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아일 님, 오셨네요. 어제 드린 말씀은 생각해 보셨나요?”
“네.”
깨져버린 방어진을 새로 구축하느라 정신이 없는 마법사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더를 맞이한 로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오늘 함께 가서 유적지와 다른 곳들을 보시겠어요? 아니면 일행분들이 모두 돌아오신 뒤에 가실 건가요.”
“괜찮으시다면 오늘 가고 싶습니다.”
고민할 여지도 없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유더의 답을 들은 로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수긍하며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역시 그러실 것 같았어요. 그러면 따라오세요.”
어제 유더가 하루 종일 마법사들을 도와준 덕에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유적지에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갑자기 반발하는 이가 나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로나는 다른 이들이 가장 바쁜 시간을 틈타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가야 하는데, 다들 마을에서부터 함께 온 사람들이니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 말대로 반쯤 무너진 건물 뒤쪽에 낯이 익은 두 명의 마법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로나가 같이 갈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는 혹시나 했었는데 정말 오셨군요. 어제는 푹 쉬셨는지…….”
“예. 덕분에.”
오는 내내 마병단의 힘을 충분히 겪은 마법사들은 크게 드러내놓고 기뻐하지는 않아도 유더의 합류에 안심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들은 이내 무너진 건물 뒤쪽으로 나 있는 폭이 좁은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길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닌 사람이 나무를 베고 땅을 다져내어 만든 길이었다.
“어제 그렇게 많은 방어진이 부서졌는데도 이 길을 보호하는 진들은 아직 상당수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물론 어제처럼 몬스터가 이상발생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크게 소용은 없겠지만요.”
손에 공격용 마도구를 쥔 로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늘은 정확히 어느 곳들을 들러보실 예정이셨던 겁니까.”
“다섯 개의 창고와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한 대방어진 및 증폭진 제어지점, 그리고 마력의 샘 유적…… 대충 이 정도예요.”
“꽤 많군요. 오늘 내로 모두 확인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움직여야죠. 몬스터들 때문에 아마 그쪽 마법진들도 꽤 많이 부서졌을 것이라 예상 중이라서 피해규모를 빨리 확인해야만 해요.”
조금만 방치해도 곧장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자라나는 대삼림의 나무들을 감내하고 그리 많은 시설을 만들어 두었다는 데에서 마법사들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었다. 유더는 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주변 지형을 빠짐없이 낱낱이 훑어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고저의 변화가 몹시 심한 곳이군. 나무에 가려 잘 안 보이지만 조금만 헛디디면 굴러떨어질 것 같은 낭떠러지도 꽤 많아 보이고.’
“길이 좀 험하지요?”
유더가 두리번대는 이유를 무어라 짐작했는지 다른 마법사 한 사람이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을 터 둔 건 지름길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뇨. 이 근처의 평탄한 길은 대개 무역로로 이용되는 중이라 타인 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죠. 단시간 왕복하는 무역상들이나 용병들이라면 모를까, 저희는 장기간 머물고 있다 보니 이용료 내기가 더러워서 그냥 길을 새로 뚫은 겁니다.”
대답한 마법사가 몹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힘들어도 마음이 편한 게 최고잖아요. 아마 저희 지부 마법사들이 전 대륙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튼튼할 거예요.”
평탄한 길을 이용하려면 타인 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뜻은 곧 그들이 그만큼 대삼림 내에서 이루어지는 육로 무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잘 닦아둔 무역로를 다른 이들에게 제공하고 일정 수수료를 받는 일로 떼돈을 버는 이들이야 그들 외에도 많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타인 가를 도와 서부의 몬스터 대량 발생 시기마다 힘을 써준 마법사들에게마저 그리 인색하게 굴었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인색하다고 내내 치를 떨더니, 과연……. 왜 그리 사이가 안 좋았는지 알 만하군.’
“타인 가 놈들. 이번에는 또 무슨 사업을 새로 시작하려 하는지 몇 달 내내 길을 극도로 통제하고는 무역 거점을 새로 만든다, 만다 하며 시끄럽게 굴더니 이번 일로 그 꼴은 안 보여서 참 다행이죠.”
“맞아. 정상적인 물건이 아니라 뭔가 위험한 걸 사고팔려고 그 난리를 부리는 게 아니느냐는 말도 많았었지. 몬스터 이상 발생으로 그놈들이 물을 많이 먹었을 테니 그거 하난 꼴좋네.”
타인 가와 서부 연합 마법사들 사이의 오래된 은원 관계에 대해 생각하던 유더는 문득 쉽게 흘려 넘길 수 없는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위험한 물건이라면… 어떤 물건 말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유더가 진지하게 반응하자 마법사들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는 이내 각자 들은 소문을 털어놓았다.
“음. 뭐, 확실하지는 않아요. 소문에는 귀족들이 자주 쓰는 비싼 약의 원료를 밀수입할 경로를 뚫는 거란 말도 있었고, 또 뭐였더라.”
