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저희가 바로 그 마병단입니다.”
공간을 메운 침묵 속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각자의 놀라움을 담고 크게 소용돌이쳤다. 유더는 흘긋 고개를 돌려 키시아르의 기색을 짧게 확인했다. 마법사들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모두 파악했고, 더 알아볼 전후사정은 없어 보이는 지금이 본래 키시아르가 지시했던 대로 정체를 밝히기 적절한 순간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눌러쓴 모자 너머로 유더를 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유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던 양 매끄러운 태도에서 그 또한 지금이 나설 때라 판단하고 있었음이 느껴졌다. 유더는 묘하게 시선을 떼기 힘든 그 입술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돌리고 다시 마법사들을 마주했다.
“…정, 정말로 당신들이 마병단이라고요?”
한참 만에야 겨우 충격을 조금 가라앉힌 듯한 로나가 어렵사리 물었다.
“그러면 설마 처음부터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접근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그들이 마법사라는 건 처음 보자마자 옷차림을 통해 짐작하였으나, 도움을 준 건 무언가를 계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제 루산이 보여준 능력과 따뜻한 호의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음은 마법사들 또한 부정할 수 없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희는 방금 전까지 여러분께서 마병단에 그런 오해를 하고 계신 줄조차 몰랐습니다. 대삼림의 상황을 들으려던 게 아니었다면 도움만 드리고 곧장 각자가 갈 길로 다시 떠났겠지요.”
“…….”
마법사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싶었으나 유더의 고요하고 침착한 모습에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사람이 정말 그… 마병단이라고?’
그들이 그동안 막연히 생각해 왔던 마병단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유더의 뒤에 선 일행들 또한 분명 마병단을 향한 욕설들을 들었을 텐데도 누구 하나 화를 내지 않으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구성이 특이하고 다양해 보이는 일행들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기사단과 용병이라 말했을 때 크게 의심하지 않고 믿은 이유는 충분히 예의와 사리분별을 아는 이들이라 느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가 평민으로 이루어져 사납고 천박하기 그지없다던 마병단의 기존 소문과 어울려 보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나는 못 믿겠어요. 당신들이 정말 마병단이란 걸 어떻게 믿죠?”
“이렇게 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유더는 날카롭게 반문한 한 마법사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잠시 후 그의 손 위로 가느다란 선처럼 흘러나온 불과 물이 나선형으로 얽히며 위로 쭉 올라가자 마법사 여러 명이 동시에 기겁하여 헛숨을 삼켰다.
“아니……. 속성을 동시에 두 개…?”
“맙소사.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렇게 젊은데…….”
두 개의 속성을 저토록 쉽게 사용하는 모습이야말로 유더가 각성자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은 더 이상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호의가 반쯤 사그라든 자리에 경계와 허탈함, 질시 등이 들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유더는 능력을 거두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나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보여드리는 이유는 이미 불필요한 오해를 샀다는 걸 알게 된 상황에서 저희가 여러분을 기만했다는 새로운 오해를 더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까 대삼림 내의 거점까지 함께 가 주시겠다는 감사한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만… 그 제안은 아직 유효하십니까?”
로나의 근처에 있던 마법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로나 또한 곧장 답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듯 침묵을 지키다 반문을 던졌다.
“정말로… 여러분이 마병단이고, 모든 게 저희의 오해라면 대체 왜 이곳까지 오신 거죠?”
“말씀드렸듯이 임무 때문입니다.”
“무슨 임무 말인가요.”
“자세한 사항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몬스터 토벌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비밀 임무라는 말로만 답하려 했던 유더의 말을 끊고 칸나가 별안간 옆에서 끼어들었다.
‘…칸나?’
칸나가 유더를 향해 짧게 눈을 깜박이며 손가락을 살짝 흔들었다. 그녀가 전달하려 하는 의사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웠으나 그녀의 손끝에 슬며시 닿아 있는 누군가의 빈 의자를 보니 대충 짐작은 되었다.
‘그사이 뭔가 읽어냈나 보군.’
정보를 읽는 능력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답이라면 그쪽이 정답이리라. 애초에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유더는 칸나의 말에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네. 맞습니다. 토벌과 관련된 사전탐사 임무입니다.”
“그러면 역시 타인 가나 빌름 남작과 관련된 게…….”
“타인 가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연락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만, 마병단은 공식적으로 그 일을 거절했습니다.”
“네? 방금 토벌과 관련된 임무로 왔다고 하셨잖아요.”
“타인 가와는 엮이지 않되, 서부의 심상치 않은 상황은 제대로 파악하고 도움을 드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유더는 거기까지 말한 뒤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며 어깨를 펴고 턱을 당겼다. 저 의심 많은 마법사들에게 마병단의 인식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행동해야 했다.
“마병단은 제국을 위하여 움직일 뿐, 어느 한 가문만의 이해득실을 위하여 움직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와 마주한 마법사들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꿀꺽 울렸다. 처음에는 외모가 화려한 동료에 비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여겼던 저 젊은 청년에게서 이상하게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자존심과 위압감의 정체를 대체 무엇이라 생각해야 좋단 말인가?
