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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61화 (261/805)

261화

순간 존경하던 수장이 원로 자리를 찬 이유의 진실을 갑작스레 알게 된 로나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유더 또한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혹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친구라고 하지 않았었나?’

타이스는 분명 서부 마법사 연합 수장인 미칼린이 제 친구라며, 편지를 보여주면 섭섭지 않게 대해줄 것이라 자신 있게 말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 편지를 받은 당사자의 말은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미칼린이 무언가를 회상하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현대의 마력 변화상황과 관련한 견해 차이로 싸우다 주먹질을 한 뒤에, 다음에 만나는 건 네놈 장례식일 거라고 소리치며 돌아왔었는데…….”

“…….”

이쯤 되면 이것은 이미 악우를 넘어선 원수의 범위 내였다.

“…그런데 정작 내가 죽을 뻔한 순간 도움을 받게 된 게 그 인간 덕이라니.”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유더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칼린이 찡그린 채 묘한 웃음을 띠고 그를 보고 있었다.

“이만큼 살았어도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군.”

깊이 한숨을 내쉰 노마법사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도로 접었다.

“혹 이 편지를 내게 보내면서 타이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분께서는… 처음으로 토벌 임무를 나가는 마병단을 걱정하시며, 서부에 도착한 뒤 친구이신 미칼린 님을 찾아가 이 편지를 보여주면 잘 대해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라!”

미칼린이 거칠게 자라난 수염을 매만지며 짤막하게 허-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그렇게 헤어진 건 기억 끄트머리에도 안 남았나 보군. 역시 그 뻔뻔한 인간다워.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마치 동의를 구하는 듯한 물음에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연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시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좋게 표현해 줄 필요 없다니까. 겉은 우아하게 꾸며 멀쩡해 보이지만 속 알맹이는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해!”

타이스 율만을 시원하게 욕한 미칼린이 편지를 도로 유더에게 돌려주었다.

“자, 도로 가져가시오. 확인은 했으니 그 재수 옴 붙은 편지는 당신들이 도로 돌려주든, 태우든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고 그것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듣지.”

‘……우리 말을 긍정적으로 들어줄 마음이 생겼다는 뜻인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까까지만 해도 피로와 경계로 가득했던 눈빛이 한결 시원해 보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타이스 율만의 편지가 어떤 식으로든 제 역할을 다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의 성향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더는 이곳에 오기 전 마을에서 로나 일행을 만난 경위와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인 공작가가 마병단에 도움을 요청하기는 했으나 분명히 거절하였으며, 그들과는 상관없이 이곳 상황을 파악하고 몬스터 토벌을 처리하기 위해 왔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을 때 미칼린은 흠 하고 낮은 신음을 토했다.

“그러니까, 마병단은 빌름 남작과는 애초에 만난 적도 없다?”

“네. 저희는 마병단에서 가장 먼저 파견되었고 타이누에 방문하지 않은 채 곧장 이곳으로 왔습니다. 빌름 남작이란 분에 대한 이야기도 로나님에게 듣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마력의 샘 유적에 대해서도 정말 몰랐고?”

“저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몬스터 이상 발생 현황을 파악하고 처리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유적에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일찍이 단장님께서 이미 서부 마법사 연합 측에 연락을 드렸었겠지요.”

마법사들은 각성자와 마병단의 적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제국민 중 하나라는 사실이 충분히 느껴지게끔 신중히 대답하는 유더의 무표정한 얼굴을 미칼린은 아주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래…. 그래서 현재 마병단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파악한 바로는 이곳 상황이 어떤 것 같소?”

그것은 시험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유더는 지금이 바로 서부 마법사 연합과 마병단이 곧장 손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의 기로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경계는 이제 거의 없어졌다. 그간 준 도움도 있으니 잘만 한다면 바로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겠지.’

몇 년이나 이곳에서 연구를 한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번 일을 처리할 때 이전 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해질 터였다. 그는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키시아르를 찾았다. 유더가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곧장 찾을 수 있는 위치에 기척을 죽인 채 서 있던 사내가 시선이 닿자마자 다른 이들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조차 필요 없는 허락의 의미였다. 유더는 곧장 매끄럽게 답을 이어나갔다.

“…이곳에 오기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앞으로 훨씬 심각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년보다 조금 더 심한 정도의 몬스터 발생이라 가볍게 여기면 분명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우리 서부 연합 거점이 당했듯이 말이지.”

