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미칼린은 자신과 유더 한 사람 이외에 다른 이들이 따라오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유더는 키시아르 쪽을 향하여 살짝 시선을 보낸 뒤 곧장 미칼린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곳곳이 깨진 물건으로 엉망이 된 복도를 따라 들어선 방 안에는 부상을 입은 마법사들이 여럿 잠들어 있었다.
“이들은 새벽에 부상을 입은 이들이오. 빠른 회복을 위해 마법으로 재워두었지.”
설명과 함께 가장 안쪽 침상으로 다가간 미칼린이 잠들어 있던 마법사 한 명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잠시 후 그가 멍하니 눈을 떴다.
“수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스켈리. 상태는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린 데다 도움도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지요…….”
“다친 녀석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대도 그러는구나.”
미칼린의 답에 스켈리라는 마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다치고 고생하는 걸 아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처음 보는 얼굴인 듯한데요.”
유더를 향하여 불안함과 경계심 어린 눈빛을 한 젊은 마법사를 향해 미칼린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한 손님이다. 우리 말을 듣기만 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협력이요?”
“그래. 스켈리. 사실 지금 널 보러 온 건 어제 네가 봤다던 균열 현상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인데 혹 그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미칼린의 말에 스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적지에서 본 그것 말씀이시라면… 제가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 탓에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이라 결론난 일이 아닙니까?”
“그랬었지. 그런데 어쩌면 그게 헛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이다.”
“예?”
“네가 보았던 그런 균열이 오늘 또 나타났다는구나. 그래서 네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마법사가 미칼린과 유더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사실 마냥 헛것이라 생각하기엔 너무 이상한 일이었거든요.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스켈리는 어제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유적지를 살피는 오후 담당 일을 하러 갔던 때였습니다. 젬마와 샤일은 방어진을 보수했고, 저는 마력 분포도 상태 변화를 살폈지요. 며칠 전과 비교해 확실히 마력 농도가 높아졌더군요. 그것을 기록하던 도중, 갑자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 그림자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허공에 생긴 긴 균열이더군요.”
스켈리가 설명한 균열의 생김새는 유더가 본 것과 거의 비슷했다.
‘정말로 오늘 처음 나타난 게 아니었군.’
이전 생에서 재앙이 나타나기 전 목격된 균열이 한 번씩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남부에서 일어난 대지진 때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각 다른 날짜에 균열과 비슷한 것을 보았노라 주장하는 목격자를 열 명 넘게 찾기도 했다.
그들의 진술이 모두 사실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일이 터진 뒤 나중에 찾은 목격자만 해도 그 정도이니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나타났다 사라진 균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했었다.
혼자서는 균열을 추적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기 어려웠기에 그저 가설로 남기고 넘겼던 부분을 드디어 제대로 알 수 있다 생각하니 심장박동이 저절로 빨라졌다.
“몬스터가 나오려나 싶어 긴장하여 젬마와 샤일을 부르러 다녀왔더니 그 균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습니다. 젬마는 헛것을 본 게 아니냐고 했죠. 샤일도 요즘 유적지에서 헛것을 보는 녀석들이 있다며 한동안 연구를 좀 쉬라고 하더군요. 알겠다고는 했지만 혹시 몰라 수장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스켈리의 보고를 들은 미칼린은 그 일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오랜 연구에 지쳐 간간이 헛것을 보는 건 어디서나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의 어둠과 함께 나타난 몬스터들의 습격이 그들에게서 모든 여유를 앗아가며 이상한 균열에 대한 이야기는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야기해 주어서 고맙다. 그러면 좀 더 쉬거라.”
말을 마치고 피곤해 보이는 스켈리를 다시 재운 미칼린이 유더를 돌아보았다.
“어떻소.”
“저분이 보았다는 균열이 제가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역시 이 현상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건가…….”
미칼린이 찌푸린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유더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금 듣기로 요즘 유적지에서 헛것을 보는 마법사들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그것들 중에도 그런 균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으음. 헛것을 보는 이들이 좀 늘었다는 건 알았지만 요즘 연구에 큰 진보가 생길 상황이라 다들 무리한 탓에 그렇다고만 여겼었는데.”
그래도 일리가 있다고 여긴 듯 미칼린이 침음을 흘렸다.
“한번 알아는 봐야겠군.”
그들은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유더는 미칼린의 뒤를 따르며 돌아가서 일행들에게 해 줄 말을 정리했다.
“수장님. 스켈리와 이야기는 마치고 오셨습니까?”
“그래. 그 녀석이 본 것도 오늘 나타났다는 그 이상한 균열과 동일한 현상이었던 듯하더구나.”
