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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68화 (268/805)
  • 268화

    일행을 다시 깨워 출발하기 전, 에제인은 다시 모자를 쓰고 전서조를 날려 보내는 키시아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조용히 지켜보았다. 손에 쥔 머리끈을 몇 번이나 다시 버릴지 말지 고민했으나 결국 버릴 수 없었다. 키시아르의 말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버리며 나아갈 수는 없는 법이라.’

    그것은 에제인의 삶을 태어날 때부터 지켜보아온 듯 전체를 관통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적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제가 가진 무엇이든 거침없이 버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누구도 에제인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 에제인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위하는 훌륭한 왕자였고, 앞으로 넬라른의 왕이 되어 세상을 구할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존재는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릴 수 없었다. 저보다 훨씬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이들이 지금도 도처에 있는데 왕자로 태어나 무언가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정도, 친우 같던 시종도, 어머니의 유품도, 모두 그의 목숨과 넬라른의 미래보다 소중하지 않았다.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에야 처음으로, 그는 소중한 것을 버리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만류를 들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말이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에제인이 본래 알고 있던 정보와 단 하나도 맞는 점이 없는 존재였다. 분명 제국에 오기 전 수집한 정보 속에서는 몸이 허약하며 놀기를 좋아하고 방탕하여 점차 기울어 가는 제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자라 들었는데, 눈앞의 사내는 그와 전혀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만 살아온 듯한 외모와 달리 이중에서 가장 아무렇지 않게 더러운 땅에 앉아 몸을 쉬고, 누구보다 기민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얼핏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태도 뒤에 보이는 냉정한 판단력은 그가 사실 이성과 감정을 정확하게 통제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냉혹하게까지 느껴지는 자기통제력. 하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건 대체 무엇이라 판단하면 될까.

    ‘저 사내가 보여준 이해할 수 없는 믿음도 거기에서 오는 것일까?’

    에제인은 키시아르의 망토 뒤쪽에 비죽 튀어나온 검집을 향해 눈을 돌렸다. 처음 저 검을 뽑아 숲 한 귀퉁이를 통째로 날려버렸던 순간 느꼈던 충격을 그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마법사들은 그가 보인 검술 능력이 각성자로서의 능력이라 속았을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검을 잡아 온 에제인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각성자로서 지닌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건 분명 검술과 관련된 것이 아닐 터였다. 그가 여태 보인 검술은 한순간에 얻은 능력이 아니라 오랫동안 꾸준히 수련해 온 결과물이었다.

    몸이 약하고 멍청하다고? 대체 누가 말인가.

    키시아르를 직접 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에제인은 제국에 일어나는 변화가 모두 케일루사 황제 한 사람의 의도인 줄로만 알았다. 전 대륙에 은은히 퍼진 마병단과 관련된 소문 속에서 오랫동안 변화가 없던 오르 제국에 긍정적인 흔들림이 생겨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더라면, 본래 다른 곳과 손을 잡으려 했던 에제인이 제국에 몸소 오기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키시아르를 만나고 지켜본 이래, 그는 제 생각을 많이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케일루사 황제 한 사람만의 힘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저 잘난 사내야말로 황제의 진정한 수족이자 그의 검, 그리고 더 나아가 머리를 공유하는 자일 터였다.

    ‘본래 펠레타 공작은 이곳에 올 예정이 없었으나 갑작스레 일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내내 거침없이 제 힘을 보여주고 있지. 그건 그들이 나의 귀환을, 그리고 거래가 성사될 미래를 확신하게 만들 만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와 제 미래를 걸고 거래를 하러 오기는 하였으나 에제인은 사실 언제 자신이 실패하여 죽는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는 전혀 그런 가능성을 생각지 않는 듯 보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낡고 지친 제국의 황가는 조만간 끝이 나고, 그 뒤를 이어 부패한 공작들이 권력을 거머쥘 것이라 대륙의 많은 이들이 예상했다. 에제인 또한 그 판단이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가 자신의 미래를 구할 가능성을 찾기 위하여 황제와 키시아르를 직접 만나게 될 줄 과연 짐작이나 했을까.

    지금까지는 펠레타 공작이 자신보다 훨씬 편히 살아왔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걸어온 길도 에제인이 걸어온 길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어쩌면 그보다 더한 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토록 뛰어난 능력을 철저하게 숨기고 바보가 되는 길을 감내한 채 수십 년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지닌 자가 바라는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누군가를 이끄는 길이란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곳에서 가느다란 줄을 타고 미래를 향해 걸어야 하는 불안하고 힘겨운 길이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확신하지 않는 에제인과 달리 키시아르의 넓고 곧은 등에서는 그런 불안감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 같지 않은 듯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며칠을 지켜본 것만으로 그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저 착각인가, 아니면 역사의 한 장을 다시 쓸 인재인가.

