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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49화 (249/805)

249화

키시아르가 그에게 준 5인의 직속 부하 및 조력자 선임권은 아직 건재했고,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현재까지 그 안에 넣을 사람으로 고려해 본 이는 이논뿐이었으나 이제는 거기에 가케인을 더해도 될 듯했다.

‘마병단원 중 부단장급이 아닌 사람이 조건이었으니 걸리는 부분도 없고.’

무엇보다도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 능력은 유더가 그간 어렴풋이 구상 중이었던 정보수집 위주의 직속 조력자들을 키우는 계획에 제법 잘 어울렸다. 외모가 너무 눈에 띄는 게 좀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괜찮을 듯했다.

“유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냐.”

유더는 칸나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말 옆에 앉아 뒤따라오는 나단 주커만 측에게 남길 연락 쪽지를 작성하고 있던 키시아르가 눈을 들며 시선이 마주쳤다.

망토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임에도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다 숨기지는 못한 사내가 유더를 향해 살짝 눈을 휘어 웃었다.

‘아.’

마치 구름 사이에 가렸던 빛이 저에게만 슬며시 고개를 내민 듯한 그 미소에 저도 모르게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키시아르의 웃음은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다시 출발할 테니 모두 준비하도록.”

“네.”

단장과 보좌 사이에서 무슨 시선의 교류가 오고 갔는지 모를 이들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말에 올랐다. 키시아르는 나단에게 보낼 쪽지를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에 묶은 뒤 펠레타 기사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기고 돌아섰다.

“가케인. 정찰 결과 특이사항은 없었나?”

“네.”

가케인이 곧장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아직 제국 국경 안쪽까지 몬스터의 특이한 대량 발생이 일어나지는 않은 듯하니……. 지금부터 대삼림에 들어갈 때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야겠어.”

3일 내로 대삼림이 있는 국경지대까지 오기 위하여 그들은 본래 길이 아니었던 곳을 수없이 직진해 거쳐왔다. 안개질풍마는 보통 말이라면 발이 빠져 죽었을 늪지대와 방향을 가늠하기 힘든 황폐한 산길에서도 거침없이 제 능력을 발휘하며 밤낮을 날 듯이 달렸다.

그렇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피로가 쌓인 탓에 모두 얼굴빛이 좋지 않았으나 정말 힘든 건 이제부터임을 알기에 아무도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은 키시아르를 뒤따라 대삼림의 입구가 시작되는 서부 국경지대의 끝으로 향했다.

“여긴 확실히… 이전과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군요.”

대삼림과 맞닿은 마지막 마을은 그곳을 거쳐 온 타국의 상인들과 위험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니는 용병들로 북적였다. 워낙 다양한 이들이 돌아다니는 통에 안개질풍마를 탄 마병단원들조차 그 사이에서는 시선을 끌지 않았다.

펠레타 기사단원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향하는 동안 사제 루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긴장된 얼굴로 속삭였다.

“무기를 찬 이들이 너무 많아요. 곳곳에서 피 냄새도 나고요…….”

“거기 비켜! 지나가야 하니까!”

그때, 루산의 뒤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유더가 루산을 반사적으로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다른 이들에게 치여 쓰러졌을 것이다. 루산이 휘청거리든 말든 조금도 돌아보지 않은 이들이 들것에 실린 사람을 데리고 마구 뛰어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뭐, 뭐람. 저 사람들, 사과도 없이 그냥 가버렸네요. 사제님, 괜찮으세요?”

“아, 예에. 제가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문제겠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하……. 유더 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에문이 루산의 곁에서 입을 떡 벌리고 기막혀하는 동안 유더는 사라진 이들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거친 로브 차림이었으나 몇몇 이들은 가슴에 진주로 만든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마법사들이 주로 걸치는 로브에 진주 브로치 차림이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로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진주탑 소속 마법사거나, 혹은 그와 관련이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이들이 무슨 연유로 부상자를 들고 달려간 것인지 궁금했으나 이미 사라졌으니 알 방도가 없었다. 유더는 일행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작은 집 앞에서 거칠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로브 차림의 사람들을 또다시 마주쳤다.

“왜 안 된단 겁니까! 돈이라면 드린다니까요!”

“그러니까 사제님이 탈진해서 쓰러지셨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성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다른 사제님도 있지 않았어요? 그분은…….”

“이곳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어제 떠나셨어요. 그러니까 여기 말고 일반 의원이나, 아니면 옆 마을로 가셔야 해요.”

“이럴 수가…….”

망연자실해진 이들의 얼굴 위로 어두운 절망이 어렸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걸음을 멈추고 루산 사제 쪽을 돌아보았다.

“사정이 급해 보이는 이들이군. 루산 사제, 가 보겠나?”

“예, 예. 물론입니다.”

방금 전 자신을 밀쳐 넘어뜨릴 뻔한 자들임에도 루산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곧장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게 미소지은 키시아르가 가케인에게 동행을 명했다.

“가케인. 같이 다녀오도록.”

“알겠습니다.”

