를 안정시키기 전까지 서부 국가들 간의 정세가 꽤 오래 어지러웠다는 정보를 떠올렸다. 에제인이 즉위한 후에도 듀번 같은 나라는 오랫동안 내부 정쟁으로 시끄러웠으니 죽음을 각오하고 대삼림으로 탈출해 살아가기를 택하는 이들이 생긴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렇군요. 이곳에 오기 전에는 대삼림 내에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꽤 있나 봅니다.”

    “저희처럼 줄곧 머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이지, 이상발생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멀리서 무역로를 지나는 용병과 상단들을 꽤 자주 볼 수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로나는 몇 달 전 이 길을 지나던 도중 멀리서 어렴풋이 본 화전민에 대해 말해주었다. 어린 소년의 손을 잡고 깊은 곳으로 향하는 평범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목격담이었다.

    “어쩌면 저희가 아직 모를 뿐, 대삼림 내에 누군가 진짜로 마을을 만들어 두었을지도 모르죠. 그런 소문도 있기는 했거든요. 물론 제가 그걸 믿는다는 건 아니에요. 저희조차 몇 년에 걸쳐 이 정도 규모의 거점을 만든 게 전부인데, 어떻게 마법도 못 쓰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때쯤 창고가 나타났기에 로나는 이야기를 멈추었다. 유더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창고 주변을 두른 마법진들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몬스터가 주변을 돌아다녔나 보네요. 땅에 보호진을 따라 끌린 자국이 보여요. 일단 중앙 제어진 쪽으로 가서 마정석들 위치를 바로잡기라도 해야겠네요.”

    중앙 제어진이 있는 곳은 어제와 거의 다를 바 없이 반쯤 부서진 채 방치된 상태였다. 로나는 진이 있는 바위와 나무, 땅에 엉망으로 흩어진 마정석의 위치를 다시 옮기다가, 혼자서는 빨리 끝낼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유더에게 도움을 청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이건 간단하니 금방 할 수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일단 마력의 샘 내부 증폭진과 연결된 이 제어진의 수복이 가장 시급해요. 제가 알려드리는 위치대로 재료를 옮겨서…….”

    유더는 로나가 시키는 대로 바람과 땅의 힘을 이용하여 마정석의 위치를 옮기고 다시 박아넣기를 반복했다. 혼자서 손으로 직접 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작업이 이루어지자 로나는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색을 얼핏 내보였다.

    “정말 잘 해주시네요. 점점 진이 제대로 다시 떠오르는 게 보이시지요?”

    “네, 보입니다.”

    유더는 눈앞에서 점점 진해져 가는 거대한 푸른 마법진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3개의 마법진을 교차하여 합친 듯한 모양이었는데, 로나는 그중 가장 위쪽에 있는 진이 증폭진이라고 말했다.

    마차 바퀴처럼 느리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증폭진의 문양은 유더가 어젯밤 꿈에서 본 그것과 의심의 여지 없이 닮아 있었다.

    ‘정말로 미칼린의 말이 맞았군.’

    마정석을 옮기는 동안 유더의 시선은 내내 증폭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문양을 모두 외울 만큼 쳐다본 뒤 여전히 작업에 여념이 없는 로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증폭진은 서부 연합에서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혹 다른 증폭진과는 뭐가 다른 겁니까?”

    “효율이 다르죠. 이건 증폭한 힘이 함부로 흩어지지 않도록 가두는 보호 효과가 있거든요. 마력의 샘 내부의 마력이 계속 증폭하다가 폭발하거나 새어나가면 안 되니까, 그걸 염두에 두고 우리가 직접 개발한 거예요.”

    로나의 시선이 증폭진으로 향했다.

    “정말 고생을 많이 했죠. 하지만 개발하고 나서 설치를 끝낸 뒤부터 곧장 샘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땐 모두 그 고생을 아까워하지 않게 됐어요. 물론 지금은 반파된 탓에 좀 상태가 안 좋지만… 어서 고쳐야죠.”

    그녀는 증폭진을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유더는 증폭진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부터 이전보다 더욱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몹시 껄끄러운 것을 앞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연구의 빠른 변화와 효율을 위해 증폭진에 가두는 보호의 힘을 더했다라……. 진의 설치가 완성된 순간과 비슷한 시기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게 정말이라면, 이 진이 도로 수복되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마력의 샘은 본래도 농도 짙은 마력이 고여 있던 장소였다.

    어제 로나의 말처럼 마력의 샘이 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게 사실이라면, 그 샘은 어쩌면 이 대삼림의 역사와 처음부터 함께해 온 곳일 수도 있었다.

    분명 옛날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던 삼림이 차츰차츰 영역을 넓혀 4개국의 국경을 잡아먹고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거대한 푸른 땅이 되기까지,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삼림이 점점 확장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각국의 역사서만 보아도 확실했다.

    베어도 베어도 없앨 수 없는 사라인 대삼림의 불가사의한 생명력과 이제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짙고 순수한 마력이 고인 최후의 장소. 둘 사이의 연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은 그동안 과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까?

    묻고 싶었지만 아직은 물을 수 없었다. 유더는 다시 마법진을 수복하기 시작한 로나를 몰래 날카롭게 살피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연관이 있다면 샘에 고인 마력을 억지로 더 증폭하고 가둔 일이 대삼림에도 영향을 미쳐 이곳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정말이라도 서부 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이 힘들게 개발해 설치해 둔 증폭진을 거두고 연구를 그만두려 할지는 의문이었다.

    “아일 님. 그쪽의 푸른 마정석을 이쪽으로 좀 옮겨주세요.”

    유더는 로나의 부탁에 반사적으로 힘을 움직이면서 생각을 멈추었다. 진을 수복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까워하지 않을 듯한 마법사의 열정적인 눈빛을 보아하니 유더가 하고 있는 생각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혹… 이 일은 언제까지 해야 마무리될까요.”

    “이제 거의 다 되어가네요. 전부 다 수복하는 건 어렵고, 저쪽 마정석들까지만 위치를 바로잡고 마력의 샘을 살피러 들어갈 거예요. 샘을 보러 오셨는데 계속 이것만 하셔서 지루하시죠? 아. 혹시 많이 힘드신가요?”

    “아뇨. 힘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진이 망가진 지 며칠이 되었는데 샘이 계속 괜찮을지 궁금해서 여쭸습니다.”

    “괜찮아요. 그간 증폭된 마력이 좀 퍼져나가기야 하겠지만 순수한 마력 상태에선 사람에게 해가 될 일이 없으니까요.”

    유더는 미소짓고 있는 로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번 살짝 돌려서 건드려 볼까.’

    “사람에게 해가 될 일이 없다면… 혹 다른 것들은 어떨까요.”

    “다른 것들요?”

    로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어떤… 아. 그 이상한 균열이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하지만 그건…….”

    “아뇨. 예를 들어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가 우연히 근처에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이 되어서 말입니다. 미칼린 님께서 그런 몬스터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던 생각이 났거든요.”

    유더의 말에 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몬스터가 있기는 하죠. 하지만 몹시 드물어요. 그 드문 성질을 지닌 몬스터가 여기까지 와서 퍼져나온 마력이나 마법진을 흡수하는 상상은 너무 비관적인데요.”

    비관적이라. 과연 그럴까?

    유더가 무어라 대답하려 했을 때, 갑자기 로나가 고개를 흠칫 돌렸다.

    “혹시 들으셨어요?”

    “예?”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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