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찰나의 빛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짧고도 긴 침묵 속에서, 유더의 힘으로 끌어모은 나무토막들이 조각조각 갈라져 부서져 갔다. 그 뒤에 멈추어 서 있던 몬스터들 또한 돌처럼 굳어 있던 그대로 기이한 소리를 내며 두 토막이 나 스르르 미끄러졌다. 검은 체액이 치솟아 땅을 적심과 동시에 빽빽하게 우거져 있던 숲 전체가 비통한 울음을 울렸다.
뒤이어 몬스터들이 발생하며 꺾였던 나무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나무들이 동시에 부르르 떨다 쿵 쿵 소리를 내며 우르르 넘어가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더는 제 뺨을 스치는 나뭇가지 조각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 압도적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모든 것들이 사람들이 서 있는 방향과 반대로 쓰러지고 있는 중이라 이쪽 편이 다칠 염려는 없었다.
줄을 이어 쓰러지던 나무들이 겨우 멈추고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유더는 마지막 나무까지 모두 쓰러진 뒤 얼굴을 때리는 밝은 빛을 느끼고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나치게 울창한 숲이라 빛도 들지 않았었는데, 몬스터가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는 넓은 빈터가 생겨나자 그곳에만 막혔던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자아낸 결과라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모든 이들이 입을 열지 못했다.
유더는 너무나 깔끔하게 베여 위에 집을 몇 채는 세워도 될 듯한 빈터에서 고개를 돌려 키시아르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집어넣은 신검의 손잡이 부분을 아직 꽉 쥔 채 제가 만들어낸 광경을 고요히 지켜보고 있었다.
유더는 제가 이루어낸 결과가 아님에도 이토록 전신의 감각이 짜릿하게 곤두서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다. 제가 이러할진대 그간 억누르고 또 억눌렀을 힘을 발산한 키시아르 본인은 대체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모자 아래 가려 붉은 눈동자 안에 떠오른 감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어쩐지 아쉬워졌다.
“…괜찮으십니까?”
조용히 입을 열어 질문하자 키시아르가 그제야 유더 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금 움직였다. 천 아래로 무심히 다물려 있던 입술 끝이 스르르 위로 올라갔다.
“해가 드러나니 시원하군.”
알아서 어련히 조절하여 검을 휘두르리라 생각했으나 결과가 너무 엄청난 탓에 혹 예상보다 지나치게 힘을 발산한 건 아니었을까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었다.
“대, 대, 대체. 뭡니까, 방금?”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동안 뒤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와 주변을 감쌌다. 마병단원들은 갈무리된 놀라움과 경탄을 담은 얼굴로, 에제인 왕자는 굳은 표정으로, 그리고 마법사들은 충격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른 채 키시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각성자의 능력입니까? 아니면 혹시……?”
“소, 소드…….”
“소…….”
차마 이 대륙에 몇 명 되지 않는 소드마스터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는 마법사들을 향해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마병단입니다.”
‘검은 썼으나 아직은 정체를 밝히지 않겠다는 뜻인가.’
다소 중의적 뜻을 함축한 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마병단원들이 각자의 얼굴을 몰래 마주하는 사이 마법사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한 듯 겨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아… 아아. 그렇지요. 각성자 중에는 소드마스터의 오러처럼 보이는 힘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 2년 전쯤에 떠들썩했던 소문이 있었잖아. 열 살짜리 어린애가 나뭇가지로 바위를 갈랐다고…….”
“그랬지. 나도 기억나. 그땐 과장된 소문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아무래도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하하… 하…….”
마병단원들의 얼굴 위로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당시의 그 열 살짜리 어린애도 마병단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보일 수 있는 웃음이었다.
유더 또한 지금쯤 수도에서 열심히 훈련 중일 지미의 얼굴을 떠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미도 물론 재능 있고 강한 편이지. 하지만… 아마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 이런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거야.’
지미를 비롯하여 오러와 비슷한 능력을 내는 단원들이 몇 더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지닌 검 실력 자체는 아직 그리 대단하지 않았기에,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검술만으로 대련하면 유더에게도 지고는 했다.
그러나 방금 전 키시아르가 해낸 그 완벽한 발검은.
‘…….’
마병단에 들어온 뒤 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기는커녕, 손대는 것조차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검술은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는 신력이나 마법과는 달라서, 수련을 하지 않으면 손끝이 무뎌지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텐데, 방금 보았던 키시아르의 움직임은 그런 상식을 깨부술 듯 군더더기 하나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유더는 언젠가 키시아르의 손이 제게 닿았을 때, 언뜻 험한 일은 전혀 하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몹시 단단한 검사의 손이라는 생각을 스쳐 지나가듯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손을 유지하기 위해, 언젠가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하여도 제대로 쓸 수 있게끔 하기 위하여 대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노력을 했을까.
또다시 목덜미가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어. 아까 그 이상한 균열이 사라졌잖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몬스터를 공격하기 위해 꺼내 들었던 마도구를 주섬주섬 집어넣던 마법사 중 누군가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그의 외침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들은 정말로 방금 전까지 몬스터들의 근처에 떠 있던 균열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말이네.”
“어떻게 된 거지?”
“이제 더 싸울 필요 없겠네. 이 틈에 어서 가자!”
“유더. 저기 뭐가 있었어? 우린 뒤쪽에 있어서 아무것도 못 봤는데…….”
