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동료들의 위험을 눈앞에 두고 여태까지의 모든 인내심이 바닥난 마법사들은 침착함을 되찾으라 말해도 들을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유더는 정신없이 뛰어가는 마법사들의 뒤를 따르기 전 키시아르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할까요.”
“여기까지 함께 온 마법사들이 전멸해서는 안 되겠지. 일단 저 안에 남아있을 사람들을 구출하고 나서 자세한 상황을 파악한다.”
“알겠습니다.”
전투 능력이 주가 아닌 칸나나 에문, 그리고 사제 루산과 에제인 왕자는 뒤쪽에 남고 남은 인원은 모두 전투가 벌어지는 건물 쪽으로 향했다. 제법 많은 몬스터의 시체가 건물 주변에 쌓인 모습을 보면 안에 있는 이들이 필사적으로 항전 중인 모양이었다.
유더는 얼마 남지 않은 공격용 마도구를 들고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마법사가 등 뒤에서 새로운 몬스터에게 꿰뚫리기 전, 그 몬스터의 발밑 땅을 한 뼘 정도 꺼지게 만들어 발목을 붙잡았다.
“크아아아!”
갑작스러운 변화에 무게중심을 잃은 몬스터가 뒤로 휘청이며 고함을 지르자 마법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허억…….”
“옆으로 피하십시오.”
그가 유더의 말을 듣고 곧장 옆으로 몸을 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뛰어온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이 몬스터의 사지를 붙잡아 찢었다. 검은 체액이 튀며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리자 근처에 서 있던 가케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귀를 막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근처에서는 엘더 남매가 몸을 부풀려 몬스터들과 힘 대결을 벌이는 중이었다.
잠시 당혹한 듯 아무 소식이 없던 건물 안쪽에서도 그들이 적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또다시 포탄과 같은 불꽃을 쏘아 가세하기 시작하자, 건물을 포위한 몬스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그것을 포함해도 가장 많은 몬스터의 목숨을 거둔 이는 그다지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던 키시아르였다.
“하아… 하…….”
“이, 이제 다 끝난 건가…….”
만신창이가 된 마법사들이 검은 체액으로 범벅이 된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헐떡였다.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건물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그들 못지않게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주 브로치를 단 마법사 로브를 걸친 이들의 가장 앞에 선 이는 거친 잿빛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르고 샛노란 눈동자가 맹금류와 같이 형형한 느낌을 주는 나이 든 사내였다.
“수장님!”
“무사하셨군요!”
“그래. 너희도 무사히 여기까지 돌아왔구나. 일찍 돌아오라고 말하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었는데… 하늘이 도왔군.”
그가 바로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 미칼린 펀트였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법사들의 어깨를 아버지처럼 한 번씩 토닥여 주는 미칼린에게서는 한 단체를 오랫동안 책임져 온 수장다운 노련함이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희가 떠나고 방어진을 수복하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거점이 이리도 모조리 박살이 났단 말입니까.”
“몇 시간 전 유적 부근에서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몬스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한 번 뚫렸던 1번 방어진을 미처 다 수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설마 또 뚫릴 줄은 몰랐어. 너희가 오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
“늦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도와준 저분들은 누구냐.”
미칼린을 포함한 모든 마법사들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마병단원들에게로 향했다.
“저희를 이곳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마병단 분들입니다.”
로나가 대표로 나서서 대답하자 건물 안에서 미칼린을 따라 나온 다른 마법사들이 일제히 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마병단?”
“진짜로 그 마병단이라고?”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여 감동에 차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아무리 방금 전 도움을 받았다 해도, 마병단에 대해 이미 생성되어 있던 나쁜 인상과 빌름 남작이 뿌린 잘못된 정보가 우선하고 있는 상태일 테니 곧장 믿지는 않으리라 예상했다. 다른 마병단원들 또한 각자의 이유로 비슷한 판단을 했는지 불쾌해하거나 놀라는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모르는 건 로나와 그녀의 일행으로 온 마법사들이었다.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아. 하지만 그건 전부 오해야.”
“그래. 우리도 처음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 하지만 알고 보니 정말 좋은 분들이었다고!”
“……오해?”
“그래, 오해!”
“이분들의 힘이 없었다면 우린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죽었을 거야. 방금 도와주시는 것도 봤잖아!”
혼란 속에서 미칼린을 따르는 마법사들이 침묵을 지키다 자신들의 수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결국 결정을 내리는 이는 그라는 뜻이었다. 마병단을 조용히 살피던 미칼린이 그제야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들은 정말 마병단인가?”
“그렇습니다.”
