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설마… 저입니까?”
“…….”
정답이라는 말 대신 돌아온 것은 붉은 입술 끝이 여태까지 중 가장 복잡한 감정을 띠는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광경이었다.
유더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잘못 들은 것이라 믿고 싶었으나 키시아르의 시선은 명확하게 그가 선택한 이가 유더임을 착각의 여지도 없이 지목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 능력의 특이점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한참 뒤 겨우 새어 나온 목소리는 여태까지 중 가장 딱딱하고 거칠기 그지없었다.
“임무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 분명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랬지.”
“그런데 왜 저를……. 아니, 아닙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여기 있는 것보다는 단장님과 동료들의 곁에 있는 쪽이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선이 어느 쪽인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임무가 자칫 잘못하면 얼마나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키시아르는 모른다. 이전 생에서는 토벌 임무 도중 가케인을 포함하여 몇이나 되는 단원들이 사망했다. 몬스터의 이상발생이 처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면 키시아르의 몸에 또 이상이 생길지도 몰랐고, 거기에 더하여 어쩌면 에제인 왕자가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결말이 날 수도 있었다.
제가 곁에 없으면 그 모든 가능성들을 어떻게 다 차단하여 막아낸단 말인가. 제가 없는 곳에서 일어날지 모를 온갖 안 좋은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박동이 극도로 빨라졌다.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아. 이것이 내가 판단한 최선이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원망스러울 만큼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저는 마법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딱히 없어.”
“차라리 단장님과 칸나가 함께 남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들은 결코 제게 경계심을 풀지 않을 것입니다.”
“방금 전 훌륭하게 미칼린 펀트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도 그렇게 말하나?”
말로는 도무지 예전부터 키시아르를 이길 재간이 없음을 알았지만, 이 순간만큼 그게 답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유더는 이를 악문 채 키시아르를 향하여 낮게 중얼거렸다.
“제가 없는 곳에서 단장님이나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얌전히 지낼 수 있을 만큼 저는 그리 순종적인 자가 못 됩니다.”
그러자 키시아르가 일순 짧게 웃음을 흘렸다. 눈이 보이지 않아 그가 품은 감정을 파악하기는 힘들었으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달콤한 웃음이었다.
“내가 그러기를 바란다고 해도?”
“…….”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이없게도 그 미소 앞에서 유더의 으르렁거림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몇 번 입을 열려 노력했지만 급소라도 찔린 것처럼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더는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하여 입술을 깨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키시아르가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마법사들에게 가장 큰 믿음을 줄 수 있는 약속의 징표가 될 자, 혼자서도 이곳의 수많은 이들과 루산 사제를 지켜낼 자신이 있는 자, 그리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 사이에서 남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을 자. 그럴 수 있는 자는 하나뿐이다. 유더 아일.”
오직 너뿐.
유더 아일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명을 내릴 수 있는 사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시선이 초조함으로 범벅이 된 유더의 얼굴을 부드럽게 훑었다. 얼핏 보기에는 침착하고 여유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눈빛이었으나, 그 안에 깃든 감정의 파편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유더는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동료들의 실력을 믿기에 누군가를 이곳에 남기고 가는 선택에 동의했던 방금 전의 자기 자신을 기억하도록.”
그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미약하게 일그러진 유더의 얼굴을 보며 키시아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지막 절충안을 건넸다.
“3일. 3일 내로 돌아올 테니 그만큼만 버티게. 혹 그 안에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마음대로 움직여도 좋다고 허락할 테니까.”
그것은 최후 통보에 가까웠다. 유더는 더 이상 키시아르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
“유더와 루산 사제님을 남기고 저희만요?”
결론을 내린 키시아르는 곧장 나머지 일행들에게 결정된 사실을 알렸다. 단원들은 다소 놀란 듯했으나 이내 키시아르의 결정에 수긍했다. 그 누구도 유더가 따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더는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미칼린에게 직접 같은 사실을 전하며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노력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노마법사는 그의 얼굴을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흐음. 본래 다른 임무 때문에 향할 곳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3일 정도라고는 해도 이런 시기에 소수 인원으로만 다시 대삼림에 나가다니……. 정말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키시아르가 약속한 3일이라는 시간을 제 뇌리에 새기듯 대답하는 유더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둡기 그지없었다.
