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습성. 가장 먼저 발견되었던 장소. 그리고 서부 연합의 증폭마법진…….’
몇 개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았다.
유더는 암살자들을 옆 건물 지하에 가두고 나오는 동안 이전 생과 이번 생의 서부 토벌 임무 도중 달라진 부분들을, 그리고 오늘 새로 알게 된 정보들을 번갈아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전 생에서 페투아멧이 나타난 건 지금보다 더 뒤다. 제국 서부 국경 안쪽까지 큰 피해를 입던 도중이었으니 그때 이곳 거점에 머물던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은 이미 죽은 뒤였겠지.’
시간순으로 따지자면 서부 연합 마법사들이 죽고 거점이 무너진 뒤 시간이 지나 페투아멧이 나타난 것이다. 만약 마법사들이 이상 발생한 몬스터들의 습격 때문에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죽었다면, 그들이 진행하던 연구대상인 마력의 샘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작 하루 정도 공격을 받은 지금만 해도 그렇게 많이 파괴된 상태였는데 제대로 수복하지 못한 채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에서 계속 방치되었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일주일은 고사하고 단 하루만 방치해도 인간이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쑥쑥 자라나는 곳이 바로 이 사라인 대삼림이다. 서부 연합 마법사들이 마법의 힘을 이용하여 억지로 그 힘을 억눌러 건물을 세우고 길을 뚫었다지만 마법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시전자와 제어자를 잃은 모든 공간이 곧 울창한 삼림으로 되돌아갔을 것임은 여지없이 분명했다. 다른 도시에 남아 있던 연합 마법사들이 있기야 했겠지만 서부 전체가 몬스터 때문에 무너지던 상황에서 여기까지 찾아올 용기를 낼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설령 어떻게든 왔다 해도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확률이 컸다.
그들을 도울 유일한 존재인 진주탑 또한 마력의 샘 연구와 관련하여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누구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도와줄 의지를 갖지 않았을 테고 어설프게 증폭된 샘은 관리하는 이 없이 줄곧 방치되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이 디딜 수 없는 곳이라 하여 몬스터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마력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몬스터들이 우연히도 이 거점과 폐허가 된 마력의 샘 근처에 나타나 무너진 마법진의 흔적들이나, 혹은 샘에서 흘러나오던 농축된 마력을 흡수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효과를 발휘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
페투아멧의 혓바닥에 남아 있던 마법진은 증폭진이었다.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계속해서 더욱 커지고 부풀어 오르던 몬스터의 기이한 힘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게 아니라, 흡수한 증폭진의 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놀랄 만큼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지나친 상상이야.’
아직까지는 그저 가정일 뿐이다. 이번 생에서는 아직 일어나지조차 않은 일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이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유더는 마력의 샘을 둘러싼 나무와 땅, 바위에 마법진을 그리고 유지하기 위해 수도 없이 박혀 있던 마정석들과 온갖 매개체용 재료들을 떠올렸다. 문득 등줄기에 싸한 바람이 불었다.
‘아쉽군. 이전 생에서 페투아멧의 잘린 혀를 좀 더 자세히 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의 유더는 그것이 마법진을 닮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키시아르를 향하여 뛰어가느라 금세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난 후 페투아멧의 시체를 회수했을 때는 그 빛나던 푸른빛을 이미 찾아볼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유더는 여기저기 파괴된 서부 마법사 연합의 거점 건물들을 돌아보았다.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에 대해 처음 알았던 때에는 그저 이전 생에 불운하게 일찍 죽었던 이들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생각보다 더 많은 일들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되자 모든 것이 색다르게 보였다.
이전 생의 마병단과 유더, 그리고 키시아르 모두 자신들이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모른 채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기에 바빴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들이 문득 시야 위로 겹쳐지자 입안이 몹시 씁쓸해졌다.
‘왜 계속해서 이런 꿈들을 꾸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단순한 꿈일 리는 없겠지.’
붉은 돌이 발산하던 힘에 꿰뚫린 이후 유더의 몸과 힘은 이전에 없던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꿈이 처음 시작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꿈은 몸이 아닌 그 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변화를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사람에게는 육신 외에도 정신이 있다. 사제들은 그것을 혼이라고도 말했다. 비록 혼의 존재를 보거나 증명한 이는 없다지만, 죽고 나서 11년 전으로 되돌아온 유더 아일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유지하고 있다는 걸 설명하기에는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도 없었다.
