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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59화 (259/805)

259화

너무 유능해도 문제라는 건 어떤 의미로 한 말인가. 다른 때와는 달리 곧바로 입을 열어 묻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를 나눌 여유는 그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또다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비명을 들으며 키시아르가 다시 검을 위로 돌려 쥐었다. 은빛 검날을 타고 선명하게 푸른 기운이 맺혀 흘렀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발짝 걷다가는 무언가를 생각한 듯 다시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유더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무슨 일이느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천 아래로 얼핏 붉은 시선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알면서도 그 짧고도 묘한 긴장감을 스스로는 깨트릴 수 없었다.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멍멍하게 작아져 갔다. 비릿한 냄새도, 눈을 매캐하게 만드는 연기도, 그리고 마침내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기척을 예민하게 감지하던 신경까지 느슨하게 풀렸다. 넓게 확장되어 있던 오감이 모두 닫힌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눈앞의 사내뿐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키시아르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유더의 턱을 붙잡았다. 엄지가 가볍게 움직여 뺨 아래쪽을 쓸었다. 잠시 후 떨어져 나간 흰 손가락 끝에는 약간의 피와 검은 얼룩이 선명히 묻어 있었다.

‘…내 피인가?’

아프지 않아서 다친 줄도 몰랐는데, 뒤늦게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도 했다. 아까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던 와중 스쳤던 모양이었다.

“이 이상 다치는 건 안 돼. 약속할 수 있나?”

유더는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선을 떼어 다시 그를 보았다.

키시아르와 마주했을 때 몇 번이나 느꼈던 이상한 기분이 또다시 찾아들었다. 이런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몽롱한 열기가 심장에서 흘러나와 손끝과 발끝을 타고 눈가로 치미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유더는 그의 시선을 피하여 메마른 목소리를 내었다.

“……네.”

어딘지 멀게 들리는 대답이 흘러나온 뒤에야 키시아르는 다시 돌아섰다. 그제야 유더가 느끼던 고요하고 느린 세상도 다시 제대로 된 속도감을 되찾았다.

“유더!”

멀리서 그를 부르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심호흡을 한 번 깊이 한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몬스터를 모두 정리하고 잠시 여유를 얻은 일행은 한 자리에 모두 모여 현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나누고 나아갈 방안을 간략히 의논했다.

“현재 몬스터 발생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모두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대로라면 분명 포위될 테니, 몬스터를 처리하느라 지체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길을 험하게 만드는 나무들은 베어내며 빠르게 이동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더가 키시아르와 함께 의논했던 강행돌파 방안에 마병단원들은 금세 수긍했으나, 마법사들은 못내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거야 맞는 말이죠. 하지만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놈들을 어떻게 빨리 해치우고, 나무는 또 어떻게 벤단 말이에요? 아까처럼 불이라도 붙이지 않는 이상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그 많은 나무들을 사람을 피해 베기는 어려울 거예요.”

“우리가 가져온 공격용 마도구들도 이제 거의 안 남았는데…….”

유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군대는 마법사들의 목소리를 듣다 짧게 입을 열었다.

“나무를 베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 한 분이 옆에서 방향만 알려주신다면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 혼자 하겠다고요?”

마법사들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네.”

“농담이죠?”

“유더는 농담 같은 거 안 하는데.”

“아까 그걸 보고도 아직 못 믿겠나 봐.”

뒤쪽에 배부른 작은 맹수들처럼 앉아 있던 엘더 남매가 키득거리며 작게 떠들었다. 그들의 말을 들은 마법사가 찔끔하여 어깨를 굳히자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은 로나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을 했다면 만용을 부리지 말라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방금 본 게 있으니 믿지 않을 수 없네요.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우린 아까 전멸했을 테니까요.”

전투 도중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거칠었다.

“공격용 마도구도 거의 떨어져 더 이상 도움도 못 되는 상황에서 버리고 가지 않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만큼 당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녀의 시선이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의 동료들과 그와는 반대로 아직 생생하게 기력이 살아 있는 마병단원들의 모습을 번갈아 살폈다. 다른 마법사들도 방금 전 치른 전투로 실력 차를 확실히 파악했는지 기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좋아요. 당신 말에 따르겠어요. 그리고 옆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무를 베는 건 그렇다 치고 중간중간 마주칠 몬스터는 어떻게 빨리 처리할 셈이죠? 그것도 당신이 다 할 셈인가요?”