    에제인에게 미래에 얻게 될 힘, 그 이후를 생각하라던 유더 아일의 예언 같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앞의 이상한 사내는 과연 스스로 지닌 힘으로 해낼 일과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을까?

    이미 움직이고 있던 마차를 밀어 속도를 내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멈추어 있던 것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려면 그보다 훨씬 많은 힘이 필요한 법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이목에서 제 진정한 힘과 모습을 감추어 온 저런 사람이라면 못할 일이 없겠지. 그것이 낡은 제국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힘겨운 일일지라도.’

    이상한 일이었다. 에제인은 넬라른의 왕자인 자신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유더 아일을 지켜볼수록, 그리고 그가 경이적인 신뢰를 보내는 키시아르를 대면하면 할수록 점점 그들의 미래를 궁금하게 여겼다.

    그것이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기묘했다.

    에제인은 무엇을 더 감추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내의 곧은 등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유품인 머리끈을 버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부정적이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

    날이 밝자마자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은 바쁘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 밖에서 마법진 보수를 완전히 끝내고 새로운 진을 설치하기 위해 법석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결국 밤새도록 숙소로 돌아오지 않은 사제 루산을 찾아 침실을 나섰다. 그는 가장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의 침상 곁에 웅크린 채 쪽잠을 자고 있었다.

    “루산 사제님.”

    “으… 으음. 유더 님?”

    부은 눈을 힘겹게 뜬 루산이 유더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제가 많이 잤나요? 이런. 벌써 날이 밝았네!”

    곧장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그를 보니 숙소로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쉬라고 말해 보았자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유더는 그의 정신력에 감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식사는 거르지 말고 하십시오. 3일 뒤 돌아올 분들께서 사제님이 수척해진 걸 발견하시면 많이 안타까워하실 겁니다.”

    “그래야죠. 유더 님은 괜찮으세요? 어제 내내 엄청나게 일을 하시고 있다고 마법사 분들이 감탄하시던걸요.”

    사실은 감탄이 아니라 경악이나 호기심에 더 가까운 반응이었으나 루산은 그것을 조금 순화하여 이야기했다. 홀로 남아 열심히 남들을 도운 단장보좌에게 혹여나 제 말이 기운을 빼앗게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그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같이 식사하고 오늘도 열심히 이곳에서 각자 일을 도와 보죠. 아, 맞다. 반점 상태도 괜찮으신가요? 가기 전에 확인하고 신성력을 좀 부어드릴게요.”

    유더는 아침에 나오기 전 확인한 오른손의 반점 상태를 떠올려 보았다. 힘을 꽤 쓴 탓에 반점이 손등 전체로 번지기는 했지만 색이 희미했고 고통도 전혀 없었다. 그 정도라면 굳이 지쳐 있는 루산에게 신성력을 받을 필요가 없을 듯했다.

    “아뇨. 지금은 문제없을 것 같으니 다녀와서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요즘은 점점 더 찾아오는 간격이 늘어나고 계시고 통증도 없다고 하신 걸 보면 좋은 변화 같네요. 그래도 제가 필요하다면 곧바로 찾아와 주세요. 이논 님도 유더 님의 그 반점을 마지막까지 굉장히 걱정하셨었거든요.”

    ‘이논이?’

    유더는 오랜만에 듣는 그의 이름에 미약한 반가움을 느꼈다. 걱정 따위는 전혀 안 하는 척 하더니, 역시 그는 유더가 본 사람 중 누구보다도 정이 많았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한 뒤 각자의 길로 향했다. 유더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멀리서 그를 발견한 마법사들이 아직 약간 어색하기는 해도 어제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 밥은 드셨나 보죠?”

    “예.”

    “잘 됐네요. 저쪽에서 로나가 당신을 찾고 있더군요. 오면 불러달라고 했으니 가 보세요. 마법진을 다시 세우는 쪽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시간이 남으시면… 음… 어제 다 못 물어본 것들을 좀 다시 물어봐도 될까요? 계속 신경이 쓰여서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요.”

    그 정도로 궁금했단 말인가. 유더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보는 마법사들의 시선을 바라보다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는 스쳐지나가는 등 뒤에서 마법사들이 주먹을 쥐고 은밀하게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일 님, 오셨네요. 어제 드린 말씀은 생각해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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