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키시아르가 저를 남기고 가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며 유더는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귀하신 분의 친우로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가 없이 관계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떠오른 게 그것뿐이었어.”
에제인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제국의 사람이고, 마병단에서 떠날 생각이 없겠지. 이대로 헤어지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굳이 나를 아는 척 하려 하지도 않을 거야. 그렇지?”
자신에 대해 뭘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솔직히 말해 에제인 왕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유더는 마병단에서 떠날 생각도, 에제인 왕자와 혹 다시 만나는 날이 오더라도 지금의 만남을 언급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유더를 보며 에제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신분도, 서 있는 장소도, 나이도, 그 모든 것이 달라져도 맺을 수 있으며 유지 가능한 관계란 그리 많지 않아. 연인, 혹은 친구. 고작 그 정도지. 나는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가 살아남은 뒤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 스스럼없이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다는 희망이 가지고 싶어. 그러니까 친구를 택하기로 한 거야.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어?”
‘희망이라.’
유더는 그의 긴말 중 가장 마지막에 언급된 단어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희망은 곧 미래를 향한 기대이다. 미래는 한 번의 생을 전부 살고 다시 돌아온 유더가 되찾은 가장 큰 자산이기도 했다.
자신이 미래와 희망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의 환희를 유더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자 에제인이 추가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내게 원하는 걸 얻고 싶다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가르쳐 주었잖아. 천운을 넘어선 운명을 느끼게 하여 사람을 변하게 만들었다면 그만한 책임을 같이 져 줘.”
‘조언을 준 게 책임까지 질 이유는 못 되는 것 같지만…….’
아무튼 에제인 왕자에게도 뭐든 좋으니 희망이 필요하다는 소리라는 건 알 것 같았다.
데려온 측근을 모두 잃고 목숨마저 위협당하는 왕자에게 남은 것은 이제 미래를 향한 실낱같은 기대뿐이다. 유더는 그가 잘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앞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뭐라도 좋으니 구체적이고 새로운 희망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도움을 주려고 나선 것이었고…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에제인 왕자나 넬라른과의 좋은 관계도 필요할 테니까.’
사실 유더 같은 이와 친구를 하겠다 말했다는 일이 밝혀져 보아야 손해를 볼 이는 절대적으로 에제인 왕자 쪽이었다. 키시아르 같은 다소 특이한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왕족과 귀족들은 필요에 의해서만 그러한 관계를 맺었다. 왕족인 에제인이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나이 어린 평민 출신의 마병단원에게 먼저 몸을 숙여 친구가 되기를 청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았다면 왕자가 미쳤다고 생각했으리라.
‘키시아르 같은 사람이라…….’
이전 생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듯한 에제인이 키시아르와 비슷한 면모가 있는 다소 특이한 왕족이 된다면 어떨까. 이전 생처럼 완벽한 왕이라는 말은 듣지 못할지라도 그 자신에게는 한결 낫지 않을까.
가늘게 한숨을 내쉰 뒤, 유더는 제 답을 기다리는 왕자에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정말이지? 물러서는 안 돼.”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를 관계인데 이것이 뭐라고 무른다 만다 하겠는가.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제인의 입가에 처음 보았던 때보다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대단한 친우를 사귀게 되어 정말 기쁘군. 이 제국에 온 뒤 얻은 것 중 가장 좋은 수확이야. 사실 나는 넬라른에서도 누군가에게 먼저 친우가 되고 싶다고 청한 적이 없었어. 그러니 내 태도가 서투르더라도 친우가 많을 당신이 좀 감안해 주기를 바라.”
충격적인 소리였다. 친구가 많아 보인다는 소리는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에제인 왕자의 표정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치는 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건가…….’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묘한 기분을 삼키며 유더는 생각보다 훨씬 기뻐 보이는 에제인 왕자를 지켜보았다. 누군가가 저와 친구를 하고 싶어 했으며, 성사되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 기뻐하실 줄은 몰랐군요.”
“당연히 기쁘지. 끝까지 안 된다고 할 가능성도 생각하고 말했으니까.”
“끝까지 거절했다면 받아들여 주셨을 겁니까.”