붉은 돌의 힘이 파고들며 시작된 변화가 육신과 혼, 둘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끝은 대체 어디로 향할까. 육신과 달리 혼은 무엇이 어떻게 변하고 본래 상태가 어떠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차피 시작된 일이었다. 몇 번을 다시 되돌아간다 해도 유더는 붉은 돌의 힘이 발산되던 순간 자신보다 다른 이들에게 조금 먼저 보호의 힘을 둘렀던 그 선택을 번복하지 않을 터였다. 일어난 일은 어차피 일어난 일이며, 죽고 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 했던 그의 결심에는 아직 변함이 없었다.
일어날 재앙의 반복을 막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과거와 반복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은 몹시 잘 되어가는 중이라 할 만했다. 유더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쥐었다.
‘다른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증폭진과 주변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
“곧 약속했던 장소가 나타날 듯합니다.”
키시아르는 먼 하늘을 바라보다 보고하는 가케인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밤을 새워 꼬박 이동한 덕에 곧 에제인과 그의 사람들이 만나기로 한 대삼림 내의 무역로에 도달한 상태였다. 비록 최근 일어난 몬스터 대량 발생 사건 때문인지 이곳까지 오는 내내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행의 사기는 단숨에 고무되었다.
약속 장소에 가까워지자 내내 침묵을 지키던 에제인 왕자가 입을 열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저 나뭇가지에 달린 깃발의 색을 보면 방향은 확실히 맞는 듯하군요. 상인들이나 용병들이 쉬어가는 작은 산장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저를 데리러 온 이들은 그곳에 있습니다.”
“저쪽에 나무로 만든 집이 보여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장을 발견한 엘더 남매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키시아르는 손을 들어 일행을 잠시 멈추게 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의 감은 어딘지 모르게 이 지나친 고요함을 어색하게 느꼈다.
오는 동안 몇 번인가 마주친 몬스터들이 나타났던 때와는 달랐다. 모자 속에 감춘 서늘한 시선이 주변을 한 번 훑은 뒤 유독 표정이 굳어 있는 에제인에게서 멈추었다.
“유난히 비린내가 진한 곳이군요.”
“…….”
“이곳에서 만날 이들의 인원수가 총 얼마나 된다고 하셨었지요.”
“20여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니 확인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가케인. 정탐하도록.”
“네.”
“그리고 에문. 자네의 임무는 이제부터 시작이나 마찬가지임을 명심하도록.”
“네, 넵.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왕자님.”
검은 그림자가 몸을 일으켜 산장을 향하여 소리 없이 달려가는 동안 에문 필랑은 언제든지 어둠 속에 왕자를 숨길 수 있도록 에제인의 곁에 달라붙어 능력을 쓸 준비를 했다.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이 막 산장에 다다라 문을 연 순간, 안에서 날카로운 화살들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다가가 문을 열었다면 분명 크게 다쳤을 터였다.
키시아르는 그림자 분신을 허망하게 통과하여 엉뚱한 곳에 박힌 화살들을 보며 작게 웃었다. 잠시 후 열린 문 안쪽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잖아. 누가 문을 열었지?”
그러나 의아함도 잠시, 멀리 서 있던 마병단원들과 에제인 왕자를 발견한 이들의 눈빛이 변하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니, 전하!”
“모디, 클레인. 오랜만에 너희들을 이곳에서 다시 보니 반갑군. 설마 여기까지 온 이들 중 너희가 끼어 있었을 줄이야. 잔과 빌렌틴도 왔군.”
“전하를 모시는 일에 저희의 목숨이 아깝겠습니까? 그런데 왜 약속했던 대로 먼저 다른 시종들을 보내시지 않고 전하께서 홀로 이리 오신 것입니까? 저희는 몬스터나 침입자인 줄 알고 그만 공격해 버렸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어쩔 줄 모르고 사죄하는 이들 사이에서 의심의 시선이 마병단원들에게로 흘긋흘긋 향했다.
“한데 전하……. 함께 있는 저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에제인의 부하들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용병처럼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몹시 날카로웠다. 한눈에 보아도 모두 실력이 출중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시선은 기다리던 왕자를 만나 반가워하는 표정 속에 숨어있는 불순한 눈빛들을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그 외에도 수상한 부분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모든 마병단원들과 에제인 왕자도 이미 키시아르가 눈치챈 이상한 부분을 알아차린 듯 긴장된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다른 시종들은 곧 따라올 것이다. 이분들은 나를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신 은인들이니 절대 함부로 대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그러면 모두 우선 들어오시지요. 이 험한 곳을 거쳐오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예?”
에제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부하들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본래 오기로 되어 있던 다른 이들은 어디 가고 너희들밖에 없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