대표로 나선 유더가 짤막하게 대답하자 미칼린이 그의 전신을 훑었다.
“앞에 나서기에는 많이 젊어 보이는데… 당신을 대표라 생각해도 되겠나?”
유더는 잠시 키시아르 쪽을 흘긋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단장보좌, 유더 아일이라고 합니다.”
“서부 마법사 연합 수장, 미칼린 펀트. 이 이상의 인사는 상황상 생략하지.”
악수 한 번 없이 인사를 마무리 지은 미칼린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로나는 헛말을 하지 않는 마법사지. 일단 도움을 받았으니 손님을 내칠 수는 없는 법. 상황이 많이 어지럽지만 일단 들어들 오시게. 뭐가 오해라는 건지는 그다음에 이야기하고.”
그들은 미칼린을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본래는 연구를 위하여 사용되었을 건물 곳곳에 부상자들의 신음이 울리는 중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사제 루산의 표정이 몹시 어둡게 변했다.
그는 다른 이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곧장 쓰러져 있는 부상자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으…… 으윽.”
“부러진 부위가 심각하군요. 누가 좀 도와주십시오. 뼈를 맞추고 곧장 신성력을 사용하겠습니다.”
그의 서슴없는 모습에 마법사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미칼린 펀트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병단이라면서, 사제가……?”
“저희 단에 소속되어 계신 사제님이십니다. 곧장 치료를 하시려는 듯하니, 혹 저분을 도와주실 마법사 분들을 몇 분 배치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미칼린이 묘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 표정을 의심이라 여긴 듯, 로나가 또다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수장님,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분은 정말 태양신의 사제이십니다. 죽을 뻔했던 엘빌을 살려주신 것도 저분이세요.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저분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아마 엘빌의 시체를 묻고 돌아와야 했을 겁니다.”
“……엘빌을?”
“네.”
미칼린이 루산과 유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날카로웠던 인상이 그제야 처음으로 누그러졌다. 인간적인 감정이 차오른 듯 흔들리던 눈동자가 천장 위로 한 번 움직였다가는 겨우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알겠소. 진, 로카, 뮬. 따라가서 도와드려라.”
“아,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이 곧장 달려가 루산을 돕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미칼린은 그를 따르던 마법사들을 빠르게 재배치해 바깥으로 나가 상황을 수습하도록 명한 뒤, 로나를 비롯한 몇 명의 마법사만을 곁에 남기고 마병단원들과 마주했다.
“정신이 없군. 우린 어제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줄곧 몬스터를 상대했소. 저주받을 놈들이 대체 어디서 그리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더군.”
아래 마법사가 가져다준 찬물을 가득 들이켠 미칼린이 입가를 거칠게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름진 눈가 위로 깊은 피로가 맴돌았다.
“그래, 이제 말해 보시오. 나 미칼린 펀트가 당신들에게 무슨 오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인지.”
“그 전에, 우선 이것부터 받아주십시오.”
유더는 품속에서 타이스 율만의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받아든 미칼린이 겉면에 쓰인 이름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멀리 떼어놓았다가 다시 눈가로 가까이 가져다 댔다.
“……내 비상용 안경이 어디 있을 텐데. 누가 좀 가져와 다오.”
“여, 여기 있습니다 수장님.”
기어이 안경까지 가져와 쓴 미칼린은 다시 한번 편지를 들여다본 뒤에야 신중하게 그것을 뜯어 내용을 보았다. 수장의 흔치 않은 태도에 덩달아 긴장한 마법사들이 그의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군. 진짜 타이스의 편지야.”
한참 뒤 편지를 내려놓은 미칼린이 내뱉은 한 마디 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신들… 정말 마병단이었군.”
“예.”
그렇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는 대신, 유더는 그저 감정의 변화 없는 짧은 대답을 택했다.
“그래. 타이스가 지금 거기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 혹 무슨 연구인지 물어도 되겠소?”
“죄송하지만 그것은 제가 답변드릴 수 없겠습니다.”
“몇 년간 연락이 없다 싶더니 이런 곳에서 또다시 이 이름을 보게 되다니.”
미칼린의 눈 사이로 복잡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후 처음으로 눈을 내리깔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타이스답군.”
유더는 사냥감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카롭기 그지없었던 미칼린 펀트의 경계심이 그제야 약간 녹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미칼린이 문득 툭 이야기를 던졌다.
“타이스는 나와 같은 스승을 모신 이로, 나이는 같으나 6개월 먼저 진주탑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지. 솔직히 말해서 진주탑 원로 자리를 걷어찬 것도 다 그 인간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