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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48화 (248/805)

248화

“지금부터 우리는 아무리 늦더라도 3일 내로 대삼림과 맞닿아 있는 서부 국경지대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이동한다.”

모두가 말에 오른 모습을 확인한 뒤 제일 앞에 선 키시아르가 뒤를 돌아보며 침착히 선언했다.

“그간 서부에 있었던 펠레타 기사들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최적의 경로를 정했지만, 그래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분명 일어나겠지. 지금까지 이상으로 혹독한 시간이 되겠지만… 모두를 믿겠다.”

“예.”

키시아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믿겠다는 말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아무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눈을 빛내며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그에 답하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망토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뒤 손을 올렸다.

“출발하지.”

여러 필의 말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달려나갔다. 막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햇빛이 모두의 머리 위를 공평하게 내리쬐었다. 덕분에 유더는 제 근처에서 달리고 있는 에제인 왕자의 시선이 키시아르의 등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작은 나쁘지 않다 믿기로 했다.

***

오르 제국 서부의 중심이 되는 도시, 타이누의 영주 빌름 남작은 수도에서 심부름꾼을 통해 급히 전달되어 온 편지를 읽자마자 미간과 종이를 동시에 힘껏 구겼다.

“원, 내가 아무리 타인 가의 방계라지만 그래도 이 타이누를 오랫동안 책임져 온 빌름 가의 주인인데 타인 공작도 정말 너무하시는군.”

“무슨 일이십니까?”

영주의 곁에 있던 집사의 물음에 빌름 남작이 큰 소리로 불평을 터트렸다.

“펠레타 공작이 만든 마병단 따위가 뭐 그리 대수라고 아직도 서부에 안 왔느냐, 만나지 못했느냐 하시며 역정을 내시느냔 말이야. 놈들의 본거지가 수도에 있으니 그 정도는 공작께서 직접 알아보시는 쪽이 더 맞지 않으냐?”

“그렇습죠. 이 타이누를 책임지시기에도 바쁘신 남작님께서 어찌 그런 일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시겠습니까.”

집사의 굽실대는 반응에도 남작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마병단인지, 마법단인지 하는 놈들이 수도를 떠나 서부로 온다고 했으니 알아서 손 좀 보아 달라 하셨을 때부터 나는 이미 귀찮기 그지없었다. 그까짓 놈들이 뭐라고 우릴 도우러 온다, 만다 신경을 쓰라 하느냐? 저들끼리 와서 몬스터나 좀 건드리다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빌름 남작의 생각에, 타인 공작은 자신의 영지임에도 서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귀찮은 일은 모두 남들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이곳저곳에 투자나 해대며 돈을 내놓으라, 뒤처리를 하라 지시만 내리기 일쑤였다.

얼마 전에도 타인 공작이 벌인 거대한 투자 무역의 실질적인 준비를 진행하느라 타이누의 모든 이들이 영지를 다스리는 일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죽어 나갔는데, 공작은 한가롭게 남부에 가서 또 다른 해상 투자 건을 진행하고 돌아왔다고 들었다. 빌름 남작의 손에 들어오는 대가는 전혀 없음에도 늘 타인 공작 때문에 고생만 하니 그는 타인 공작가 본가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어차피 그분께 가장 중요한 건 이번의 때 이른 몬스터 발생 건으로 대삼림의 투자 거점들이 타격을 받는가 아닌가 뿐이다. 마병단 일은 그저 거슬린 김에 화풀이를 대신 시키시고 싶은 거겠지.”

정확하게 타인 공작의 속내를 짚어낸 빌름 남작이 화가 난 얼굴로 구긴 편지를 집어던졌다.

“아직 놈들은 못 찾았지만 찾아내면 반드시 손봐 주겠다고 쓰고, 투자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사들과 기사를 다수 보내 정리 중이라 보고해라. 그 정도면 어련히 만족하시겠지.”

“알겠습니다.”

집사는 남작 대신 답장을 쓰기 위해 구겨진 편지를 주워 폈다. 글을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이 한 곳에서 잠시 멈추었다. 펠레타 공작의 이름이 쓰여진 부분이었다.

“그런데 남작님. 편지를 가지고 온 이들에게 듣기로 이 마병단인지 하는 곳을 만드신 펠레타 공작께서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황제 폐하의 발표가 있었다는데……. 그것이 정말일까요?”

“신검 오르?”

심드렁하게 신검의 이름을 내뱉은 빌름 남작이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 차가운 웃음을 터트렸다.

“내 비록 타이누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않은 몸이나, 펠레타 공작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무능력하고 노는 데에만 정신이 없어 황가의 추문이란 추문은 전부 끌고 다닌다던 자가 무슨 신검의 주인이란 말이냐.”

“그렇다면…….”

“당연히 폐하께서 황가의 위엄을 좀 세워 보시고자 한 소리겠지. 누가 그 말을 믿고 펠레타 공작에게 확인씩이나 요구하겠으며, 그런다고 그쪽에서 증거를 보여주기나 하겠느냐? 애초에 신검은 아무나 만질 수 없는 물건이라 생김새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펠레타 공작이 신검의 진짜 주인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았자 4대 공작가 측에서는 얻는 것이 없었다. 아니라고 밝혀진다 한들 본래 없던 펠레타 공작의 명예가 크게 상하지도 않을 테지만, 반대로 황가에서 새로운 신검의 주인이 진짜로 나왔을 경우에는 황제의 세력이 커질 테니 골치가 아파질 터였다.

