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그의 앞에는 이미 쓰러진 몬스터 두어 마리의 시체가 나뒹구는 중이었다. 새로운 몬스터가 휘두르는 거대한 일격을 가느다란 검 한 자루로 막아내면서도 발 하나 뒤로 밀려나지 않는 모습이 여유롭다 못해 경이에 가까웠다.
유더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키시아르의 대각선 사각지대에서 또다시 생성되어 공간을 찢고 나타난 몬스터를 향하여 손을 내뻗었다.
‘어딜.’
나타나자마자 곧장 물렁해진 땅 아래로 머리까지 푹 꺼진 몬스터가 긴 팔을 내밀어 허우적대면서 새가 날갯짓하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거친 몸부림을 이기지 못한 주변 나무들이 또다시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져 넘어졌다.
“피해!”
여기저기서 몬스터 때문에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외침과 비명이 들려왔다. 그때쯤 맞부딪치고 있던 몬스터를 베어 죽이고 땅 속에 빠진 새로운 몬스터를 발견한 키시아르가 멈칫하며 유더를 돌아보았다.
“…….”
말은 오가지 않았으나 천 아래로 내보인 미소만으로도 의도는 충분히 느껴졌다. 유더는 곧장 땅에 빠진 몬스터를 향하여 검을 내지르는 키시아르를 뒤로 하고 주변을 계속해서 살폈다.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는 마법사들에게 달려간 엘더 남매가 그들을 안전한 뒤쪽으로 강제로 이동시키는 중이었고, 그렇게 이동한 마법사들을 마병단원들이 보호하며 근처에서 나타난 몬스터를 상대했다. 몇몇 용감한 마법사들은 남아서 서로 등을 맞대고 품에서 꺼낸 마도구로 몬스터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마도구만 쓰는 마법사들은 아마 속성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들일 테고… 그 사이에서 계속 준비 중인 이들이 속성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인가?’
동료들에게 보호받는 모습으로 가운데 서서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 마법사 두어 명의 손끝에서 마력이 희미하게 넘실거렸다. 그들 중 한 명이 한참의 고생 끝에 겨우 불꽃을 하나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며 유더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이런 숲에서 불꽃이라니. 압도할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자칫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데…….’
잠시 후 마법사가 힘겹게 만든 불꽃을 맞은 몬스터는 역시나 몸에 불만 붙었을 뿐, 죽지 않고 살아 분노로 날뛰었다.
“키이이익!”
“으아악! 나무에 불이 옮겨붙고 있어! 빨리 물과 바람의 마도구를 써!”
“뭐라고?”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 몬스터 때문에 불이 옮겨붙은 나무가 연기를 피우며 흔들대자 마법사들은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물이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해!”
불만은 아무리 힘이 센 핀과 힌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지 당혹한 기색이었다.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바람을 밟고 곧장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갑자기 허공을 밟고 나타난 유더를 보며 마법사들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곧장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바람을 불러내며 손을 위로 올렸다 내렸다. 그 움직임에 반응하여 허공에서 죽 끌어당겨지듯 생성된 물줄기가 순식간에 몬스터와 불붙은 나무들을 강타했다.
“키아아아!”
본래대로라면 바위도 단숨에 꿰뚫을 만한 힘이었으나 유더가 불러낸 물줄기는 몬스터의 몸에 닿자마자 불만 꺼트렸을 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약화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그리 놀랍지는 않은 광경이었다.
‘역시 내 힘으로 직접적인 타격은 거의 줄 수 없어.’
그것만은 이전 생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불은 곧바로 끌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끔찍한 비명과 타는 냄새, 연기가 범벅이 된 틈을 타 유더는 제 검을 뽑아들어 앞에 보이는 몬스터의 다리 부분을 강하게 베었다. 딱딱한 돌을 긁을 때와 같이 거친 감각과 함께 오랜만에 느끼는 강렬한 흥분이 손 안에서 훅 번졌다.
몬스터가 내지르는 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찢었다. 부상을 입은 몬스터는 벌레처럼 작은 적을 짓누르려는 듯 손을 휘저었으나 유더는 그 둔한 공격에 얌전히 맞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공격을 흘려보내며 맞은편 다리도 한 번 더 베어주자 곧 또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크아아아아!”
몬스터가 검은 체액을 흩뿌리며 휘청 옆으로 넘어갔다. 불에 타다 만 나무들이 또다시 대거 무너졌다. 쓰러져 버둥대는 몬스터의 숨통을 어떻게 끊을지 생각하는 동안 뒤에서 유더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유더!”
“괜찮아?”
마법사들을 뒤로 물린 엘더 남매가 연기를 뚫고 다람쥐처럼 빠르게 뛰어왔다. 유더는 그들의 말간 얼굴을 향해 빠르게 의사를 전달했다.
