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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55화 (255/805)

255화

나단의 명에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펠레타 기사들이 곧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떠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 안에서 그 기척을 모두 듣고 있던 두 시종 또한 복잡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에릴의 암살자들이라니…. 3왕자 측에서 완전히 에제인 왕자님을 죽이려 드는 모양이군. 대체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배신을 해 놓고 스스로의 안위는 걱정되는 모양이네, 젠.”

“내가 내 걱정도 못 해? 빌어먹을. 왕자님이 넬라른으로 돌아가시든, 못 돌아가시든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단 말이야.”

“죽으면 죗값을 치른 셈 쳐야지. 그게 두려운 놈이 잘도 배신을 했구나.”

“뭐라고, 이 듀번의 첩자 놈아? 그게 네놈이 할 말이야? 너야말로 우리 중 왕자님을 가장 크게 배신한 주제에……!”

“그래서 나는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잖아. 뭐가 문제야?”

멜번의 차가운 독설에 벌컥 화를 낸 젠이 분노에 가득한 눈빛으로 숨을 씨근거렸다. 마차에 갇힌 뒤 처음으로 단둘이 나누는 대화였으나 그 어디에도 동료다운 온기 따위는 없었다.

“난 전부터 멜번 네놈이 제일 마음에 안 들었었어. 늘 혼자만 왕자님을 다 모시는 척 나대던 네놈이 그리 속이 검은 줄 대체 누가 알았겠어? 너만 아니었어도 나까지 이렇게 내쳐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때 안쪽에서 시끄러워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마차 밖에서 누군가 문을 쿵 두드렸다. 두 시종은 다시 입을 얌전히 다물었지만 젠의 눈빛은 여전히 살기를 죽이지 않고 제 살 길을 찾아 허공을 헤매었다.

‘나는 억울해. 그 정도 죄는 밝혀져도 본래 절대 사형당할 만큼 무거운 죄가 아니었어.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라고? 아니, 이대로는 억울해서라도 못 죽지. 보아하니 어차피 에제인 왕자가 넬라른 땅을 밟기는 그른 듯하니 기회를 봐서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고 말 거다.’

서로 다른 생각을 담은 이들을 실은 채 마차는 이전까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길을 달려나갔다.

***

사라인 대삼림의 경계를 넘어선 순간부터, 일행은 모두 주변을 감싼 공기의 변화를 느꼈다. 사람이 걸을 만한 길조차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성하게 우거진 거대한 나무들 사이를 거니는 것은 생각보다 몹시 피로한 일이었다.

하늘을 모두 가릴 만큼 울창하게 자라 뒤엉킨 나무와 덤불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부터 우선 큰일이었고, 그보다 더한 문제는 들이마시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짙게 농축된 풀냄새였다.

천 년 가까이 아무도 관리하지 못한 숲이 내뿜는 향은 그야말로 냄새로 이루어진 늪과 같았다. 어릴 적부터 깊은 숲에서 살아온 데다 이 일을 두 번 겪어보는 유더나 야성적인 본능이 유난히 강한 엘더 남매, 그리고 몇 년을 이곳에서 악착같이 버티며 연구했다는 마법사들은 별다른 내색 없이 무시하고 나아갈 수 있었으나 처음 와 보는 사람들은 삼림 내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머리가 멍해……. 식물 냄새라는 건 다 좋은 것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구나…….”

멀찍이서 앞서 나가는 마법사들을 따라 걷던 칸나가 코와 입을 가린 천을 꽉 붙잡은 채 중얼거리자 가케인이 그에 동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래… 오기 전에 마법사 분들이 설명을 해 주셨는데도 현실이 더하네. 말이라도 타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좀 덜했을 텐데.”

아무리 안개질풍마라 해도 사람 한 명 다니기조차 힘든 대삼림에서는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출발하기 직전 키시아르의 명으로 본래 방문하려 했던 숙소에 맡기고 온 말들이 그리웠는지 가케인의 눈빛이 조금 아련하게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몬스터가 나타나면 제대로 움직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너무 어지러워.”

“천으로 코와 입을 더 꽉 막으시고… 몸이 너무 안 좋으시면 말씀하세요……. 신성력을 부으면 조금 나아지실… 우욱.”

일행 중 가장 다 죽어가는 상태인 루산이 노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다 말고 나무를 짚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축 처져 걷고 있던 에문도 덩달아 구역질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제인데 자꾸 이래서야…….”

“힘드시면 제 그림자에게 업혀서 가셔도 됩니다. 사제님의 건강이 저희 모두의 건강인걸요.”

“아뇨, 그래도 그럴 수는 없죠……. 말씀만은 정말 감사합니다.”