“인신매매.”
“아, 그래. 남부의 큰 도시들에서는 요즘 무작위로 상대를 붙여 싸우게 만드는 불법 내기 격투장이 유행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내보낼 이들이 모자라 다른 나라에서 데려온다는 말이 있었죠. 그게 엄청난 돈이 된다더군요. 그래서 타인 가도 거기 뛰어들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유더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마법사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인신매매?’
이전 생에 그런 사건이 있기는 했다. 카치안 황제가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 방탕한 귀족들 사이에서 불법 격투장 관람이 인기를 끌자 인신매매를 비롯한 온갖 범죄가 정도를 모르고 기승을 부렸다. 결국 유더는 마병단을 이끌고 단장으로서 그들을 진압해야 했다. 많은 귀족가들이 그 일에 연루되어 재산을 몰수당했고, 카치안 황제는 덕분에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보다 더 이후의 일이었어. 그때 조사했던 바로 타인 가는 거기에 연루되지 않았었는데.’
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이라면 무서운 일이겠지만… 평범한 사람을 데리고 대삼림을 통해 이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게 믿기지 않는 소문이군요.”
“그럴 만하죠. 저희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년쯤 전부터 삼림 내에서 아주 평범해 보이는 낯선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상인, 용병들 사이의 소문이 꽤 많았거든요.”
“우리 연합 마법사들 중에도 봤다는 사람이 있기는 해요. 너무 말도 안 되어서 곧장 귀신 같은 헛것을 본 거라고 치부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마법사들의 말에 유더의 머릿속이 일순 복잡해졌다.
‘균열이 아니라 사람이라…….’
거점이나 유적 근처에서 거의 머무는 마법사들 뿐만이 아니고 대삼림 전체를 돌아다니는 상인이나 용병들이 주로 목격한 게 사실이라면 그건 정말로 헛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정말 이 시기의 타인 가는 해서는 안 될 범죄적인 무역에 손을 댔거나, 혹은 댈 의향이 있었다는 뜻일까?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저기, 첫 번째 창고가 보인다.”
생각이 끝나기 전, 앞서 길잡이 노릇을 하던 로나가 몸을 돌려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숲 속에 불쑥 솟아난 창고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마법사들은 흥미 위주의 소문을 금세 접고 재빨리 그곳으로 다가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후우, 여기까진 놈들이 안 온 모양이야. 멀쩡한데.”
“방어진도 깨진 곳 하나 없어.”
“좋아. 그러면 다음 창고로 가자.”
마력의 샘 유적을 중심으로 마법진과 함께 원형으로 배치했다는 창고는 다행히도 대부분 손실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대로 기분 좋게 마법진을 제어할 수 있는 지점으로 향한 마법사들은 인생에 줄곧 행운만이 함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이쪽 대방어진은 전부 엉망인데……. 그쪽은 어때.”
“여긴 더 심해. 증폭진이 반 이상 부서진 것 같아.”
마법사들은 마정석을 박아 그려 둔 거대한 여러 개의 마법진 아래로 부서져 엉망이 된 땅과 꺾인 나무들을 피해 움직이면서 상황을 살폈다. 유더의 눈에는 그게 얼마나 크게 훼손된 상황인지 감이 오지 않았으나 마법사들에게는 그 어떤 재해 현장보다도 이곳이 더욱 처참해 보이는 듯 내내 충격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유적 부근의 마력이 겨우 증폭진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었는데… 완전히 헛수고가 된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직접 보지도 않고 벌써부터 절망하는 건 일러. 일단 가 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저길 봐. 진을 무너뜨린 몬스터들의 흔적이 유적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미약한 두려움에 찬 마법사의 시선이 거대한 발톱 자국이 질질 끌려 사라진 숲 속으로 향했다.
“너무 위험해. 일단 돌아가서 여기까지만 보고하고 거점 복구가 완전히 마무리된 뒤에 다시 오는 쪽이 좋겠어.”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니까 유적에는 놈들이 없을 확률이 높아! 여기서 물러나면 언제 또 다시 와서 느긋하게 살필 여유가 생길지 모른다고.”
유더는 마법사들이 의견다툼을 벌이는 동안 눈을 내리깔고 오감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몬스터들의 흔적이 사라져 간 방향에서 기척을 느끼기 위해 집중했지만 느껴지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 유적이 얼마나 먼지는 모르겠지만 근거리 내에 위험요소는 일단 없어. 하지만 안전을 추구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니.’
“…그러면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먼저 돌아가서 보고를 해. 나는 책임을 지고 혼자서라도 유적 쪽을 확인하고 오겠어.”
그때, 마법사들 사이에서 로나가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그녀 외에는 다들 목숨 쪽이 좀 더 소중하다는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유더는 마법사들 사이로 끼어들어 말을 얹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