“난 괜찮아. 저놈의 마무리는 너희에게 맡길 테니 처리하고 마법사들을 마저 뒤로 보내 줘.”
“알겠어!”
확실히 뒤를 맡길 만한 동료가 있다는 건 편했다. 유더는 드디어 싸움을 허락받은 엘더 남매가 쓰러진 몬스터를 신나게 두들겨 패 저세상으로 보내는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연기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주변에서 계속해서 늘어나는 거대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이쪽 근처뿐만이 아니고 좀 떨어진 곳에서도 산발적으로 계속 발생중인 것 같아. 역시 아까 보았던 그 균열과 관련이 있나.’
재앙이 나타나기 전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던 기이한 균열. 그것이 사라진 뒤 갑자기 급속도로 발생 중인 몬스터들이 관련이 없으리라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아직까지는 상대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쓰러트리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은 게 걱정이군. 얼마나 더 나타날지 모르니 대충 서둘러 정리하고 어서 이동하는 쪽이…….’
그때, 유더의 머리 위쪽으로 번쩍 날아든 새파란 오러가 무언가를 꿰뚫고 사라졌다.
“크아아악!”
뒤이어 어린아이만 한 크기의 몬스터가 나무 위에서 두 동강이 난 채 떨어졌다. 사지에 달린 박쥐 날개 같은 피막이 제대로 펼쳐지지도 못한 모습을 보니 발생되자마자 죽은 듯했다.
“조심해야지.”
유더는 어느 새 근처에 다가와 있던 키시아르를 향하여 조금 낯선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키시아르가 손을 한 번 털어내자 검날의 끝을 타고 몬스터의 검은 체액이 뚝 떨어져 땅을 적셨다. 주변에 널린 대부분의 몬스터 사체가 그의 작품일 텐데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아서인지 그 모습이 유난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직까지 처리에 문제는 없지만, 몬스터들의 발생 속도가 기묘해. 이렇게 단시간에 대형 몬스터가 다량으로 발생하는 경우는 보고받은 적이 드문데 말이야.”
“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아까 사라진 그 균열도 마음에 걸리더군. 네 말대로 정말 균열과 이번 이상발생 사건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역시 키시아르도 주변을 파악하면서 유더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제 말을 가볍게 넘겨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자 또다시 가슴 속 어딘가가 크게 울렸다.
제 보좌가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모를 사내는 곳곳이 무너진 숲을 돌아보다 이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 한 자리에서 머무르다가는 포위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강행돌파하지.”
“방향을 안내해 주실 마법사 한 분만 정해지면 제가 나무를 베어 길을 뚫겠습니다.”
“그러면 앞을 막는 놈들은 내가 베어야겠군.”
“괜찮으시겠습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문득 모자 아래로 조금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걸 물어야 할 건 내 쪽인 것 같은데.”
“예?”
“몬스터에게 힘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걸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약점이 될 만한 사항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가?”
유더의 눈가가 순간 움찔 떨렸다. 이전 생에 지긋지긋하게 쌓은 경험을 통하여 약점이 드러나지 않게 싸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리 빨리 알아챘을 줄이야. 정작 유더를 대신하여 몇 번이나 몬스터에게 마지막 타격을 준 엘더 남매조차 아직 모르는 듯했던 부분을 키시아르가 단숨에 정확하게 알아내고 찔렀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그리 빨리 아셨습니까?”
“언제든 앞으로 나서는 걸 주저하지 않는 무모한 내 보좌가 몬스터에 한해서만 양보라는 걸 하고 있으니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는데, 아까 물을 사용할 때 보고 확신했어.”
“…….”
“확실히 약점을 미리 드러내어 좋을 일은 없지. 다른 이들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내게는 숲에 들어서기 전에라도 미리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유더의 등 뒤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직 다 걷히지 않은 연기 속에서 또다시 비명이 들려오며 무언가 묵직한 것이 갈라지고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나무들이 또다시 줄이어 무너지는 소음을 들으며 유더는 그가 그 공격 속에 이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불어넣었음을 깨달았다.
혹시 화가 난 것인가 싶어 살폈으나 두꺼운 모자 천 아래 가린 입매만으로는 역시 감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말씀대로 이런 부분은 미리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더는 일단 사과를 해 보았다.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애초에 입에 올릴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는 쪽이 더 맞겠지만, 키시아르에게는 어쩌면 일부러 그런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키시아르 쪽은 내게 미리 제 약점이 될 만한 부분들을 알려주었는데, 내 쪽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심을 느낀 것은 아니겠지.’
유더는 드물게 당혹하여 말을 덧붙였다.
“단장님을 불쾌하게 해 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번 임무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를 향하여 몸을 돌린 키시아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불쾌하지 않았어.”
나직이 울려 퍼지는 낮은 목소리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다만 너무 유능해도 문제라는 생각을 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