동료애란 역시 힘들 때 가장 늘어나는 법이었다. 유더는 힘겹게 발을 움직이는 동료들을 지켜보다 모자를 눌러 쓴 채 앞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키시아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괜찮으십니까?”

“괜찮고말고. 처음과 똑같이, 놀랄 만큼 아무렇지도 않아.”

혹 거짓일까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대삼림에 들어선 지 꽤 되었음에도 키시아르의 걸음에는 변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가볍게 걷고 있던 사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 아래로 미소를 지으며 유더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너는?”

혹 마법사들이 들을까 싶어 단장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 상황에서 너라고 불리는 것은 기분을 평소보다 조금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유더는 움찔 반응했던 손끝을 숨기듯 주먹을 쥐고 고개를 저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산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적응이 빠른 듯합니다.”

“다행이군. …아니, 생각해 보니 아쉽다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말을 바꾸는 이유가 뭔가 싶었으나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힘들다고 하면 업어서 데려가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

그 어떤 상황에서도 키시아르는 역시 키시아르였다. 여유롭다 못해 평소보다 더한 농을 일삼는 모습이 마치 놀러 나온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 유더는 주변을 둘러본 뒤 그 엄청난 말을 남들이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곧장 고개를 저었다.

“혹시 적응이 힘들었더라도 제가 그런 수고를 끼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품에 안겨서 갔던 적도 있었으면서 왜 그러나, 새삼.”

이번에는 정말로 다른 이들이 들어서는 안 될 소리였다. 유더는 그 말에 대응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본 뒤 목소리를 조금 크게 하여 화제를 돌렸다.

“…말씀대로 괜찮아 보이시니 정말로 다행이군요. 그러면 저는 이만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혹 불편하신 부분이 생기시거나,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면 곧장 말씀해 주십시오.”

아예 상대하지 않고 물러나기로 한 뜻을 알아차렸는지 키시아르가 조금 더 크게 입술 끝을 올렸다. 유더는 그대로 걸음을 늦추어 일행들을 조금 비켜 걷고 있던 에제인 왕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키시아르와는 또 다른 의미로 유더가 신경을 써야 할 상대였다.

“괜찮으십니까?”

“……전에도 와본 적이 있어. 그 덕에 버티는 요령을 배웠지.”

눌러쓴 모자 아래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견딜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여기로 올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야.”

다행한 말이지만 아주 안심되지는 않았다. 유더가 제 기색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에제인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저분께서는 괜찮으시다던가?”

그가 언급한 이는 당연히도 키시아르였다.

“네.”

“정말 대단하시군. 내내 몸이 좋지 않아 북부에서만 지내다 몇 년 전부터야 겨우 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들었는데… 모든 것이 소문과는 전혀 달라.”

쓴웃음을 띤 목소리의 끝이 메마르게 갈라졌다. 유더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에제인 또한 딱히 답을 바라지는 않았던 듯 침묵을 지켰다.

앞에서 또다시 루산이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쯤, 젊은 왕자가 다시 목소리를 내어 말을 걸었다.

“…늘 앞에 서시는가?”

“예?”

“저분 말이야. 당신이 보라고 하기에 지켜보고 있었어.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을 두고 매번 가장 앞에 선다는 건 알겠더군. 말을 탔을 때에는 길잡이가 필요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왜 가장 위험한 곳에 서시는 거지?”

“그건…….”

유더는 에제인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키시아르는 언제나 일행의 거의 맨 앞에 있었다. 나단이 길잡이 역을 하고 있었을 때도 그의 자리는 바로 그 뒤였고, 충직한 부관이 사라진 후부터는 누구에게도 제 앞에 서는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보통 높은 이들일수록 모든 곳을 볼 수 있는 뒷자리나 안전한 중간을 선호하기에 에제인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다만, 그게 키시아르가 아니라면 그렇지.’

키시아르가 딱히 명을 내리지 않아도 모든 이들은 그가 서는 위치에 따라 각자의 자리를 찾았다. 그가 맨 앞에 서든, 뒤에 서든 단원들은 자연스레 그가 서는 곳이 그의 자리라 생각했다.

키시아르가 여태껏 보여준 모습들이 그의 뜻을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 어디에 서시든 위험하실 일이 없으시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험할 일이 없다고? 그분을 지키기 위해 온 게 당신들의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위험한 자리에 서시는 일을 막아야지.”

“…글쎄요.”

“힘 때문에 따르는 게 아니라면서, 이것도 보다 보면 알게 되는 건가?”

힘에 의거한 믿음과 여태까지 보아 온 모습에 의한 믿음은 조금 다르다.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유더가 답을 고르며 망설이는 동안, 갑자기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앞서가던 마법사들이 무어라 소리를 치고 있었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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