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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74화 (274/805)

274화

아침이 된 뒤, 서부 마법사 연합 내에는 소소한 난리가 벌어졌다.

간밤에 거점 내부로 다섯 명의 밤손님이 들어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유더에게 보고받고 몹시 놀랐던 수장 미칼린은, 이후 피투성이가 되어 생선처럼 꽁꽁 묶인 그들의 모습을 본 뒤 말을 잃었다.

“……혹시 이미 죽은 건 아니겠지?”

“안 죽었습니다. 기절한 상태일 뿐입니다.”

“하지만 피가 저렇게 많이 나지 않았소.”

“이 정도 출혈로는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칼린은 단신으로 밤손님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유더의 얼굴을 새삼 다시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린 나이에 비해 만만치 않은 성격을 지닌 듯하다 느끼기는 했으나, 그간 묵묵히 휘하 마법사들을 돕는 일에만 집중하기에 기본적으로는 얌전하고 착한 청년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제 손으로 반죽음을 만든 이들을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저 건조한 얼굴은 대체 무엇인가. 오랫동안 온갖 일을 겪으며 어지간한 것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자신했던 미칼린조차도 유더의 무감정해 보이는 모습 앞에서는 일순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저들을 가둘 곳을 찾아달란 말이오?”

“네. 서부 연합 마법사분들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 부탁드리기 죄송하지만, 당장 죽일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일행들이 돌아온 뒤 곧바로 처분을 결정할 테니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두어 둔 동안의 감시 또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유더는 저 침입자들이 자신의 일행들이 수행 중인 임무를 방해하려고 고용된 자들이라 설명했다. 마법사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 잠시만 가둘 곳을 제공해 달라는 설명을 하는 그의 모습은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듯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옆 건물을 이용하면 될 거요. 반파되기는 했지만 지하실은 아직 남아 있으니……. 본래 시약 재료들을 보관하던 곳이라 튼튼하고, 잠금장치도 잘 되어 있소.”

“적절하군요.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부탁해도 되겠소? 이제야 막 정리가 조금 끝나가는 중인데 이 일로 분위기가 다시 어지러워지면 곤란하니…….”

“네. 물론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그 뒤 곧장 이동할 줄 알았던 유더는 기절한 다섯 사람 앞에 선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까는 모습을 보며 미칼린은 의아하게 물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소?”

“혹시… 수장님께 마법진과 관련된 부분을 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마법진?”

대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각성자 청년이 마법진에 대해 묻다니. 미칼린은 간만에 순수한 호기심을 느끼며 ‘말해 보시오.’ 하고 대답했다.

“이런 모양의 마법진 일부를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만, 혹 짐작 가는 부분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미칼린은 유더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익숙한 고어와 마법 시동어 일부가 그려진 모양은 서툴기는 해도 정체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우리 서부 연합에서 개발한 증폭진이군.”

“서부 연합의 증폭진…….”

미칼린의 말을 반복하듯 중얼거린 유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확실합니까?”

“여기 이 글자는 우리 연합 소속들이 가지는 일정한 마력 흐름의 시작을 뜻하지. 그리고 이 부분은 핵심이 되는 증폭 마법의 중심 시동어요. 여러 번 반복해서 적어야 하는 글자인데 그 진의 개발에 참여한 내가 일부분이라 할지언정 못 알아볼 리 없지 않겠소?”

“…….”

“그런데 이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요? 어제 로나와 함께 유적지에 갔을 때도 보았을 텐데?”

유더는 미칼린이 짚어준 글자들을 내려다보다 느릿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꿈에 나와서 여쭤보았습니다만, 말씀대로 아마… 그때 본 게 머리에 남은 모양입니다.”

“꿈? 허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름이 돋았던 청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약간 인간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칼린은 웃음을 터트리며 거칠게 자란 잿빛 수염을 매만졌다.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잘 그렸소. 이 고어들은 외우고 그리기가 몹시 어려워서 익히고 배우는 데에도 한참 걸리거든. 한 번 봤을 텐데도 이만큼 기억할 정도라면 유적지 방문이 대단히 인상적인 경험이었던 모양이오.”

“……예. 인상적이었지요.”

유더는 종이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런데…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혹 이런 마법진을 몬스터의 몸에 남길 수도 있겠습니까?”

다소 묘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 중에는 정말로 그런 짓을 하는 자들도 있었기에 미칼린은 크게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몬스터의 몸에 마법진을? 흠. 연구 목적이라면 가능은 할 거요. 하지만 너무 번거로워. 나라면 몬스터에게 마법을 걸기 위해 놈들의 몸에 직접 진을 그리느니 그냥 이미 만들어둔 마법진 위에 올라가게 만들거나, 아니면 애초에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을 지닌 몬스터를 찾아 이용하겠소. 그쪽이 훨씬 빠르니까.”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을 지닌 몬스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놈들이 마법진을 흡수하기도 합니까?”