그들은 문 닫힌 집 앞에서 들것에 실린 이를 사이에 두고 무어라 의논 중인 이들에게 다가갔다.

“음, 저기…….”

“관심 두지 말고 가십시오. 구경꾼에게 답해줄 만한 일이 아니니까!”

말만 걸었음에도 화를 내는 사람 때문에 찔끔한 루산을 대신해 가케인이 앞으로 나섰다.

“이분은 태양신의 사제이십니다. 여기 계신 부상자가 걱정되시는 마음에 다가오신 것인데 반응들이 너무하시는군요.”

그제야 모든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걸 지금 여기서 믿으라고? 있던 사제도 도망가는 판에 무슨 거짓말…….”

퉁명스레 말하던 자가 한눈에 보아도 절로 믿음이 샘솟을 만큼 싱그러운 외모의 가케인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

순간적으로 분노를 잊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이들이 가케인의 곁에 보호받듯 서 있는 젊은 사제와 그의 목에 걸린 낡은 성표 목걸이를 번갈아 쳐다본 뒤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진짜 사제십니까?”

“네, 맞습니다.”

“신이시여! 이제부턴 당신을 다시 믿겠습니다! 제발 이 녀석의 상태를 봐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일단 왜 부상을 당하셨는지 설명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로브를 걸친 이들이 일제히 루산을 들것 앞으로 데려가며 저마다 다급히 설명을 해댔다.

“저희는 진주탑 산하 서부 마법사 연합 소속의 마법사들인데……!”

“대삼림의 연구시설이…! 갑자기 몬스터가……!”

“설치해 두었던 진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며 무너져서……!”

목소리가 뒤섞여 무어라 말하는지 완전히 알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대충 뜻은 짐작이 되었다. 유더는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키시아르를 향해 작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이 이 근처에서 발생 중인 듯하군요.”

“그래. 그런 것 같군.”

자리를 옮길 시간조차 없다고 아우성치는 마법사들 때문에 루산은 그 자리에서 곧장 무릎을 꿇고 들것에 실린 부상자에게 신성력을 썼다. 부상자는 팔다리가 심하게 으깨졌고 천으로 둘둘 감은 이마 위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혼수상태였던 그의 뺨에 혈색이 돌고 마침내 호흡이 고르게 변할 때까지 거침없이 흰빛을 붓는 루산을 보며 마법사들이 일제히 감탄을 표했다.

“세상에. 이렇게 강한 신성력을 쓰는 사제님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야…….”

“혹 원로급 사제라도 되시나?”

“아니야. 그런 사람이 왜 여길 오겠어?”

“그… 혹시 타이누에서 지원을 오셨나 해서 말야…….”

“아…….”

마법사들의 의견이 분분한 사이 루산은 겨우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불은 껐습니다. 부러진 팔다리도 전부 붙었으니 이제 일반 의원으로 가서 쉬시면 기력을 되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제님.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아까는 무례하게 굴어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대삼림 쪽의 상황이 그리 위험해졌나요?”

루산의 질문에 마법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깜박이며 반문했다.

“물론 위험하죠. 아시고 오신 것 아니셨습니까? 타이누에서 오신 사제님이 아니셨나요?”

“아, 알고 오긴 했는데…… 거기서 오진 않았습니다.”

루산이 어색하게 대꾸하자 마법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면 이 위험한 곳까지 대체 뭘 하러 오신 거죠? 설마 삼림을 지나갈 목적으로 오신 거라면 말리고 싶네요. 저희가 사제님을 위해 말씀드리는데, 아무리 강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도 지금은 거기에 가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요. 저희도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었다면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라니까요. 예년과 발생상황도 너무 다르고, 못 보던 놈들이 계속 나타나서 대처하기도 어려워요. 베테랑 용병들도 대삼림에 들어갔다가 죽어 나오는 걸 벌써 몇 번이나 봤다구요.”

“상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일 뿐이긴 하지만, 사라인 대삼림에 저주가 내렸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죠!”

“아… 아아. 그렇군요.”

바쁘게 쏟아지던 말을 듣던 루산이 난감한 표정으로 키시아르와 유더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마법사들은 그제야 이쪽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놀란 얼굴로 경계했다.

“누구십니까?”

“사제님과 함께 온 일행입니다.”

유더는 키시아르와 에제인이 모자를 잘 눌러썼는지 확인하고 나서 앞으로 나섰다.

“치료만 끝내고 곧장 저희의 목적지로 갈 생각이었는데… 괜찮으시다면 대삼림 쪽 상황을 좀 더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같은 일행이라고요?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죠?”

“대삼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목적이 있어 파견된 기사단과 용병입니다.”

“기사단과 용병?”

반신반의하는 얼굴이 된 마법사들이 모든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역시나 가케인 쪽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분명 기사님이겠군요. 책임자?”

“……하하, 예.”

유더의 눈짓을 받은 가케인이 어색하게 수긍했다.

“좋아요. 따라오십시오. 동료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그 정도 도움은 드려야죠. 잠시 저희가 머무는 곳에 초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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