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여러 나라의 국경 범위를 흐리게 만들었을 만큼 드넓은 사라인 대삼림 내에 끝없이 계속되는 평지와 숲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산과 강은 물론, 불쑥 나타나는 늪이나 바위지대도 있었다.
그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로로 무역을 하던 상단이나 용병, 모험가들이 이용했을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내어 걷던 마병단원들은 얕은 시내 곁에 있던 잠시 몸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한 거대한 바위 틈새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짙은 숲 향기를 견디며 불도 피우지 못한 차가운 땅에서 쉬는 일이 편할 리 없으나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가장 안전한 안쪽 자리에서 앉아 잠을 자던 에제인은 문득 귓가에 들려오는 푸드덕대는 소리에 반응해 소리없이 눈을 떴다.
다른 단원들은 모두 제자리에 웅크려 자고 있었으나 단 한 사람, 그들의 단장인 키시아르 라 오르만이 원래 있던 자리에 없었다. 고개를 돌린 에제인은 그가 조금 떨어진 시냇가에 서 있음을 발견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흐르는 시냇물 위를 가득 뒤덮은 검은 밤하늘은 쏟아질 듯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덕에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내린 희미한 별빛과 달빛을 받아 창백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금빛 머리칼의 사내 또한, 꿈결 같은 광경에 속한 자연스런 일부처럼 보였다. 저도 모르게 비현실적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에제인은 그가 하늘을 향해 뻗은 한 손 안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음을 조금 늦게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새?’
어둠과 달빛이 뒤섞인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새가 손가락 위에 앉은 상태가 아니라 손바닥 안쪽에 반쯤 누워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키시아르의 흰 손가락 사이로 문득 붉은 색이 비친 듯도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에제인이 벌떡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다른 한 손으로 새의 몸을 보이지 않도록 가볍게 덮으며 머리부터 꼬리깃까지 느릿한 움직임으로 길게 쓰다듬었다.
잠시 후 두 발로 선 에제인의 눈에 키시아르의 손안에서 작은 날개로 두어 번 날갯짓을 하는 새가 보였다. 분명 피를 본 줄 알았는데, 제가 아직 졸고 있었던가 생각될 만큼 멀쩡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다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에제인은 그 어느 것에도 쉽게 놀라지 않도록 교육받았으나, 요 며칠 사이에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때가 여러 번 발생했다. 지금 또한 그러했다. 그가 멍하니 키시아르와 새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새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슬쩍 어루만지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깨셨다면 잠시 이야기 좀 하시겠습니까.”
그는 에제인이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양 몹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데도 불구하고 기이할 만큼 정확하게 머릿속에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에제인은 다른 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빠져나와 키시아르에게로 향했다. 젊은 왕자는 여태 어느 누구와 마주해도 눈높이가 낮아져 본 적이 없었으나 눈앞의 공작 앞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어렸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에제인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본 작은 새가 키시아르의 손안에서 검은 콩처럼 까만 눈을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새의 다리에는 편지를 넣을 때 쓰는 작은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전서조입니까.”
“뒤따라오는 펠레타 기사들이 보낸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제법 심상치가 않더군요.”
“……무슨 내용이었는지 궁금하군요.”
“혹 죽은 시종이 왕자께 잃어버린 머리끈을 찾아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지금 가지고 계신지도 말씀해 주십시오.”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키시아르의 얼굴에서 농담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에제인은 그의 눈을 살피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왜…….”
“거기에 아무래도 누군가 맡고 쫓아올 수 있는 향을 묻혀 둔 모양입니다.”
짤막한 설명이었으나 에제인이 전후사정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에제인은 곧장 고개를 숙여 제 가슴 부근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암살자들이 오고 있나 보군요. 향을 통해 사람을 쫓는 암살자라… 누가 보냈을지 짐작이 갑니다.”
