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마법사들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중대한 사안을 홀로 판단할 위치도 아닌 가케인이 예의 바른 얼굴로 머리를 살짝 숙였다. 키시아르가 그의 적절한 판단을 칭찬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어차피 지금 당장 가겠다는 건 아니니 다른 분들과 의논해 보시고 답변을 주세요. 저희는 그러면 잠시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마법사들은 마병단원들끼리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모두 일어서서 차례차례 밖으로 빠져나갔다. 유더는 마지막으로 로나가 나가기 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슬며시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저, 잠깐 어떤 것을 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네. 뭐죠?”
여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서 있던 유더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 사실이 의외라 느낀 듯, 로나가 눈을 깜박이며 반문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이전에 제가 아는 다른 마법사님에게서 서부 마법사 연합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나는 듯해 말입니다. 혹 이곳에 와 계시다는 수장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아… 미칼린 펀트 님이십니다. 진주탑의 원로 자리에 추천받았음에도 연구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며 이 한적한 연합에 남아주신 위대한 마법사이시죠.”
유더가 그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먼저 언급한 사실이 호의를 자아냈는지, 로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한결 부드러워졌다.
‘역시.’
그들이 서부 마법사 연합이라 소개하고 자신들의 수장에 대해 언급한 순간부터 유더는 타이스 율만이 준 편지를 어렴풋이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나 했으나 미칼린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역시 확실했다. 그들이 바로 타이스 율만이 언급했던 그 사람들이었다.
‘설마 이리 빨리 마주치게 될 줄이야. 적어도 두 번째 파견대가 오고 본격적으로 토벌에 들어갈 때쯤에야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였지만 만남이 일러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는 눈을 조금 가늘게 내리깔았다가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예. 성함을 들으니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제게 말씀을 주신 분께서도 훌륭한 분이시라 말씀하셨지요.”
“그…러셨나요?”
웃음이란 단어를 전혀 모르는 듯 보였던 이가 내보인 뜻밖의 미소가 마법사의 마음속 마지막 벽을 녹여버렸다는 사실을 모른 채 유더는 한껏 기분 좋게 대답했다.
“어쩌면 이런 곳에서 마주친 것도 인연이 아닌가 싶군요.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그러면 조금 뒤 다시 뵙지요.”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냥한 태도로 답변한 로나가 문을 닫고 빠져나갔다. 마법사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와 기척이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자 침묵을 지키던 단원들이 일제히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후우.”
“유더. 방금 그분에게 뭘 물어본 거야?”
유더의 곁에 서 있던 칸나가 눌러썼던 모자를 벗으며 물었다.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 이름.”
“그건 왜?”
“이곳에 오기 전, 율만 님이 그쪽에 편지를 하나 써 주셨거든.”
간결히 대답한 뒤 유더는 키시아르 쪽을 돌아보았다.
“단장님, 방금 전 제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뒤에서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중인 펠레타 기사들과 에제인의 시종들을 생각하면 마법사들과의 합류는 일이 귀찮아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 그만큼 에제인의 안전이 보장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유더는 미칼린 펀트를 만나 타이스 율만이 준 편지를 건넬 셈이었으나, 그것이 에제인이 떠나기 전이 될지 후가 될지는 키시아르의 선택에 달려 있었기에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질문의 무엇이 이상했는지 키시아르는 평소처럼 곧장 답하지 않고 말없이 그를 보고만 있었다. 코 아래까지 늘어진 천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어쩐지 얼굴을 보는 시선이 몹시 선명하게 느껴졌다.
“…단장님?”
다시 한 번 부르자 그제야 키시아르가 다른 단원들 쪽을 향하여 고개를 조금 돌렸다.
“글쎄. 어느 쪽이든 장단이 있어 보이는군. 의견을 낼 사람이 있나?”
“저는 그저 단장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저도요.”
유더를 제외한 단원들과 사제 루산은 모두 키시아르의 말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에제인 왕자 또한 잠시 침묵을 지키듯 고민하다 ‘마법사들과 함께 가는 쪽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고 답했다.
“저와 함께 가기 위해 대삼림 안으로 들어온 이들을 만나려면 히스누로 이어지는 삼림 내부의 무역로로 가야 합니다. 갈 길이 머니 중간 지점까지는 되도록 안전을 꾀하며 가는 쪽이 여러분들께도 한결 편하시지 않을까 싶군요.”
“그렇군요. 그러면 유더, 자네의 의견은?”
다시 유더를 향해 몸을 돌린 키시아르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롭고 침착해 보였다. 그에 안심하면서 유더는 방금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주장을 입에 올렸다.
“마법사들과 동행하는 쪽이 저희에게 확실히 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의견이 아니라 확언이군. 그 이유는?”
“이 편지 때문입니다.”
유더는 품속에서 타이스 율만이 주었던 편지를 꺼내 살짝 보여주었다.
“마병단의 첫 외부 토벌 임무를 걱정하시어 율만 님께서 주신 소개 편지입니다. 마침 이곳에 와 계시다는 서부 연합의 수장, 미칼린 펀트 님에게 써 주셨지요. 전부터 친분이 있으셨다고 하시더군요.”
첫 번째 파견대인 그들은 에제인 왕자의 인도를 마치는 대로 두 번째 파견대와 합류해야 한다. 그 이후 시작할 토벌 임무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서부에 있는 기존 세력들과의 협력관계가 필수였다.