“당연히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니 타인 공작께서도 그 이야기는 일절 적지 않으셨겠지. 그따위 소식에 휘둘리는 건 아직도 옛날이야기나 믿는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뿐일 게야.”

“역시 남작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이 타이누에 계시면서도 대륙 전체를 보고 계시는군요.”

집사는 모시는 이의 현명함에 크게 감탄하며 허리를 숙였다. 빌름 남작은 그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서부 마법사 연합에 넣었던 연락은 어떻게 되었느냐? 놈들이 쉽게 몬스터 토벌 협력을 해 주고 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마법사들이 본래 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장 저들이 살고 있는 집 문 앞에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한은 자기들과는 상관없다고 하는 자들이지요.”

“고약한 놈들. 누구 덕에 여기서 사는 줄도 모르고!”

“사태가 위급해 보인다고 몇 번을 말했습니다만 꿈쩍도 않습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저희 병사들이 놈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일로 여즉 마음이 불편하여 이리 강짜를 놓는 모양입니다.”

“그 일로 아직까지도 그러고 있다고? 아니, 그러면 영주인 내가 저들 편을 들기라도 해야 하느냐? 마법을 조금 쓸 수 있다고 잘난 척 하기는!”

욕설을 내뱉은 빌름 남작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 묘안을 냈다.

“그래. 그렇다면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처리해야겠군.”

“무슨 말씀이시온지 멍청한 소인에게도 알려주십시오.”

“마병단이란 놈들에게 이번 토벌 건으로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 마법사들은 앞으로 필요 없다 했다고 전해라. 더불어 놈들이 대삼림에 있다는 마력의 샘인지 뭔지 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고도 전해.”

집사는 그 계획에 크게 놀랐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 흔치 않게 주인의 말에 반문했다.

“괜찮겠습니까? 그자들은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여태 서부에 머물러 있던 게 아닙니까. 혹 거짓임을 알게 된다면 몹시 화를 낼 것입니다…….”

“참으로 멍청하구나. 거짓말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해도 그때는 대삼림 쪽에서 발생한 몬스터들의 처리가 다 끝난 뒤가 되겠지. 거기에서 연구를 계속 하고 싶은 한, 놈들이 감히 나에게 항의나 할 수 있겠느냐? 기껏해야 지금처럼 협력을 한다 못 한다 속 좁게나 굴 것이다.”

마병단이 진짜 온다면 먼저 국경지대와 대삼림 안에서 연구를 하던 마법사들과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칠 것이다. 놈들이 서로 오해를 낳아 열심히 싸워 준다면 빌름 남작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었다.

‘하는 김에 몬스터 토벌에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어주면 더 좋을 테고.’

그는 마병단에게 정말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다. 또한 펠레타 공작이 현재 수도가 아닌 서부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 또한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미리 접했다 해도 남작의 결정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뜻에 따라 일은 잘 진행되었다.

그날 남작이 몰래 흘린 잘못된 정보를 접한 서부 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은 예측대로 몹시 분노하였으며, 수장인 미칼린 펀트는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곧장 대삼림으로 향하기까지 했다.

마법사들 중에는 각성자에 대한 호기심만 지닌 타이슨 율만 같은 자도 있으나 미래에 그들이 설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지닌 자도 많았다. 미칼린은 누구보다도 각성자를 싫어하는 파였다.

“그래? 마법사 놈들이 드디어 움직였다고? 전부 잘 되어가는군! 아까운 우리 측 무력을 쓰지 않아도 이번 토벌은 그럭저럭 해결되겠어.”

빌름 남작은 앓던 이가 빠진 기분으로 시원하게 웃었다. 제가 놓은 덫이 어떻게 굴러갈지 알았더라면 짓지 못했을 웃음이었다.

***

“대삼림이 저 멀리 보이는 것 같아.”

잠시 쉬는 틈을 타 그림자와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미리 멀리까지 정찰을 보냈던 가케인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멀리 푸른 물결 같은 숲이 보여. 이제 다음 마을까지 가면 정말 코앞이겠어.”

“몬스터들은 어때? 좀 보여?”

“아직까지는 안 보여……. 아, 그런데 이제 그만 끝내야겠다.”

칸나의 질문에 가케인이 답한 뒤 눈을 뜨자 그의 발아래에서 사라졌던 그림자가 다시 돋아났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체력을 분배하는 게 쉽지가 않네.”

“그래도 실전에서 계속 사용하니 단에만 있었을 때보다 훨씬 발전 속도가 빨라졌어.”

유더는 피로한 눈을 한 가케인에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어제보다 훨씬 오래 유지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언제 지쳤었느냐는 듯 기쁜 얼굴이 된 가케인이 함박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내 몫은 하는 것 같아서. 여기 오기 전엔 정말 걱정이었거든.”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제 몫을 잘 하고 있었으나 본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허허실실 웃느라 성격이 좋아 보이지만 가케인의 내면에 보기보다 엄청난 향상심과 끈질김이 있다는 사실을 유더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이번 임무를 마치고 나면 어디에 내놓아도 쓸 만하겠지. 그러면… 내 직속으로 같이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한번 물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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