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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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단! 그게 공작님께서 남기고 가신 이번 표식인가?”
펠레타 기사의 질문에 눈을 든 나단 주커만은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접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이사항은 이번에도 없고?”
“속도를 조금 줄여서 따라오라고 하시는군.”
“속도를?”
얼굴에 험상궂은 칼자국이 난 기사가 뺨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만날 시기를 예정보다 늦추려 하시려는 뜻인가? 혹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겠지.”
“…….”
나단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접은 쪽지를 입에 넣어 그대로 삼켰다.
“아, 물론 그랬다면 네가 이렇게 침착할 리 없겠군. 하하핫. 나도 참, 별 걱정을.”
동료가 웃어도 마주 웃지 않는 나단의 태도가 다소 삭막하게 느껴질 만도 했으나 그의 그런 모습에 익숙한 기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차 안에 있는 이들의 상태는?”
쪽지를 모두 처분하고 난 뒤 던진 나단의 질문에 기사가 머리를 돌려 뒤쪽에 세워 둔 허름한 짐마차를 흘긋 보았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듯 조용했으나 그 안에는 에제인 왕자의 시종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상태였다.
“여전해. 서로 싸우지도 않고 대화도 안 하고… 조용하기 그지없지. 정말 다 포기한 것만 같아.”
“그렇다 해도 언제든 태도를 바꿔 도망을 시도할 수 있으니 경계를 늦춰서는 안 돼. 곧 대삼림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더더욱.”
“알아. 그래도 놈들이 너보다 강할 리는 없을 테니 뭐.”
나단 주커만이 숨겨진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펠레타 기사가 씩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런데 말이야 나단. 너는 마병단 쪽 사람들에게만 주군을 모시도록 한 게 정말 전혀 걱정되지 않는 거냐?”
제 어깨에 두른 손을 밀어 치우던 나단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담긴 차가운 기색을 깨달은 기사가 제 뜻을 의심하지 말라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작님의 판단을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야. 주군께서 그리 하시기로 했다면 그게 당연히 옳은 거지. 다만 아직 누군지 잘 모르는 이들이 정말 그분을 잘 모실 수 있을지 불안하지 않느냐는 뜻이었어.”
‘모신다.’
나단 주커만의 머릿속에 문득 상대방이 뱉은 한 가지 단어가 크게 떠올랐다. 지금은 펠레타 기사단의 가장 큰 전력이자 자유인의 신분을 지닌 그이나, 한때는 가장 낮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을 닦기 위해 사는 생활이 더 익숙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모신다는 말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포함될 수 있는지도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더 잘 알았다.
키시아르는 그를 둘러싼 특수한 환경과 비밀 탓에 주변에 둔 이들을 믿는 것과 별개로,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교묘하고 두터운 벽을 겹겹이 둘러 감추는 다소 복잡한 성정을 지닌 존재였다. 그가 마음을 열고 속내의 찰나라도 드러내 보이는 존재는 나단을 비롯하여 몇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펠레타 기사들도, 마병단원들도 모두 비슷한 무게를 지닌 존재일 뿐이라 누가 더 익숙하고 편한지 따위를 가리지는 않을 터였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나단 주커만의 머릿속에서 검은 머리칼에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구도 비추지 않은 새벽처럼 고요하고 차가우면서도 어느 때에는 생사의 갈림길을 몇백 번쯤은 헤치고 온 노병마냥 닳아 해진 눈빛을 하는 기묘한 남자. 바로 유더 아일이었다.
유더 아일에 대한 키시아르의 태도는 다소 특별했다. 너무 특별해서 가끔은 나단조차도 주군의 생각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적어도 나단은 그가 타인을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고 끈질기게 신경 쓰는 모습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나단은 주군이 그에게 대체 어떠한 의미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다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그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아차렸다.
그 두 사람에게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이 닮았는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분명 생김새도, 성격도, 신분도, 살아온 궤적도, 나이대조차도 모두 다른 타인임에도 본질적으로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다 말한들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단 본인조차도 자신이 대체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가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단순한 착각이라 여기기에 그 기시감의 무게는 때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하게 가슴을 두드리고는 했다.
‘그래. 이를테면…….’
만약 서로 다른 길에 흩어져 있을 때에도 저와 같은 답을 내놓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시작과 과정은 다르더라도 결국에는 같은 답을 낼 수 있는 존재.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강렬한 동질감, 혹은 그보다 더한 어떤 것. 나단이 그들에게 느낀 ‘닮음’은 말하자면 그런 쪽에 가까웠다.
나단은 키시아르가 유더 아일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도, 그리고 그를 유달리 아끼며 함께 있을 때 진심으로 즐거워한 이유도 아마 그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들의 주군을 모시기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는 바로 유더 아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펠레타 기사들은 그게 어떤 뜻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키시아르를 시종으로서 모셨던 나단에게 그 의미는 몹시 남달랐다.
