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현재 에제인의 앞에 서 있는 부하의 수는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20여 명이 올 것이라던 말과는 딴판이었다. 에제인의 눈빛에 서린 경계심을 읽어낸 듯 부하들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 또한 순식간에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침묵이 흐른 뒤 긴장된 공기를 뚫고 부하 한 사람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너희를 책임져야 할 키반 경은 어디로 가고, 리스와 체이즈는 또 왜 안 보이는 건지 궁금하구나. 유능한 레인저인 그들이 이 일에 빠질 리 없을 텐데.”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저희는 줄곧 추적자와 몬스터를 수없이 상대해야만 했고…….”
“…….”
“하루빨리 전하를 모시러 와야만 하다 보니 사정상 뒤처지는 동료들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키반 경이나 리스, 체이즈 또한 그래서 저희들에게 전하를 부탁한 것입니다. 불안하신 마음은 이해하오나 무작정 저희를 의심하시는 건…….”
“…….”
“너무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만…….”
주절거리며 중얼대던 이가 점점 더 서늘해지는 에제인의 표정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해도 에제인이 납득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키시아르는 그의 손이 슬금슬금 허리춤의 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망토 안쪽에 가린 신검 오르의 손잡이를 살짝 매만졌다.
“젠장. 눈치 하나는 정말 더럽게 빠르군. 처리해!”
결국 사내가 검을 빼어 들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동료들 또한 무기를 들고 곧장 공격을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왕자님. 이쪽으로!”
키시아르는 에문이 에제인의 팔을 붙잡고 능력을 사용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뒤 곧바로 검을 뽑았다. 상대편이 이쪽보다 인원수가 더 많기는 했으나 몬스터보다 강한 이들은 아니었다.
“심문을 해야 하니 목숨은 남기고 제압하도록.”
“네!”
대답과 동시에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과 엘더 남매의 육체 변형 능력이 동시에 발동되었다. 순식간에 발생한 전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칸나는 뒤로 물러나 단검을 뽑아 들고 주변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살폈다.
“가, 각성자?”
“다 잔재주일 뿐이야! 위축되지 마라!”
그제야 이쪽의 정체를 깨달은 이들이 이를 악물고 항전하기 시작했지만 승패는 금세 명확해졌다. 키시아르가 힘을 쓸 필요도 없었다. 팔다리에 깊은 부상을 입고 제압된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자 남은 이들의 얼굴 위로 분노와 공포가 번졌다.
“……안 되겠어! 제길! 흩어져!”
기어이 항전하는 이가 세 명밖에 남지 않게 되자 개중 가장 큰 목소리로 다른 이들을 격려하던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다른 이들 또한 동시에 시선을 마주한 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이 그들 중 한 사람을 뒤쫓았지만, 그가 품에서 꺼내 던진 폭탄을 몸으로 막아내느라 그만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작은 펑 소리가 그림자 분신의 가슴 쪽에서 억눌린 듯 울려 퍼지며 쉬익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본래대로라면 불꽃과 함께 터지면서 쇳조각이 비산했을 충격을 모두 감내한 대신 가슴 부분에 구멍이 뻥 뚫린 채 스르르 사라진 그림자 분신을 보며 가케인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그만 놓쳤습니다.”
“괜찮다. 충분히 잘 해주었어. 일단 놓아두고 제압된 자들을 한곳에 모으도록.”
키시아르는 마병단원들을 가볍게 칭찬한 뒤 엘더 남매가 깔고 앉아 있는 부상자들에게로 다가갔다. 때마침 에문도 어둠 능력을 거두었는지 에제인 왕자가 창백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전부 처리하셨습니까?”
“아쉽지만 세 사람은 도망쳤습니다.”
“그렇군요.”
에제인이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신세를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요.”
키시아르는 미소와 함께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엘더 남매 또한 거대했던 몸을 원래대로 줄이고 단장을 따라 물러서자, 쓰러진 이들은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한 에제인의 싸늘한 눈빛만을 단독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당당했던 이들이 아픔에 신음하며 에제인의 시선을 피하는 꼴이 몹시도 우스웠다.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명을 들었을 뿐…….”
“너희가 명을 들어야 할 상대는 나였을 텐데, 누구의 명을 들었단 말인지 궁금하구나.”