“정말 실력에 대한 자신감 하나는 독보적이군. 우리의 사정이 이러하여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러면 더 자세한 협력 사항은 당신들이 다시 돌아온 뒤 마치도록 하고, 떠나기 전까지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지나가는 마법사들에게 편히 요청하시오.”
사제 루산은 자신과 유더만 남고 다른 이들이 목적지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기는 했으나, 이내 키시아르 쪽을 향하여 몰래 감사함을 표했다. 그에게는 대삼림 내에서 힘들게 이동하는 일보다 자신의 신성력을 필요로 하는 이들 곁에 있는 쪽이 더욱 보람찬 일이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지.”
유더는 다시 대삼림으로 나가기 전 주어진 잠깐의 준비시간 동안 자신을 몰래 불러낸 에제인을 따라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예. 저도 몰랐습니다.”
키시아르가 태연한 얼굴로 곧장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임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번 생에서는 워낙 생기 있고 부드러운 모습만 보았더니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유더의 대답을 들은 에제인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과는 이게 마지막이 되는 건가?”
“아마 그렇겠군요.”
“사람의 인연이 여러모로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번에 참 많이 깨닫게 되는 느낌이야.”
“…….”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군. 아마도 짧은 시간 내에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보고 들었기 때문이겠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유더는 에제인을 향하여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모자 천 안에서 흘러내린 긴 은빛 머리칼 일부뿐이었으나 그래도 에제인의 목소리가 며칠 전에 비해 놀랄 만큼 침착하게 변했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조언과는 달리 다른 분을 관찰하고 나서 얻은 수확은 아니었어. 진짜 열쇠는 언제나 문 옆에 있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건 무슨 뜻인가 싶어 조용히 침묵을 지켰으나 에제인은 이렇다 할 답을 곧바로 주지 않았다.
“아쉽군. 당신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는데.”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치사가 아니야. 최고의 스승들도 주지 못했던 것을 당신이 내게 주었거든.”
좋은 인재를 곁에 두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분명 키시아르를 지켜보라고 조언한 듯한데, 어쩐지 젊은 왕자의 결론은 돌고 돌아 다시 유더에 대한 관심으로 정착한 듯했다.
“그런 말씀은 돌아가시고 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을 얻으셨을 때 왕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해 주십시오.”
“글쎄. 그럴 날이 올지 모르겠는데. 당신은 그게 정말 가능하리라 생각해?”
웃음기 없는 자조적인 질문이 귀를 파고들었다. 유더는 모자 안에 가린 에제인의 표정을 머릿속에 덧그려 보았다. 분명 비가 오던 날 밤 우물가 옆에서 보았던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확실히 뭔가 달라지기는 했군.’
그날의 에제인은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여 주변을 둘러볼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힘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순수하게 원하고 아쉬워할 정도의 여유는 돌아온 듯했다.
“제가 이전에 드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
“마병단과 함께라면 왕자님께서는 분명 바라시던 곳으로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언젠가 반드시 원하시는 기회 또한 찾아오겠지요. 그때 부디 제가 드린 말씀들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기회라.”
에제인이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며칠 전이라면 그 기회가 절대적인 권력이나 힘일 거라 생각했을 텐데 말이야……. 지금은 신기하게도 그 생각을 해도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아.”
아마도 그게 당신이 내게 말하고자 했던 거겠지. 아직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왕자는 그러한 중얼거림을 남긴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괜찮다면 당신을 나의 친우로 여기고 싶군. 허락해줄 수 있을까.”
그건 에제인을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난 뒤 들은 모든 말 중 가장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이전 생에 어떤 식으로든 제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던 이에게 저 또한 무언가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설마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