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나누던 이야기를 멈추고 시선을 향하기가 무섭게, 키시아르가 뒤를 돌아보며 곧장 명령을 내렸다.
“유더. 마법사들을 보러 갈 테니 뒤따르도록. 나머지는 이곳에서 서로를 보호한다. 적응을 마치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이니 힌 엘더, 핀 엘더에게 경계를 맡기지.”
“알겠습니다!”
마법사들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뛰면 금방 닿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그래도 이 깊은 대삼림에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유더는 에제인을 단원들 사이에 둔 뒤 곧장 키시아르와 함께 마법사들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온 유더와 키시아르를 보고도 여전히 서로 큰 소리로 무어라 다투기에 바빴다.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자고! 이럴 시간에 이미 다 갔겠어!”
“미쳤어? 당연히 돌아가야지!”
“돌아갈 길이 어디 있어? 이 상황에!”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더가 끼어들어 묻자 로나가 고개를 돌려 찡그린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가 올 때까지는 없던 게 갑자기 저 앞에 생겨난 걸 발견했거든요. 그냥 지나가자는 쪽과 돌아서 가자는 쪽의 의견이 팽팽한 참이죠.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죠? 저게 무엇 같나요?”
그녀가 가리켜 보인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렸지만 보이는 것은 지금까지 지겹도록 본 나무뿐이었다. 그러나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정신을 집중하자 그 사이로 얼핏 다른 무언가가 인식되었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 누군가 엉망으로 그어둔 듯한 일그러진 검은 선들. 기묘한 균열의 틈새.
순간 유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건.’
그것은 얼핏 나무와 나무가 겹쳐지며 자연히 생겨난 길고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더의 눈에는 그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연기 같은 기운이 흐릿하게 보였다. 마치 허공에 금이라도 간 듯한 모습이었다.
‘설마… 아니, 역시 맞는 듯하군. 어떻게 저게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지.’
유더가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 속에서 바쁘게 생각을 전개하는 동안 곁에 서서 함께 그것을 살피던 키시아르가 이내 파악할 만큼은 모두 보았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 마법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공에 생긴 균열이라……. 몬스터가 발생하려는 흔적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나오고도 남았어야죠. 혹시나 싶어서 지켜보았지만 저 상태에서 변화가 없어요.”
“확실히 우려하실 만하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균열은 선처럼 가늘었지만 범위가 몹시 길게 펼쳐져 있었다. 평소라면 다른 길로 돌아가면 그만이었겠으나 지금은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마법사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가장 안전하다 파악된 길을 떠나고 싶지 않은 무리와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무리의 의견이 맞서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말없이 균열만 바라보고 있던 유더를 향하여 낮게 말을 걸었다.
“계속 살피고만 있군. 많이 놀랐나?”
“……예. 조금.”
다른 이들의 눈에는 놀라움의 감정 따위는 파편조차 보이지 않을 얼굴이었으나 키시아르에게는 역시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순순히 제가 놀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고 보면 너는 다른 이들과 종종 다른 걸 보기도 했었지. 뭔가 이상한 게 보이나?”
“아뇨. 다른 게 보인다기보다는…….”
유더가 답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자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반문했다.
“걸리는 점이 있다면 뭐든 좋아. 자유롭게 말해 보게.”
그의 앞에서는 무언가를 숨기기가 몹시 어려웠다. 유더는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균열에서 겨우 눈을 돌렸다. 이것을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야 겨우 답을 할 수 있었다.
“제게는 저것이… 단순히 불길해 보이는 정도를 넘어, 마치 어떤… 재앙의 시작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 재앙의 시작점. 유더는 제가 내뱉은 말이 저 균열에 붙일 이름으로 썩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 틈새의 정체를 단 한 가지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간대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미래의 일. 재앙과 관련된 현상이었다.
“몹시 시적인 비유처럼 들리는데.”
삭막했던 평소와 다른 추상적인 비유가 재미있다고 여긴 듯 키시아르가 작게 웃음을 흘렸으나 유더는 마주 웃지 않았다. 시적인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저 불길한 균열은 말하자면 신호 같은 것이었다.
이전 생에서 전 대륙을 강타한 재앙들 중 자연재해에 가까운 현상은 대개 저러한 균열이 발견된 뒤 시작되고는 했다. 유더는 첫 번째 재앙으로 기록된 대지진의 시작 지점이 된 제국 남부에서, 이상기후를 일으켰던 지역들의 하늘에서, 대규모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직전의 땅에서 저 비슷한 균열을 목격했다는 이들을 직접 만났다. 심지어 한 번은 직접 보기도 했다.
그때 기억에 남은 균열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것은 놀랄 만큼 일치했다.
“…….”
과거의 기억들이 유더의 안에서 불길하게 소용돌이쳤다. 저것을 시작으로 닥쳐왔던 일들과 홀로 답을 찾아 헤매던 시간들이, 그리고 끝내 사형대 아래 섰던 순간이 그의 머릿속을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유더의 눈동자가 어두워진 순간, 키시아르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꽤 어울리는 이름 같군그래. 재앙의 시작점이라… 어쩌면 저 이상한 균열이 요즘 일어나고 있는 서부 지역의 지나치게 빠른 몬스터 발생 사건들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순간 유더의 머릿속에서 몰아치던 어두운 기억이 일시에 끊겼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까지 불길하게 느꼈다니 정말로 좋은 현상 같지는 않아 보이고, 그럭저럭 괜찮은 가설 아닌가.”