“이런 일을 완벽하게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앞으로 피해를 더 키우지 않는 방안을 찾는 쪽이 아닐까 합니다.”

“말은 좋군. 하지만 어떻게 말이오? 빌름 남작 그놈과 타인 공작가에게 도움을 청해도 그 느려터진 놈들은 인색하기 짝이 없어 최대한 늦게 지원을 보내려 할 텐데? 당신들의 힘만으로 충분히 이번 일을 수습 가능하다 생각하는가?”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물론 어렵겠지요. 하지만 수장님께서 저희를 믿고 도움을 주신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호오.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있어 보이오? 이토록 수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을 감안하고 앞으로 먼저 나서 길잡이 노릇이라도 하라는 뜻은 아닐 테고.”

미칼린의 말 속에는 줄곧 날카로운 뼈가 들어 있었다.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듯 거친 반응을 하여 제가 이끄는 연합이 손해를 볼 만한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고 유더와 마병단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더 또한 오랜 세월을 마병단장으로 지내며 이런 식의 대응에는 몹시 익숙해진 몸이었다. 그가 정말로 20살짜리 애송이였다면 저 말에 곧장 분기를 참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저 정도 뻔한 말에는 동요하지 않았다. 저런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냉정히 허를 찌르는 방식이 제일이었다.

“오늘 대삼림으로 들어와 몬스터가 대량 발생하기 직전, 저희는 이상한 균열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낸 유더를 향해 미칼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흠?”

“몬스터가 일반적으로 발생할 때 생겨나는 그런 균열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범위가 아주 넓었고, 허공에 그저 오랫동안 머물러만 있는 기묘한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진 후 주변에서 몬스터가 빠른 속도로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크기가 사람 두 배만 한 대형 몬스터였습니다.”

미칼린이 정말이냐는 듯 로나 쪽을 돌아보자 그녀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의 말씀이 사실입니다.”

“처음 보는 균열이었으나 몹시 불길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아니. 저희는 그 균열이 어쩌면 이번에 서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몬스터의 이상발생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습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몇 년간 줄곧 지내며 연구를 해 오신 서부 마법사 연합 측에서는 그 균열에 대해 저희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아내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혹은 이미 보신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지요.”

“…….”

“언제 또 그 균열이 나타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도 근처에 나타났다 사라져 또다시 이상발생이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지요. 지금은 서로의 의중을 시험하기보다 빠른 판단과 협력이 우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지나치게 대범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미칼린이 한 대 얻어맞은 듯 눈을 깜박이다가는 잠시 후 입을 벌리고 웃음인지 감탄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렸다.

“허.”

“수장님께서 빠른 결정을 내려 주신다면 마병단은 즉시 협력체계를 갖추도록 협력하겠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여 서부에 있는 선량한 제국민들의 피해를 줄이는 일뿐임을 믿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유더는 얌전히 서서 미칼린의 답을 기다렸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미칼린이 잠시 후 푸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리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한 배짱이군. 어리다고 생각하여 우습게 보았는데, 이거 내가 한 방 제대로 먹었어.”

“…….”

“좋소. 협력하지.”

“수장님…….”

미칼린의 뒤에 있던 젊은 마법사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의뭉스러운 자들이 싫어.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나도 점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더군. 그런데 오랜만에 이 정도로 직설적인 말을 들으니 머리가 아주 차가워지는 느낌이요.”

유더의 얼굴을 마주한 미칼린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러면 제대로 다시 악수를 해 보지.”

목소리부터 눈빛까지 이전과는 훨씬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로 바뀌었음이 느껴졌다. 유더는 미칼린과 손을 맞잡았다. 강하게 악수를 나눈 뒤 손을 놓은 미칼린이 곧장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말한 그 균열 이야기 말인데…. 사실 이쪽에서도 어제 우리가 연구하던 유적 부근에서 비슷한 것을 목격했다 말한 마법사가 있었소. 그때는 정신이 없어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생각이 나더군. 혹 지금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겠소?”

“정말입니까.”

유더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당장 듣고 싶습니다.”

유적, 그리고 이상한 균열과 재앙의 징조.

유더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기 시작한 추측들을 알아차린 듯 미칼린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었다.

“부상을 입은 터라 다른 방에 누워 있을 테니 따라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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