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수장님. 대화하시는 도중 죄송합니다. 지시하신 수습과 관련하여 직접 보시고 결정해 주셔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아, 이런. 이야기가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군.”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도중 들어온 젊은 마법사들의 요청에 미칼린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도 전투 후 휴식이 필요할 텐데 상황이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소. 우리는 잠시 밖에 다녀올 터이니 이곳에서 잠시 쉬며 협력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부분을 의논해 주시오. 그쪽의 말마따나 지금은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미칼린과 마법사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간 뒤 마병단원들은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제각기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 등이랑 어깨가 아파.”
“갑자기 계속 전투를 했으니까 당연하지. 쉬면서 근육을 풀어 줘.”
“저 수장님, 엄청 압박감 있는 인상이시네. 휴우.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쫄아 붙더라.”
단원들이 서로의 몸 상태를 살펴 주는 동안 유더는 말없이 키시아르에게로 눈을 돌렸다. 여태 조용히 존재감을 죽이고 있던 사내가 그 시선에 응답하듯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마 이리 빨리 협력을 맺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차피 했어야 할 일이니 잘 되었군.”
“…네.”
유더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혹 제가 단장님의 의사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지 염려되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다행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담백하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이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기회가 눈앞에서 흔들대고 있으면 놓치지 않는 게 당연하지. 나는 내 앞에 있는 이가 유더 아일인지, 칸나 완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겸손하기는.”
다른 단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칸나가 듣지 못해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칭찬을 한 키시아르가 유더의 떨떠름한 반응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너무 유능해도 문제라던 말을 중얼거렸던 때가 마치 환상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칭찬하면 좋을까.”
“해주지 않으셔도 되니 미칼린 님이 말씀하신 협력 방안 쪽 이야기를 생각해 주십시오.”
“아니. 잘한 일은 칭찬을 해야지. 그게 먼저야.”
어떻게 한다. 중얼거리던 키시아르가 잠시 후 유더를 향하여 한 손을 뻗었다. 앞머리를 또 헝클어뜨리는 줄 알고 위쪽을 보았으나 그 손이 향한 장소는 그곳이 아니었다. 귀 옆부분을 스쳐 옆으로 비껴나서는 한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손끝이 잠시 후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혼자서 대응하느라 어려웠을 텐데, 잘 해 주었어. 덕분에 앞으로 이곳에 올 나머지 파견대가 대단히 편해지겠지.”
“…….”
유더는 자신에게 드물게도 짙은 한심함을 느꼈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당연히 머리에 손을 댈 리 없는데, 그간 키시아르의 갖은 돌발행동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에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당 부분 잃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에 들은 연구 이야기. 제법 흥미롭더군. 여태 모르고 있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유더가 무슨 기분과 싸우고 있는지 모를 사내가 매끄럽게 화제를 넘겼다. 유더는 가슴 속의 술렁임을 가라앉히며 미칼린이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연구 관련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자 이내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단장님께서는 전부 파악하셨습니까?”
“필요한 만큼은.”
미칼린이 마지막에 빠르게 설명했던 복잡한 마법 연구 관련 이야기를 그만큼 파악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하던 키시아르가 잠시 후 말을 이어나갔다.
“간략히 말하자면 우연히도 이 대삼림 내에서 농도 짙은 마력이 고여 있는 장소를 찾아낸 뒤 다년간 그곳에 강제로 변화를 일으키려 노력했다는 이야기야. 그동안은 별다른 일이 없었으나, 최근 드디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해 진주탑의 지원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모양이더군…….”
미칼린의 설명보다야 훨씬 간략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최근 재앙 직전의 균열로 추정되는 기현상을 자신들도 잘 모르는 사이 여러 번 목격했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그들이 연구하던 대상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변치 않을 사실이었다.
‘기이한 균열과 몬스터의 이상발생 사이에만 연관성이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거기에 더해 마법사들이 연구하던 유적의 변화라…….’
유적에 변화가 일어난 시기와 균열이 목격되기 시작한 시기, 그리고 서부에 몬스터가 점차 이상발생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시기. 이 모든 것들이 비슷하게 겹치는 상황을 단순한 우연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답을 알기 위해서는 그 유적에 대해 반드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해.’