창백한 얼굴과 어두운 눈동자가 끝을 알 수 없는 밤하늘처럼 사람을 끌어당겼다. 가슴 속 밑바닥을 건드리는 기이한 두려움의 뒷면은 매혹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뭐야, 마치 수장님이라도 마주 대하고 있는 것 같은 이 기분은…….’
‘그냥 좀 음침해 보인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저런 얼굴이었나?’
‘대체 몇 살이지? 실제로는 그리 어리지 않은 건가? 아니면…….’
제각기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겨우 정신을 수습한 로나가 어렵사리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일단 말씀은 알겠어요.”
“믿어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진위를 지금 당장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로나!”
“마병단이 정말로 토벌을 위해 타인 가와 상관없이 제국을 위하여 단독으로 나선 것뿐이라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적대할 이유가 없어.”
동료 마법사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로나가 빠르게 대꾸했다.
“오늘 일어난 몬스터 사건이 오늘로 끝이라면 모를까, 올해는 우리만으로 대삼림을 정리하기 힘들 거란 건 다들 예상했잖아. 그리고 이렇든 저렇든 결국 저분들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신 건 사실이야.”
“그건…….”
“나도 물론 단숨에 전부 믿기는 어려워. 하지만 마법사라면 일어난 현상에 기초해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그렇게 하려는 것뿐이야.”
“그래.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마법사들의 얼굴에 상반된 감정이 들어찼다. 그들을 적대시하지 않는 현실의 마병단원들과 그간 미워했던 가상의 마병단에 대한 인식 사이에서 각자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마구 흔들대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린 듯이, 유더의 등 뒤에서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저희와 함께 삼림에 가 주시겠다는 제안 때문에 고민이 되시는 모양이군요. 저희는 오해가 풀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니, 굳이 그 제안을 지키실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 요소를 피해 뒤로 물러나는 건 집단을 위한 현명한 판단이니 말입니다.”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먼저 제안해 놓고 겁을 내어 피하려 한다는 뜻입니까?”
“저희는 그런 이유로 고민하던 게 아닙니다!”
정곡을 찔린 이들이 단숨에 반발하며 나섰다. 고민하던 다른 마법사들도 순식간에 여기서 물러서서는 그들이 은인을 욕하고 먼저 제안한 사안마저 거절해 버리는 이들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묘한 표정이 되었다.
‘과연, 말 한 마디만으로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저만한 이가 없군……. 그러면 이제 이걸 꺼내도 되겠지.’
유더는 내심 감탄하며 마법사들의 결정에 쐐기를 박을 마지막 수단을 품속에서 꺼냈다.
“방금 들으신 대로 저희는 함께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혹시 이 편지를 여러분의 수장이신 미칼린 펀트 님께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게 뭐죠?”
로나가 유더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며 반문했다.
“서부 마법사 연합과 수장님에 대해 제게 말씀해 주셨던 마법사님께서 전해 달라 건네주신 편지입니다.”
“우리에 대해 말해준 마법사? 그게 무슨 소리야, 로나?”
“마병단과 친분이 있는 마법사가 있었나?”
로나의 등 뒤에서 마법사들이 웅성거렸으나 로나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후에 직접 뵙게 된다면 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일이 이리 되었으니 전해 주시기만 해도 충분하겠지요.”
“그게 정말인지 어떻게 알죠.”
“의심이 되신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될 일입니다.”
유더는 편지를 로나에게 건넸다. 소개장 겉면에 적힌 타이스 율만의 이름을 본 로나가 눈을 크게 떴다.
“타이스 율만… 설마 진주탑의 원로 중 한 분이신 타이스 율만 님?”
“뭐? 타이스 율만 님이라고?”
“타이스 율만이라면 마력의 성질 연구 분야에서는 따라올 분이 없다던 그?”
마법사들이 일제히 로나의 뒤에 몰려들어 편지 겉면에 적힌 이름을 살폈다. 잠시 후 로나가 편지를 열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손 안에 쏠렸다.
“……이건…….”
“…….”
의심의 여지없는 진짜 편지였다. 심지어 율만은 그 편지가 오늘처럼 다른 마법사들의 의심을 사 제대로 미칼린에게 전달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듯, 진주탑의 마법사들만이 알 수 있는 흔적을 다수 남겨두기까지 했다.
이 편지를 가지고 있는 마병단원들은 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믿을 만한 이들이며, 순수한 의도로 토벌에 나서 준 만큼 꼭 협력하여 서로서로 도우라는 부탁 속에서 마법사들은 그들만의 돌려 말하는 언어로 쓰여진 대 원로의 협박 아닌 협박을 읽어냈다.
“……우리 수장님이 그분과 같은 스승님을 모셨던 후배셨구나.”
“연구에 도움을 받고 계시다니… 대체 뭘 연구하고 계신 거야?…….”
“토벌이 너무 길어져 문제가 생기면 아주 많이 안타까우실 거라는데……?”
같은 마법사이니만큼 연구요소에 문제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젊은 마법사들은 까마득한 선배이자 어렵고 어려운 원로의 소개장을 가장한 협박편지 앞에서 침묵을 지키며 마병단원들을, 그리고 유더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당신들은…….”
더 이상 마병단에게 무어라 왈가왈부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일사천리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