“흠. 그때는… 친구의 이점을 발휘하려고 했어.”
‘이점?’
그게 뭔가 했는데, 다음에 흘러나온 답이 실로 가관이었다.
“연인은 혼자서 할 수 없지만, 친구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예?”
“싫다고 해도 당신은 이미 내 친구야.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거절했으면 나 혼자서 친구를 했을 거야.”
“그게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싶어 말문이 막힌 유더의 얼굴을 향해 에제인 왕자가 속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넬라른에 온다면 꼭 나를 찾아와. 친우로서 예의를 갖추어 대접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었으나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에제인 왕자는 홀가분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악수하지. 친우니까.”
“…….”
유더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에제인과 악수를 나누었다.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미소짓는 입매는 이전 생에서 마병단 단장의 방문을 받아들여 인사를 나누던 젊은 왕의 아무런 감정 없던 얼굴과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마병단원들이 준비를 마치고 대삼림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한 길 앞에 섰다. 멀리서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여전히 수습을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유더는 제가 떠나보내야 할 일행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당장 함께 걸어가면 될 것 같은데 이대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유더. 곧 돌아올 테니 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유더의 속내를 모를 단원들은 제각기 밝은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만 그럴수록 늘어나는 것이라고는 좋지 않은 상상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키시아르가 그의 앞에 섰다. 전신을 가리는 망토와 모자 아래 숨겨진 얼굴 쪽을 향하여 서늘한 눈빛을 보내자, 모양 좋은 입술 끝이 난감한 기색을 띠고 살짝 올라갔다.
“음……. 아직도 납득하지 못했나 보군.”
당연하지 않은가. 제가 갑자기 키시아르가 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이 상황을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겠는가? 왜 그를 남기기로 한 것인지 이해는 할 수 있어도 납득까지 하라고 말하는 건 과한 일이었다.
유더가 대답하지 않자 키시아르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런데 어쩐다……. 그럴 만큼 진심으로 걱정 받는다는 게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은데.”
“…….”
그래. 키시아르 라 오르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유더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열 번 정도 되새기며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에게 이런 기분을 느낀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라, 마치 이전 생에서 마병단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를 떠오르게 했다.
“그러고 있으니 내 보좌가 처음으로 좀 제 나이 같아 귀엽군.”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귀여우실 것이 많아 좋으시겠습니다.”
“하하하.”
웃음을 터트린 키시아르가 유더의 겉옷 주머니 안에 무언가를 슬쩍 집어넣고는 돌아섰다.
“그러면 3일 뒤에 다시 보지. 루산 사제와 다른 이들을 잘 지켜봐 주게.”
유더는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그가 집어넣은 물건을 안쪽에서 살짝 펴 보았다.
‘이건…….’
키시아르가 집어넣은 물건은 다름 아닌 며칠 전에도 강제로 선사했던 바로 그 사탕이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하나가 아닌 세 개였다.
유더는 제 손바닥 안을 구르는 세 개의 알록달록한 사탕 포장지를 내려다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 하는 짧은 숨을 터트렸다. 어이없는 감정과 묘한 울렁거림이 뒤섞여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단장님.”
혼잣말에 가까워 아무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부름이라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내가 그 말에 반응하듯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유더는 잠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부상을 입고 돌아오신다면, 다시는 이런 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모자 뒤에 가린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키시아르는 허를 찔린 듯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군가 곧바로 따라오지 않는 키시아르를 부르고 나서야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일행을 뒤따라 걸어갔다.
사라인 대삼림의 유난히도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가 그들의 모습을 금세 집어삼키며 지워버렸다. 유더는 일행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가 아닌데 이상하게도 마음속이 차가워졌다. 그의 안에만 겨울이 찾아오기라도 한 듯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것이 이전 생에는 언제나 품고 살았던 자신의 일부 같은 감각이었다는 사실을 유더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
“이걸 도와주시겠다고요? 할 수 있겠어요?”
“네. 지붕을 다시 올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일행이 떠난 뒤 유더는 마법사들을 도와 무너진 건물들을 수리하는 일을 도왔다. 반신반의하던 마법사들은 유더의 능력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