유더는 조심스레 묻는 가케인에게 균열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몬스터가 발생할 때 직전에 생기는 균열에 대해 알아?”
“으음. 들은 적은 있고 직접 본 적은 아직 없어.”
“그것과 비슷한 게 저 앞에 있었어.”
“아. 그러면 거기서 방금 저 몬스터들이 나온 거구나?”
가케인의 시선이 몬스터들을 단숨에 도륙한 키시아르 쪽으로 향했다. 그는 키시아르가 보인 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에제인이나 마법사들이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여긴 듯 이내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것과는 상관없어. 우리가 오기 전부터 있었던 거야. 마법사들은 그것을 그냥 넘어가야 할지, 돌아서 가야 할지를 두고 의견을 나누던 중이었고.”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건가……?”
“보기만 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어. 이번에는 사라졌으니 나중에 다시 알아봐야지.”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어렴풋이 느낀 듯, 주변에서 유더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단원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이제부터 걸음을 빨리해서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갈 겁니다! 얼른 따라오세요!”
그들은 허둥지둥 몬스터의 시체를 피해 앞서나가는 마법사들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놀라운 일 때문에 숲에 적응을 꽤 했는지 구역질을 일삼던 일행들도 잠자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얌전히 뒤를 따랐다.
유더는 다시 키시아르의 바로 뒤에 붙어 그의 망토에 감싸여 비죽 고개를 내민 신검의 검집 끄트머리를 슬쩍 살폈다. 지나치게 화려한 탓에 실전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검집을 다른 이들의 이목에서 감추기 위해 천을 감아 두었으나, 그래도 신검은 신검이었다. 키시아르가 주인이 된 뒤 이번 생에서는 처음으로 검집 밖으로 나와 보았을 그 검에서 여느 때보다 선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검의 기운을 보고 있나?”
“아… 네.”
키시아르의 질문에 들킨 기분을 느끼며 작게 대답하자 낮은 웃음이 모자 천 사이로 흘러나왔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검에 대한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이는 없는 것 같더군요.”
“겉보기에는 그저 쓸데없이 화려한 예장용 검일 테니까.”
두 사람만의 비밀을 공유하듯 작은 목소리로 키시아르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계속 그것만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야. 내게도, 이 녀석에게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거든. 예상보다 조절이 잘 안 되기는 했으니 한동안은 그것을 조정할 겸 앞에 자주 나서야겠지.”
“다른 단원들에게 설명을 해 주셔야 할 겁니다.”
“그래. 그것도 필요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키시아르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 손잡이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건 그렇고, 네게도 보일 만큼 이 녀석의 기운이 선명히 뻗친 건 오랜만이군. 처음이라고 너무 흥분한 모양이니 좀 진정시켜야겠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답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대답이 평소보다 늦자 묘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고개를 돌린 유더는 방금 전과 조금 다른 색채를 띠고 웃고 있는 붉은 입술을 마주했다.
일순 손끝이 조금 차가워졌다.
“……농담이시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대화를 하거나 움직이지는 않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살아있지는 않아.”
“그러면 뭐가…….”
“악! 또 몬스터가!”
그러면 대체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느냐고 묻기 전에 또다시 앞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유더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짧게 웃은 키시아르가 여유롭게 또다시 앞쪽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몬스터가 다수 출현할 듯하니 알아서 자신과 약자를 보호하며 전투에 임한다. 동료에게 기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도록. 나 또한 일행의 한 사람으로서 움직일 테니 전체적인 지휘는 이전에 말했듯 책임자들에게 부탁하지.”
그의 시선이 칸나와 유더에게로 향한 뒤 떨어져 나갔다. 검을 가볍게 뽑아 든 키시아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에서도 몬스터가 발생하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대부분은 아까 죽였던 몬스터와 같은 종류로 보였으나 간혹 다른 놈들도 보였다.
“드… 드디어 내가 진짜 몬스터를……. 어떡하지… 아직 속도 안 좋은데…….”
“겁먹지 마, 에문. 네 능력은 어둠이잖아! 일단 마법사들부터 데려와서 보호해 줘! 지나치게 겁먹은 기색이 읽히니 아무래도 저기 두면 안 되겠어. 가케인, 너도 부탁할게.”
“알겠어.”
“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왕……. 님께서는, 일단 검을 들어 주변을 경계해 주세요.”
긴장하여 떨고 있는 에문의 손목을 꽉 잡아 쥔 칸나가 그와 가케인, 그리고 에제인 왕자에게까지 망설임 없이 지휘를 했다. 유더는 신이 난 얼굴로 곧장 달려나가는 엘더 남매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힌, 핀.”
“응?”
“신난 건 알겠지만 지금 너희가 필요한 건 다른 부분이 먼저야.”
“…….”
“가케인과 에문을 도와 마법사들을 뒤쪽으로 전부 이동시킨 뒤에 전투에 참여해. 이 기회에 이동능력의 발전도 살펴야지.”
“…지금은 싸우는 게 더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어. 너희가 빨리 움직이면 마법사들을 뒤쪽에 전부 옮기고 나서도 몬스터는 아직 남아 있을 거야.”
“좋아. 알겠어…….”
조금 풀이 죽기는 했으나 그래도 엘더 남매는 언제나처럼 합을 맞추어 빠르게 움직였다. 유더는 그들의 빈틈 사이로 빠져나가 주변의 숲을 진동할 듯 괴성을 지르는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 키시아르의 뒤쪽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