처음에는 전혀 중요하다 여기지 않았던 그 마력의 샘 유적이란 것이 어쩌면 이번 일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추측일 뿐이고 틀릴 수도 있겠지만 생각만으로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유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키시아르를 향하여 질문을 던졌다.
“단장님의 생각에 혹 유적의 그 변화란 것이 이번 몬스터 이상발생 건이나… 혹은 아까 보았던 이상한 균열과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까?”
“글쎄. 어떤 일들이 발생한 시기가 비슷하게 겹친다 하여 꼭 어떤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답을 하던 키시아르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두꺼운 모자 천 너머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가라앉은 유더의 얼굴을 훑었다.
“…내 보좌는 이미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닌가?”
순간 속내를 정확하게 찔린 기분에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제 생각보다는 단장님의 판단이 더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네 눈과 네 판단 쪽이 내게는 더욱 신빙성 있게 느껴지는데 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대답을 한 키시아르가 약간의 공백을 두고 턱 아래를 문지르며 답을 이었다.
“아무튼 굳이 내 답이 듣고 싶은 거라면, 그래. 나 또한 그 유적지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고 답하겠네.”
“정말이십니까?”
“물론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깔끔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머리를 돌린 유더는 마병단원들과 무어라 말을 나누고 있는 에제인 왕자의 뒷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법사들과의 협력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려면 두 번째 파견대가 오고 난 뒤에야 가능할 테고, 그전까지 우리는 현재 먼저 해야 할 일을 끝내고 와야 해. 우선순위를 미룰 수는 없지 않나.”
“…….”
본래대로라면 대삼림 내에 있는 마법사들의 거점에 방문하자마자 편지만 전달하고 곧장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몬스터 발생 때문에 갑작스레 연속 전투를 하느라 벌써 하루 대부분이 소요된 상태였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더 소모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면 미칼린 님에게는 자세한 협의는 추후 다시 진행하자고 말씀드린 뒤 서면으로라도 간략히 서약을 남기면 되겠습니까?”
혹 그들이 에제인 왕자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오는 사이 마법사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협력하겠다는 결정을 서로 믿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러한 의도를 담아 가장 보편적인 방안인 서약을 제시했으나 키시아르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확실한 방안이 있지. 루산 사제를 비롯한 일행 일부를 여기 남기고 가면 돼.”
“예?”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뜨자 키시아르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치료해야 할 이들이 많아. 마법사들은 현재 누구보다도 사제의 힘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상태이고, 가능하다면 이곳을 지키는 일을 도와줄 이도 필요로 하겠지. 종잇조각에 의지한 약속보다야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을 남기고 가는 쪽이 더욱 믿음에 걸맞지 않겠나.”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마병단원들이야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출중하니 두어 명 정도 이곳에 두고 간다 해도 에제인을 보호해 임무를 완수하는 데 문제가 없을 테지만 부상자로 가득한 서부 마법사 연합에서는 그 남아도는 힘이 절실히 필요할 터였다.
‘설령 나 혼자만 에제인 왕자의 곁에 남는다 해도 그가 죽거나 다칠 일은 없을 테고.’
냉정하게 판단을 마친 유더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더 남기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누구일 거라 생각하나?”
“음…….”
마법사들 사이의 솔직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을 칸나인가. 아니면 타고난 외모와 성격으로 타인의 경계를 늦추는 데 능하며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데에도 충분한 실력을 겸비한 가케인일 수도 있었다.
여차하는 순간 다른 이들을 피신시키는 데 좋은 능력을 발휘하는 엘더 남매도 괜찮을 테고, 어둠 속에 대상을 감추는 특이한 능력으로 적이나 몬스터의 시선에서 누군가를 보호하기 좋은 에문도 나쁘지 않았다.
‘아마 에문의 능력은 에제인 왕자를 만일의 경우 우선 숨기고 보호하기 위해 뽑았을 테니 그를 남기고 갈 확률은 낮겠지만…….’
“그리 오래 생각할 문제인가?”
유더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키시아르가 아직도 모르겠느냐는 듯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칸나입니까?”
“아니.”
“그러면 가케인이겠군요.”
“그것도 아니.”
“그러면…….”
“힌 엘더, 핀 엘더도 아니야.”
유더가 할 말을 미리 예상한 듯이 답하는 키시아르를 보며 유더는 문득 여태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단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말았다.
‘……잠깐. 설마?’
“설마… 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