“우리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한 명만 거기에 있다면 충분해.”
“한 명? 그게 누군데?”
기사가 궁금해하며 물었으나 나단은 답해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말해주지 못할 이유라도 있어? 진짜 누군데?”
“…안전가옥의 뒷정리를 맡겼던 대기조가 오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준비해.”
“어?”
펠레타 기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육안으로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부터 희미하게 먼지구름 비슷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말을 달려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들의 동료들이 숨을 헐떡이며 나단의 앞에서 뛰어내렸다.
“나단. 안전가옥에 침입자가 있었어.”
“침입자?”
“그래. 보통 능숙해 보이는 놈들이 아니더라고. 총 다섯 놈이었는데, 두 놈은 들어오자마자 우리와 싸우고 나머지 세 놈은 사이를 틈타 망설임 없이 내부를 뒤지더니, 뒷마당에 가매장해 둔 시종의 시신을 파헤치고는 그대로 떠났어.”
“그게 무슨 소리야? 시체를 파헤치고 떠났다고?”
나단의 옆에 있던 칼자국이 난 기사가 기겁하여 묻자 지친 얼굴을 한 기사가 ‘그렇다니까.’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확인해 보니 죽은 놈에게 추적을 위한 도구를 붙여두었던 모양이야. 그것만 회수하고 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너무 순식간에 사라진 탓에 확인하지 못했어. 미안해.”
기사의 보고를 들은 나단 주커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도구? 시체를 묻을 때 소지하고 있던 물건은 모두 확인하지 않았었나?”
“확인했어. 수상한 건 없었어. 마도구 같은 것도 없었고.”
칼자국이 난 기사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단이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을 썼겠군. 확인해 봐야겠어.”
“누구에게?”
“이번 상대가 노리는 건 넬라른의 왕자일 테니, 거기서 온 이들에게 물어봐야겠지. 그래서, 우리 측 부상자 상황은?”
곧바로 다음 상황을 확인하는 나단에게 새로 온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보고를 했다.
“베디와 쟝이 칼에 베여 조금 다쳤어. 그 외에는 그래도 멀쩡해.”
“알겠다. 다친 이들은 곧장 치료부터 해.”
“알겠어.”
나단은 곧장 나머지 기사들을 이끌고 짐마차 쪽으로 향했다. 그가 빠르게 문을 열어젖히자 찌푸린 눈을 크게 뜬 시종 두 사람이 그를 마주 보았다.
“당신들의 죽은 동료를 추적하여 뒤따라온 새로운 암살자들이 떠나온 안전가옥에서 발견되었다. 추적을 위해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도구를 사용했다가 회수해 간 듯한데, 그런 방식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더 잘 알겠지. 혹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무, 무슨 말입니까 그게? 죽은 페이티를 따라온 암살자라니…….”
“…아마 훈련받은 사람만 맡을 수 있는 특수한 향을 묻힌 도구를 소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젠이라는 이름의 시종이 놀라 반문하는 사이 멜번이 초췌한 얼굴로 즉각 빠르게 대꾸했다.
“왕자님의 가장 큰 적인 3왕자님의 모친이 되시는 3왕비께서는 에릴의 공주 출신이십니다. 그곳 출신의 암살자들이 그런 기술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특수한 향과 도구라……. 땅에 묻힌 시체도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인가?”
“한 번 묻힌 향이 사라지려면 며칠이 걸린다고 하니 가능하겠지요.”
“그들이 곧장 안전가옥을 떠나갔으니 아마 2왕자님을 추적하기 위해 떠났으리라 추정되는데, 2왕자께도 그런 도구가 붙어있을 여지가 있나?”
“……그건.”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던 멜번이 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하나 있습니다. 페이티가 며칠 전 왕자님께 드린 물건이…….”
“그게 뭐지?”
“머리끈입니다. 왕자님께서 돌아가신 2왕비님께 물려받아 늘 소지하시는 머리끈이 있습니다. 제국에서 급히 떠나느라 짐을 싸는 과정에서 그것을 잃어버리셨었는데, 며칠 뒤 페이티가 자신의 짐에 섞여 있었다며 다시 되돌려드렸습니다. 바로 얼마 전 일입니다.”
“그거라면 나도 기억이 나.”
젠이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설마 페이티 그놈이 그렇게까지…….”
“글쎄. 너도 그렇게까지 했으니 페이티라고 못 할 것도 없겠지.”
“뭐, 뭐라고 멜번? 네놈은 또 어떻고……!”
“조용히.”
나단 주커만이 내뿜은 소드마스터의 예리한 살기를 맞은 두 시종은 몸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 나단은 짐마차 문을 닫고 돌아서서 펠레타 기사단을 향하여 짤막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변했으니 이전의 지시는 폐기하고 곧장 빠른 경로로 이동한다. 나는 지금 바로 전서조를 보낼 테니 나머지는 준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