“이미 마력으로 빚어 발생한 마법 자체도 흡수하는 놈들이 똑같은 구조를 지닌 마법진이라고 흡수하지 못할 건 없지 않겠소? 물론 내가 시도해본 건 아니지만 안개질풍마를 만들었던 450년 전의 진주탑 마법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미칼린은 열심히 과거의 기록을 인용하여 설명해 주었으나 유더는 그 이상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열띤 설명이 끝난 뒤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기절한 암살자들을 바람의 힘으로 감싸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미칼린이 일찍 깨어나 있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암살자들의 처분과 궁금했던 점을 동시에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저 꿈속의 마법진이 정말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어 물어보았던 것뿐인데, 돌아온 답은 예상외로 충격적이었다.

‘평범한 마법진이 아니라 정확하게 서부 연합에서 만들어 낸 증폭진의 일부란 말이지…….’

과연 꿈속에서 그 진을 본 게 정말 우연일까? 단순히 기억에 남아 꿈속에 나타난 것이라고 넘기기에는 예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그것 이외에도 꿈에서 다시 되새긴 정보가 한둘이 아니기는 했다.

페투아멧이 사라인 대삼림 쪽에서 처음 목격되었다던 정보, 그리고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키시아르의 능력까지도.

일그러진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던 꿈속의 키시아르를 생각한 순간 뱃속이 또다시 크게 울렁거렸다. 기억을 밀어내기 위해 노력해도 자꾸만 여태까지 꾸었던 꿈과 어젯밤의 꿈이 뒤섞여 머릿속에서 물레처럼 제멋대로 생각의 실을 자아냈다.

붉은 돌 회수를 진행하다 그릇이 부서졌다고 중얼거리며 쓰게 웃던 꿈속의 키시아르가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해 보자. 솔직히 말해 제 기억에만 없을 뿐, 그 일이 정말이라고 가정하면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보였던 알 수 없던 묘한 태도의 대부분이 대충 납득된다는 점은 여태까지 여러 번 꿈을 꾸며 이미 깨달은 바 있었다.

아무튼 그 일이 정말이라면 어젯밤 꿈속의 서부 토벌전 시점에서 키시아르의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는 목숨이 위험한 전장임을 알면서도 신검을 들고 오지 않았고, 검술도, 마법도, 신력도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 생의 키시아르라면 힘을 숨기고 있기는 하나 꼭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안 쓰는 일은 없었으니 절대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면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페투아멧을 죽였을까?

물론 그때 그가 나서준 덕분에 유더를 비롯한 마병단원들은 모두 멀쩡히 살아남았지만, 키시아르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남지 않았다. 그는 이후 직접 토벌에 나서지 않게 되었고 이전보다 더 악의적인 소문에 휩싸이기 시작했으므로.

과거의 유더는 그가 왜 그랬을지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물어보았자 답해주지도 않을 테고 무언가 필요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했으리라 짐작하고 잊었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키시아르가 그때 보인 힘은 자해나 마찬가지였다는 결론만 나올 뿐,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자해.’

유더는 제가 떠올린 단어를 되뇌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전 생의 그였다면 그 말만큼 키시아르와 어울리지 않는 말은 없으리라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서부에 오기 직전, 스스로 팔을 찢고서 시치미를 뚝 떼고 제 앞에 나타났던 새하얀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는 다소 이성적이지 않은 이유로 스스로를 해하는 선택을 충분히 할 수도 있는 남자다.

‘다소 이성적이지 않은 이유로…….’

물러나라고 말하자마자 싸늘한 분노를 뿜어내던 꿈속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건 확실히 이성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기에 유더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추측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에게는 미칼린에게 들은 다른 정보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유더는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에 대해 제가 아는 정보를 몇 가지 점검해 보았다.

‘기억나는 몬스터 중에는 서부 토벌전에서 마주친 놈이 없었던 것 같아. 그렇다면 이전 생에 마주쳤던 페투아멧의 무리들은 어땠었지.’

페투아멧을 그대로 줄여둔 듯 꼭 닮았던 놈의 무리들은 몰려다니는 게 번거로웠을 뿐 상대하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서부에는 놈들을 상대할 만한 마법사들이 많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은 마병단원들과 기사들이 상대하여 일찍 처리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때 마법사들이 나선 적이 거의 없으니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몬스터였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안 나. 처리했던 몬스터가 한둘이 아닌데 이런 걸 다시 떠올리려니 어렵군.’

하지만 이마를 문지르며 계속해서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한 결과, 하나는 더 기억이 났다. 메뚜기 떼처럼 몰려다니며 주변의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거나 먹어치우던 페투아멧 무리 때문에 농작물 피해가 제법 컸다는 보고를 받았던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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