“물론 아니지요. 그 일은 제가 할 것입니다.”

유더의 뒤쪽에 서 있던 키시아르가 느른하게 손을 들어 끼어들었다.

“몬스터 처리는 제게 맡기고 여러분은 이동에만 신경을 쓰시면 됩니다.”

“당신은 아까 가장 많은 몬스터를 죽였던 그분이군요. 아직 나설 정도의 힘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힘은 충분합니다. 혹 증거가 필요하십니까?”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들은 마법사들이 일순 상황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야, 저 여유는……. 방금 전까지 그런 난리가 났었는데, 잠깐 놀러 다녀온 자처럼 굴기는.’

‘허세라기에는 아까 그렇게 날뛰었는데도 숨 하나 차 보이지 않고… 체액 하나 묻은 구석이 없어.’

‘대체 저런 실력자들이 마병단에 있다는 사실이 왜 여태 알려지지 않았을까.’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정신을 수습한 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즈, 증거는 됐어요. 그러면 당신들이 제안한 대로 할 테니, 곧장 움직이죠.”

“알겠습니다.”

일행은 대열을 정비했다. 유더와 로나가 맨 앞에, 그 뒤로 마법사들이 빈틈없이 뭉쳐 서고 그들을 보호하듯 마병단원들이 원을 그리는 대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맨 뒤에는 키시아르가 검을 뽑아 든 채 여유롭게 버티고 섰다.

유더는 출발 전 전투의 흔적이 널린 주변을 살피며 로나를 향해 질문을 했다.

“여러분의 목적지인 유적 거점이 이곳에서 아직 많이 멉니까? 직선거리로 바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을 때 말입니다.”

“멀지 않아요. 사실 몬스터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겠죠.”

“알겠습니다. 출발하죠.”

숲의 먼 어딘가를 바라본 로나가 이내 한쪽 방향을 짚어내며 고갯짓을 했다.

“거점은 저쪽 방향이에요. 멀리 보이는 저 흰 잎사귀 나무……. 어?”

“무슨 일입니까.”

심상치 않은 로나의 목소리에 반문하자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아요.”

“예?”

“서부 연합 마법사들이 거점을 어디서든 빨리 찾아올 수 있게끔 거점 근처 몇몇 나무의 위쪽 잎사귀 색을 마법사들만 특수한 방법을 써서 볼 수 있도록 바꾸어 두었었는데, 아까까지는 보였던 그게…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로나도, 유더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요.”

“세상에.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유더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로나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듯 새하얗게 질린 마법사들과 마병단원들을 향하여 손을 올렸다.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함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칸나.”

“응. 이쪽은 걱정하지 마. 잘 따라갈 테니까.”

패닉에 빠진 마법사들을 실수 없이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마병단원들이 정신을 더욱 잘 차려야만 했다. 칸나에게 그 일을 부탁한다는 뜻으로 말없이 시선을 교환한 뒤 유더는 로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시죠.”

***

서부 연합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대삼림 속의 거점은 그야말로 태풍이 쓸고 지나간 듯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수많은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마법진의 부서진 잔해가 곳곳에서 정신없이 깜박였고, 엉망으로 부서진 건물 아래 쓰러진 사람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거점으로 다가가기 위한 마지막 나무를 베어낸 유더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살피는 동안 로나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황급히 앞을 향해 뛰어나갔다.

“수장님! 수장님!”

“위험합니다.”

유더가 막기도 전에 뛰어나간 그녀의 앞에서 건물 사이에 웅크려 있던 몬스터 몇 마리가 날카롭게 고개를 쳐들었다.

“키아아아!”

그러나 몬스터들은 로나와 유더 쪽으로 다가오기도 전, 뒤에서 날아온 빛에 베여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 절명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조금 늦게 도착한 나머지 일행 속에 끼어 있던 키시아르의 힘이었다.

“아…….”

마법사들이 일제히 아연해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이게 대체…….”

“전부 다 무너진 건 아니야! 저쪽에, 아직 버티는 건물이 남아 있어!”

쓰러진 몬스터를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갔던 로나가 손을 뻗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유더는 그녀의 손이 가리킨 곳에 정말로 건물 하나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몬스터들이 그 주변을 감싸고 공격해 대고 있었지만 건물 주변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방어진이 간신히 그것을 막는 중이었다.

순간, 안에서 터져 나온 불꽃 하나가 몬스터의 머리를 터트려 쓰러뜨리는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겨우 안도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가자! 어서 도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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