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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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가 눈을 뜬 것은 목을 노리는 차가운 예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고 있던 와중 갑작스레 현실로 불려 나온 탓에 머리가 어질거렸으나 유더는 소리 없이 어둠 속을 살폈다. 루산 사제일 리는 없는 검은 그림자가 침대 곁에 선 채 그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누구냐.”
잠긴 목소리로 낮게 묻자마자 검이 조금 더 가까이 그의 목으로 다가왔다.
“왕자는 어디 있지?”
일부러 약을 먹고 변조한 거친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
유더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 속이기는 해도 정신을 집중하니 기척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다섯 명. 각성자…는 없는 것 같고. 목소리까지 변조한 걸 보면 전문 암살자인가.’
“대답해라. 왕자는 어디 있지?”
“암살자인가?”
유더는 조용히 반문했다. 그러자 복면을 쓴 암살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질문을 하는 건 나지 네놈이 아니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 왕자는 어디 있나?”
유더는 대답 대신 힘을 발휘했다. 암살자가 들고 있던 검날이 위로 불쑥 꺾여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불꽃 여러 개가 산발적으로 주변을 밝혔다. 갑작스레 눈을 찌르는 불빛에 당황한 암살자들이 숨을 삼킨 한순간, 유더는 벌떡 일어나 몸 옆에 두었던 검을 뽑아 들면서 반대로 상대를 붙잡아 목을 틀어쥐었다.
암살자들 또한 반사적으로 암기를 던졌으나 그들이 던진 암기는 순식간에 방향을 돌려 유더가 아니라 동료와 스스로의 몸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자 억눌린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으, 으으윽!”
“그러면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는 거겠지?”
유더는 검날을 암살자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댄 채 작게 미소를 지었다. 검날에 반사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더욱 파리하고 무시무시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을 믿을 수 없었던 암살자들이 여기저기서 바닥을 구르며 숨을 헐떡였다.
“대… 대체 어떻게.”
“왜 나를 노렸지?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똑바로 대답해.”
전혀 강해 보이지 않았던 젊은 청년 한 명에게 순식간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제압당한 암살자들은 상대의 실력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곧장 자결을 시도하려 했다. 전문 암살자다운 판단이었으나 유더는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어딜.”
“우웁!”
숨겨둔 독을 꺼내기도 전에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거대한 물방울에 머리를 집어삼켜진 암살자들이 꿀럭거리며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 틈을 타 파고든 물이 유더의 수족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복면 틈새를 타고 입 안에 숨겨둔 독을 빼내버리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숨이 막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이 거의 흐려진 뒤에야 겨우 물이 사라졌고, 암살자들은 몇 번이나 물이 섞인 기침을 토해내다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어느새 무기를 모두 빼앗긴 채 손발이 묶여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헉… 허억……. 헉…!”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으나 머리와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방금 전 일어난 일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암살자들의 멍청해진 표정을 보며 유더는 무표정하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그 위로 다시 일렁이며 나타난 물은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자… 다시 묻는다. 귀찮게 만들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보다 더한 게 뭔지 알려줄 테니까.”
그리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일어난 탓에 평소보다 두 배는 어두워진 눈동자가 보는 이의 본능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이토록 엄청난 일을 하면서도 눈앞의 존재에게는 이 상황이 숨 하나 헐떡일 만큼의 놀라움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암살자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눈치를 보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대… 대답하겠다. 그러니까…….”
“대답은 존댓말로.”
“……대답하겠습니다.”
유더가 그들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모두 듣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목표물에게 향을 묻혀 쫓아갈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이었다. 향은 에제인 왕자의 죽은 시종의 힘을 빌어 그의 소지품에 묻혔고, 본래는 열 명이었으나 갑작스레 발생한 몬스터와 마주친 탓에 다섯 명이 중간에 사망하고 말았다고 했다.
남은 다섯은 계속해서 에제인을 뒤쫓아오다 이곳에 이르렀는데, 거점 밖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느다란 향과 거점에 남아 있는 향 사이에서 무엇을 먼저 쫓아야 할지 고민하다 인원을 더 나누지 않는 쪽이 생존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여 거점에 숨어 있을지 모를 에제인을 먼저 찾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거점에 있던 모든 사람 중 가장 강하게 에제인의 향이 묻어 있던 유더를 특정하여 그가 잠드는 때를 노려 방에 침입했다.
시종의 시체를 확인한 후부터 에제인 왕자가 이미 향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들을 농락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움직이느라 신중을 기한 게 오히려 그들에게 불행을 더한 셈이었다.
“…향이 내게 묻어 있었던 건 마지막에 왕자와 악수를 하면서 장갑에 묻어났기 때문인가? 자주 붙어 다니기도 했으니 그때 묻었을지도 모르겠군.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그들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추측을 해 보았으나 유더의 앞에 기절해 누운 암살자들은 답을 알려주지 못했다. 유더는 익숙한 태도로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더욱 튼튼히 묶은 뒤 침대 밑과 옷장 속에 나누어 감금했다.