“그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이들의 억울한 눈빛을 보며 에제인이 쓰게 웃었다. 그것은 상처받은 이의 태도라기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조소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그의 태도가 언뜻 무르게 느껴진 탓이었는지 쓰러진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꿈틀대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모, 모두 다 도망친 이들이 획책하여 저희를 꼬여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무언가에 쓰였던 모양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신지 알면서도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에제인의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용서를 비는 이들의 얼굴을 죽 돌아본 뒤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형제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우선 내 쪽도 덩치를 똑같이 키우는 게 우선이라 여겨 내 밑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은 모두 받아들였다. 차별 없이 믿음을 주면 언젠가는 답이 돌아올 줄로만 알았지. 그게 도량 넓은 왕의 그릇이 견뎌야 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 전하.”
“하지만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그건 진짜 믿음이 아니었어. 내 미련한 고집 때문에 오히려 정말로 지켜주어야 했을 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구나.”
에제인은 스스로 검을 뽑아 들었다.
“사라진 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라. 이제 너희가 내게 해줄 답은 그것뿐이니까.”
검날 위로 희미하게 푸른 오러의 조각이 어리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 위로 공포가 떠올랐다.
“단장님. 괜찮으시다면 도망친 이들의 흔적 쪽을 찾아보아 주시겠습니까? 이들은 제가 책임을 지고 처리하고 싶습니다.”
키시아르는 숨을 헐떡이는 배신자들과 검을 든 채 등을 돌린 에제인 왕자를 번갈아 살폈다. 이 제국을 빠져나가는 내내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았을 왕자의 등에서 이전보다 훨씬 단단한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그저 어둡게 흔들리는 혼란에 가까웠던 것이 드디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맺은 모양이었다.
키시아르는 그 단단한 뒷모습을 향하여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시오.”
키시아르의 손짓을 따라 에제인을 몰래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마병단원들 또한 모두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쪽에서 억눌린 신음소리와 피비린내가 서서히 산장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왕자님께서는 괜찮으실까요. 좋으신 분 같은데…….”
걱정이 담긴 에문의 혼잣말 같은 질문이 흐릿하게 퍼졌다. 키시아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미소를 흘렸다.
‘좋으신 분이라.’
며칠 동안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다른 이들에게 저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귀족이나 왕족이 흔치는 않을 것이다. 케일루사 황제가 에제인과 이야기를 나눈 뒤 그가 지닌 미약한 가능성에 손을 들어 돕기로 결정한 이유도 분명 거기에 있을 터였다.
여태까지의 에제인 왕자는 좋은 자질을 지녔음에도 스스로에게 확신을 지니지 못하여 운을 제대로 끌어오지 못한 사람이었다. 버려야 할 이들은 버리고, 믿어야 할 이들을 믿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다. 확신이 없이는 무작정 모든 것을 버리기만 하거나, 혹은 무턱대고 믿기만 하면서 나아가야 하는데 그 끝이 어찌 좋을 수 있을까.
키시아르는 에제인 왕자가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확신이 필요하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는 방금 전 그것을 갖기 위한 한 발자국을 드디어 스스로 내디딘 참이었다.
‘버리고 또 버리면서 나아갈 수는 없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을 끌어안기만 한 채로 살아갈 수도 없다는 뜻.’
전서조가 왔던 새벽에 냇가에서 잠시 나누었던 말을 그동안 깊이 생각해 준 듯하니 다행이었다.
‘에제인 왕자가 살아남아야만 그에게 받기로 했던 물건도 받을 수 있고, 미래 또한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넬라른의 다른 왕자들에 대한 소문은 그리 좋지 않았다. 평민들에게 고른 지지를 받고 있으며 제국과 손을 잡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과감성까지 갖춘 에제인 이상으로 제국과 키시아르에게 좋은 동반자는 없을 터였다. 키시아르는 부디 저 젊은 왕자가 오늘을 기반으로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다른 이가 가진 것을 쓸데없이 부러워하지도 않을 테니.’
이곳에 따라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더없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어두운 눈동자가 머릿속에 차오른 순간 키시아르는 저도 모르게 여태까지의 모든 정치적 계산을 잊고 말았다. 그가 잠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처절한 고함을 질렀다.
“죽어라!”
날카로운 살기와 함께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배신자 중 마지막 한 사람이 몸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마지막 공격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이 내지른 공격은 무디기 짝이 없었다. 본래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에제인은 직전에 몇 명이나 되는 이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느라 심신이 몹시 소모된 상황이었다.
빛이 번득이며 비명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