미칼린의 짧은 설명에 모든 이들이 일순 숨을 삼켰다.
“그러면…….”
“다들 현장을 수습하느라 바쁘겠지만, 너희들이 지금 바로 알아봐 주어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
미칼린은 곧장 로나를 비롯한 휘하 마법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요즘 유적지를 둘러보던 도중 헛것을 봤다던 녀석들이 꽤 많지 않았느냐? 뭘 봤는지, 어디서 봤는지, 그때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와 다오. 대충이라도 좋으니 기억나는 대로.”
마법사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이 답을 알아오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을 돌며 의견을 취합해 온 이들이 내놓은 답은 몹시 놀라웠다.
“귀신처럼 진짜 헛것을 본 이가 두 명, 그리고 스켈리처럼 그림자와 착각할 만한 균열 비슷한 것을 본 이가 대여섯은 되는 듯합니다. 지금은 마을 쪽에 나가 있는 이들이나, 서부 거점에 있을 이들이 지나가듯 했던 말까지 취합하면 더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답을 알아 온 마법사들도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던 듯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이끄는 미칼린 또한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런 것을 본 게 언제인지도 알아냈느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제일 먼저 본 이는… 적어도 한 달은 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는 정말 짧게 나타났다 사라져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깜짝 놀라기만 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앉아 잊어버렸었다는군요.”
“그것도 유적지 쪽이었다더냐.”
“예.”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린 미칼린이 마법사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도 여태까지 그걸 신경 쓸 생각을 하질 않았느냐? 즉각 타이누로 보고를 보냈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우리가 타이누와 대삼림을 계속 번갈아 오가며 지내느라 꾸준히 함께 머무는 인원이 없던 탓이겠지. 나조차도 최근 몇 달 간은 방문하지 않았었으니 누굴 탓하겠느냐.”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 미칼린의 맹금류처럼 샛노란 눈동자가 유더 쪽으로 향했다.
“진리를 쫓는다면서 정작 이미 일어나고 있던 현상에서 눈을 돌리고 있던 건 우리 쪽이었던 듯하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소.”
“아닙니다.”
“한 달 전쯤이라면 공교롭게도 우리가 연구하던 유적지에서 유의미한 마력분포 변화가 관측되기 시작했던 때요. 아무래도 무언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지금 당장은 수습 때문에 그곳에 가기가 어렵겠소.”
“그렇다면 그 마력의 샘 유적지에서 무엇을 연구하고 계셨던 것인지라도 조금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마력 분포 변화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뭔지라도 알게 된다면 나을 듯해서 말입니다.”
“그건…….”
미칼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유더와 마병단원들을 돌아보았다. 협력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지만 그래도 연구에 대한 부분을 말하려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빠르게 답을 내렸다.
“당신들은 혹 매년 진주탑에 들어가는 마법사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소?”
노마법사가 무겁게 내뱉은 말에 마병단원들이 일제히 눈을 깜박였다. 유더는 그 문제에 대해 이전 생에 대충 들은 바가 있었으나 일단 모른 척 입을 열었다.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지만……. 잘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적어도 몇백 년 간 이어져 온 큰 문제 중 하나였소. 특히 몇십 년 전부터는 더했지. 이대로 가다가는 마법사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다는 소리요.”
“…….”
“마법사가 줄어들고, 날이 갈수록 공격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원인은 하나뿐이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력이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오.”
직설적인 미칼린의 설명에 등 뒤에 선 마법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마력의 샘 유적지를 발굴하는 중이었다오. 비록 이제는 진주탑조차 우리의 연구 결과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요.”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의 연구였다. 유더는 이어지는 어려운 설명을 들으며 여태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흘렸던 마력의 샘과 관련한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키시아르는 마법사들에게 마력의 샘에서 초기 마법사들이 힘을 얻었다는 전설이 존재한다고 했다.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은 바로 그 마력의 샘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발굴하여 그들의 힘의 원천을 다시 되돌릴 방법을 찾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저들이 찾아낸 유적지가 정말 마력의 샘인지 뭔지가 있던 곳인지는 확실치 않은 듯하지만……. 그 장소에 모르긴 몰라도 마력이 일단 다른 곳보다 많이 고여 있는 것은 맞겠지. 마치 붉은 돌이 있던 그 산맥처럼.’
유더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그래도 지금은 그것에 대해 잘 아는 키시아르가 함께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장신의 사내가 보였다. 그는 미칼린의 설명을 놓치지 않고 모두 집중하여 듣고 있는 중이었다.
혼자 답을 찾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