죽은 시종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에제인은 이를 악문 뒤 품속에 숨겨두었던 머리끈 하나를 꺼내들었다. 한 번 잃어버린 줄 알았던 뒤부터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추적당하고 있다면 당연히 버려야만 했다.
에제인은 머리끈을 내려다보다 미련 없이 그것을 시냇물을 향해 던지려 했다. 그 순간 뻗어나온 키시아르의 손이 막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왜 막으십니까?”
“품에 줄곧 넣고 있었을 만큼 소중한 물건을 그렇게 내버린다면 언젠가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어차피 그들을 죽인다 해도 또다른 암살자들이 계속해서 찾아올 텐데, 그때마다 뭔가를 버리며 살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에제인의 질문에 키시아르는 문득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예?”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어차피 그들은 여기까지 오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의문 어린 질문에 붉은 눈동자가 숲 너머 먼 어딘가로 향했다.
“향을 쫓아온다면, 왕자께서 머물던 곳을 그대로 뒤따라오겠지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기억하십시오.”
눈을 깜박이던 에제인은 잠시 숨을 삼켰다.
‘마법사들이 머무는 거점……!’
잠시 머물렀던 거점에 있던 수많은 마법사들이 떠올랐다. 그들을 치유하려 노력하던 젊은 사제도, 그리고 거기에 남겨두고 온 한 사람의 얼굴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검은 머리칼을 지닌 묘한 분위기의 마병단 사내. 에제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첫 친구가 된 그를 떠올리자마자 큰 당혹감에 휩싸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 사람만큼은 자신 때문에 큰일을 당하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면 더 문제가 아닙니까. 거기 있는 분들이 위험해질 겁니다. 저 때문에 그런……. 어떻게 해야……. 어서 전서조를 돌려보내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에제인의 당혹을 보면서도 키시아르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소식을 보내도 어차피 늦습니다.”
“그러면 누구라도 좋으니 그곳으로 돌려보내십시오. 늦더라도, 약간의 도움이라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저는 지금 거기에 남겨두고 온 이가 있는 한은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제인은 흠칫 놀라 키시아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겨두고 온 이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에제인 아파난 넬라른이 방금 전까지 초조하게 걱정하였던 바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단장님께서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에제인은 어렵게 입을 열어 질문을 했다. 거점에 남겨두고 온 유더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오는 내내 보아 대충 알았다. 그러나 에제인을 뒤쫓아오는 암살자들이 그곳을 덮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그러니 오히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키시아르의 침착한 얼굴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걱정됩니다.”
“아끼는 부하가 아니셨습니까?”
“몹시 아끼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내버려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유더 아일이 얼마나 키시아르를 따르는지는 며칠간 지켜보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뒤로 마지막까지도 단장과 동료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저런 이가 제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얼마나 깊은 부러움을 느꼈었던가.
그런데 그 절대적인 믿음을 받는 이는 정작 위험한 순간 그를 버리려 하는가?
에제인의 불신감 어린 표정을 보며 키시아르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오히려 그곳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는 두 번 다시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
“제가 그곳에 남겨두고 온 이는 이쪽에서 어찌할 방도가 없을 때에도 반드시 뒤를 맡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존재입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등 뒤를 믿고 앞으로 어서 나아가는 것이지, 불필요한 이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에제인은 말을 잃은 채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믿음?……. 아니. 정말로 믿음이나 신뢰라고 할 수 있나, 저것이?’
이전에 유더와 대화를 나누던 순간에도 느꼈던 감정이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느껴졌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된 듯 늘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저 깊은 충성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키시아르의 눈에서 보인 것은 어쩌면 그것만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찾아들었다.
“아무튼 쫓아오는 이들이 있다고 하니 저희도 더 쉴 수 없겠군요. 전서조는 펠레타 기사들 쪽에 다시 돌려보낼 것입니다. 저희도 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지요. 체력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에제인의 혼란스러운 대답을 들으며 키시아르는 조용히 웃었다.
“다행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