그리고 서부 마법사 연합과의 관계 증진은 그 시작으로서 좋은 예시가 될 터였다.
“…그렇군. 미래를 위해 협력의 다리를 놓는 건 빠를수록 낫겠지.”
유더의 뜻을 곧장 알아들은 듯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좋아. 그러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가자마자 우리가 마병단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겠군.”
“단장님과 왕자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임무의 보안을 위해 둘 다 비밀로 해 두는 쪽이 낫겠군. 마병단이라는 사실을 밝힌 뒤부터는 대면 책임자 역할을 칸나 완드와 유더 아일이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드디어 대표 역할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진 가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대로 칸나는 부담감을 느꼈는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언젠가는 이것도 부단장으로서 익숙해져야 할 일 중 하나였다.
그들은 결정을 마치고 방 밖으로 나섰다. 마법사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그들이 처음 들어왔던 공간 쪽에서 여과 없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미칼린 님의 말씀은 그거야. 그 마병단인지 뭔지가 여기로 오면 곧장 보고할 수 있도록 몇 명이 여기에 남아서 간호 겸 교대로 감시를 하라는 거지…….”
“아니 몇 번을 생각해도 정말 이해가 안 돼. 각성자 놈들, 어떻게 노릴 게 없어서 남들이 몇 년간 공들인 걸 노려? 그게 뭔 줄이나 알고…….”
순간 일행 모두가 약속한 듯이 걸음을 멈추었다. 서로 마주친 시선 속에 의문과 당혹이 오갔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잠시 후 힌 엘더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거야? 마병단이 어쩌고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아. 나도 들었으니까.”
가케인이 대답한 뒤 또다시 침묵을 지키던 일행들 속에서, 유더는 키시아르의 모자 아래 입술 끝이 눈에 띄게 위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모습을 보았다.
“이건 아무래도 정체를 밝히기 전에 먼저 무슨 사정인지 들어봐야겠군.”
그들은 곧장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반가운 손님들의 얼굴을 본 마법사들이 밝은 얼굴로 반겨주었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네. 그런데 들어오기 직전 여러분께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셨던 듯하여…….”
유더가 뒷말을 흐리며 마법사들을 바라보자 열심히 입을 놀리던 이들이 일제히 움찔 놀라 어깨를 굳혔다.
“아, 그게 들렸나요? 이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여러분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 뭐냐. 저희 걸 노리는 아주 모-옷된 놈들 이야기거든요.”
“그래요. 저희가 연구 중인 대상하고 관련된 얘기라서요.”
미안하지만 그 모-옷된 놈들이 눈앞에 있는 우리인 것 같은데. 유더는 해주지 못할 대답을 삼키며 천천히 반문했다.
“죄송하지만 연구 대상과 관련이 있다니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각성자 집단인 마병단과 마법사이신 여러분의 연구 대상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응? 여러분도 마병단을 알고 계셨군요. 아, 하긴 당연한가. 요즘 그리 이름을 날렸으니……. 그게 말입니다…….”
“으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상도덕의 문제라고 하면 이해하실까요?”
“그건 아니지.”
“그럼 뭐라고 해? 새치기?”
순식간에 다시 떠들썩해진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더가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로나 베잇이 일어나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까 말씀드린 저희 수장님께서 이곳으로 오신 이유와 큰 연관이 있어요. 현 대삼림의 상황과는 상관이 없을 듯해 생략하고 말씀드리지 않았었지만…….”
그녀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이들의 진짜 정체를 전혀 예상치 못한 채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빌름 남작이 앞으로 서부 마법사 연합의 도움을 거절하고 새로 지원을 올 마병단과 협력하겠다 밝힌 사건, 마병단이 대삼림 내에 위치한 마법사들의 연구 대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믿을 만한 소문, 그로 인해 다년간 오직 연구에만 삶을 바쳤던 수장 미칼린이 불처럼 분노하여 곧장 대삼림으로 달려온 일 등이 빠르게 흘러나오는 동안 마병단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서 수장님께서는 현재 대삼림을 결코 떠나지 않고, 저희에게 대신 마병단의 추적 및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라 지시를 내려주신 상황이에요. 물론 제가 아니라 여기 남을 동료 몇 사람이 해 줘야 할 일이지만요.”
“……그랬군요.”
너무 어이가 없으니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더는 이전 생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 뒤 그럴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보다 훨씬 뒷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 해도 빌름 남작과 마법사 연합 간의 대립상태가 그대로였다면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 있었다.
‘타인 가에서 마병단을 부를 때부터 태도가 이상하더니, 이런 식으로 나왔다 이거군.’
“혹시 그 소문이란 것이 거짓이리라는 생각은 해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마병단이 직접 와서 해명한 것도 아닌데 굳이 먼저 그렇게까지 좋게 생각해 주어야 할까요? 저희도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지만 타인 가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정말이었는걸요.”
로나가 코끝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도움을 요청한 건 사실이지만 이쪽에서 거절하고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군.’
오해가 심각했다. 유더는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서부 마법사 연합이 무엇을 연구 중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고 관심을 보였겠습니까.”
“빌름 남작과 타인 가가 알려주었겠죠. 그들은 마력의 샘 유적에 대해 알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