‘여기 있는 다른 이들이 피해를 입기 전 내게 먼저 찾아와서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실 그 암살자들이 위험한 대삼림 속에서 이상 발생한 몬스터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거점에 몇 명을 남겨둔 채 다시 에제인을 뒤쫓아 키시아르 일행이 나아간 곳으로 향했으리라. 여기저기 큰 피해를 입힌 몬스터 이상 발생이 일으킨 유일하게 괜찮은 일인 듯했다.
모든 일을 끝내고 나서 방 안을 둘러보니 더 이상 이곳에서 잘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유더는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거점 내부는 모두가 잠든 탓에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암살자들이 이곳에 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러 시종의 시체를 확인한 곳은 우리가 하룻밤을 머물렀던 안전가옥이겠지. 그곳에서 접전을 벌였다는 자들은 펠레타 기사단일 테고…….’
그렇다면 아마 키시아르 일행의 뒤를 따르고 있는 나단 주커만과 펠레타 기사단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그들 또한 대삼림으로 들어왔을 텐데, 시종을 두 명이나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과연 제대로 된 이동이 가능했을지 의문이었다.
‘이상발생한 몬스터들과 마주치지는 않았을지 조금 걱정이군.’
그래도 소드마스터인 나단 주커만이 있는 한 엄청난 피해는 없었겠지만 유더는 그들이 가능하면 이쪽 방향으로 찾아와 주기를 바랐다.
‘내가 나가서 찾아볼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다. 깊은 충동을 억누르며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결론은 한곳으로 모였다. 유더는 한숨을 내쉬고는 주머니 속의 사탕 두 개를 쥐었다가 하나를 끄집어냈다. 다시 하나를 입에 넣고 굴리는 동안 단맛 때문인지 차갑게 일어섰던 신경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동시에 머릿속에 파고든 것은 깨어나기 직전 꾸었던 꿈의 일부였다.
‘페투아멧 토벌 전투… 때였지, 아마.’
일어나자마자 험한 일을 처리한 탓에 벌써 반쯤 희미해진 기분이기는 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서부 토벌전 때 마주친 가장 거대했던 몬스터, 그리고 그것을 처리하던 키시아르의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그는 어둠 속을 더듬어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페투아멧이라 이름이 붙은 그 몬스터는 저와 똑같이 닮았으나 크기는 훨씬 작고 약한 무리들을 다수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닮은 몬스터끼리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특별히 거대한 개체가 다른 개체들과 함께 다니는 모습이 목격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작은 놈들은 그래도 금방 처리할 수 있었지만 페투아멧은 공격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부풀어 오르며 강해진 덕분에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가 꿈에서 본 건 바로 며칠간의 공방 끝에 산을 무너뜨리며 만든 덫까지 실패하고 나서 키시아르가 직접 나섰던 날이었다.
그는 그동안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각성자로서의 힘을 발휘하여 페투아멧을 죽였다. 그가 그 재앙 같은 몬스터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페투아멧의 약점이 혀를 비롯하여 연약한 내장의 일정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이후에도 토벌이 끝날 때까지 많은 몬스터들이 나타났지만 페투아멧과 같은 놈은 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놈을 처리한 키시아르 또한 그 이상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다.
‘그때 내가… 절벽에서 추락하던 키시아르를 바람의 힘으로 감싸고 속도를 줄여 안전하게 착지시킨 건 기억이 나.’
힘을 지나치게 사용한 탓에 잠시 기절했었으나 착지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난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말했다.
왜 말한 대로 물러나지 않았지? 쓸데없는 짓을 하다 죽을 수도 있었어.
일어나자마자 그가 내뱉었던 말이 아주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제법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오래된 일이라 묻혀 있던 기억이 이리 잘 떠오르는 걸 보니 꿈을 통해 받은 자극이 크기는 큰 모양이었다.
유더는 절로 불쾌해지는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미간을 손으로 누르며 다른 방향의 기억을 떠올리기로 했다. 이를테면…….
‘페투아멧의 혀.’
꿈에서 잠시 스쳐간 잘린 혀와 그 위에서 깜박대던 푸른빛이 그리고 있던 어떤 문양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꿈을 꾸던 도중에는 그저 어디서 본 듯하다고만 느꼈을 뿐 정체를 알 수 없었는데, 다시 기억해내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알 수 있었다.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은은한 흰 빛으로, 혹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는 마법진들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서부 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이 열심히 복구해 둔 그 마법진들과 꿈속에서 본 페투아멧의 잘린 혀 위에서 깜박이던 문양은 그저 기분 탓이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꿈에서도 마법진처럼 생겼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정말 이전 생의 온전한 기억인지 아니면 꿈이라서 뭔가 뒤섞여 그런 걸 봤다고 생각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어.’
마법진을 잘 알지는 못해도 그것을 그리는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사용할 마법에 따라 그리는 문양과 고대어의 종류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만은 알았다. 유더는 꿈속에서 본 잘린 혀 위에서 깜박이던 문양들을 발끝으로 땅 위에 대충 그려보았다.
‘날이 밝으면 붙잡아 둔 암살자들을 처리하고 이 문양에 대해서도 다른 마법사들에게 물어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