유더는 제 주장을 들을 때마다 각자의 사정을 들어 외면하던 귀족들을, 힘을 가진 이들을, 그리고 군주들을 떠올렸다.
‘모든 걸 너무 위험하게만 생각하는 가정 아닌가. 설마 멸망론 따윌 이야기하려는 건 아닐 테고.’
‘그런 이야긴 되었어. 혼자 조사하게. 대륙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떠들었다더니, 대륙의 제일가는 각성자라 떠받들어지니 이젠 아예 선지자라도 되려는 건가?’
‘자네 정말 미쳤군. 이리 중요한 시기에, 황제 폐하께 반발하는 놈들을 처분하는 중요한 임무를 내팽개치고 떠나? 제정신인가 유드레인 단장? 그까짓 징조가 어쩌고, 재앙이 어쩌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건 그저 몬스터 놈들이 나오기 직전의 현상에 불과해!’
보통 몬스터가 발생할 때에도 저 비슷한 균열을 찢고 나오고는 했으나, 그것은 마법사들의 말마따나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저렇게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공간에 존재하고만 있는 건 재앙이 닥치기 직전에만 발견되었던 현상이었다.
그 비밀을 풀고자 하는 유더 아일을 많은 이들이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가 선지자 역할을 하며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라 속살댔다.
단 한 명, 그때는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서 묘하게도 따뜻한 기색으로 그를 보고 있는 사내를 제외하고는.
“표정이 어쩐지 이상한데. 이번엔 또 왜 그러지? 뭔가 더 이상한 거라도 느껴지나?”
“아뇨…….”
유더는 키시아르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느낀 기분만은 결코 밖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심호흡 끝에 겨우 숨이 가라앉았다.
‘저 균열에 대해서나 생각하자.’
이전 생에서 서부 토벌에 왔을 때 이런 균열을 목격했다는 이를 만난 적은 물론 없었다. 그가 활동했던 몇 번의 토벌은 이 대삼림 내부가 아니라 이미 제국 안쪽까지 파고들어온 대규모 몬스터를 죽이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때도 이런 현상이 이미 나타났었다면, 이 대륙에 재앙이 시작된 건 어쩌면 유더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이전이었을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정말 키시아르의 말대로 서부의 몬스터 이상발생 자체가 이미 첫 번째 재앙이었던 걸지도 모르지.’
키시아르는 그저 해 본 가설이라 말했으나 유더에게는 그 말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전율 속에서 어떠한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곧장 키시아르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말씀하신 가설 말씀입니다만.”
“음?”
“제 생각에도 가능성이 있다 여겨지니 자세히 조사해 보는 쪽이 좋겠습니다.”
“그래? 칸나를 불러와야겠군.”
“아뇨. 위험할 수 있으니 제가…….”
“너는 안 위험하고?”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진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직까지도 의견을 나누던 마법사들과 멀찍이 떨어져 이곳의 기색을 살피던 마병단원들이 모두 한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번엔 고민의 여지도 없이 진짜 몬스터군.”
키시아르가 중얼거리자마자 균열의 반대편에서 나무들이 흔들대다 우지직 소리를 내며 꺾여 갔다. 서로 부딪치고 깨지며 줄줄이 무너져 쓰러지는 나무들 때문에 숲 전체가 비명을 울렸다.
“몬스터다! 조심해!”
수만 마리 새 떼가 한번에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 빈틈 사이로 방금 전까지는 없던 새카만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두 배쯤은 되어 보이는 키를 지니고 두 발로 휘청휘청 걷는 막대기 같은 생김새가 기괴했다. 전신에 붙어 있는 비늘 같은 것이 떨릴 때마다 소름 끼치는 날갯짓 소리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살아 움직이고는 있지만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과도 다른 생김새를 지닌 이질적인 존재. 그것이 바로 몬스터였다.
“크, 크다. 도감에서 본 놈 같은데… 이, 이름이 뭐였지?”
‘마레이돈.’
유더는 제 근처에서 더듬대며 뒤로 물러나는 어느 마법사에게 마음속으로 대답해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시아르가 여유롭게 망토 사이로 드러난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으로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걸 쓰려고 온 거니까.”
“지원하겠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그들이 답답했는지, 로나가 고함을 질렀다.
“뒤로 좀 물러나세요! 몬스터는 저희가 가져온 도구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으니 여러분이야말로 좀 더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뭐라구요?”
“곧 끝날 겁니다.”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온 호신용 마도구를 꺼낸 마법사들의 마음이 초조하게 타들어갔으나, 그들은 그것을 쓸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몬스터의 배 부근에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짐과 동시에 유더는 근처에 널려 있던 부서진 나무들을 바람과 땅의 힘으로 움직여 끌어당겼다.
놈들이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나무에 반응해 체액을 내뿜으려다 말고 멈칫한 짧은 순간.
여태껏 누구도 존재를 알지 못했던 소드마스터가 모든 이의 앞에서 처음으로 검을 발도하여 오러를 날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