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서늘한 답변에 에제인이 눈을 깜박였다.
아마도 유더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상관없었다. 그가 당장 제 뜻을 알아들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힘이 있다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처참하게 끝맺은 유더 아일의 이전 생이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필요한 건 때로는 강력한 힘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 한 마디, 혹은 오랜 인내일 수도 있었다. 마병단 단원들 중에는 아직도 키시아르가 제대로 능력을 쓰는 모습 한 번 보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키시아르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단순히 힘과 권력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느냐고 말하는 것은, 그가 지금껏 억누르며 참아낸 모든 것들과 그 끝에 얻어낸 현재에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유더는 그렇게 느꼈다.
힘 때문에 따르는 것이느냐니. 그보다 의미 없는 질문이 또 있을까.
“……혹시 내가 당신을 화나게 한 건가?”
대답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듯 에제인이 물었다. 굳이 말하자면 분노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는 미약하게 눈썹을 찌푸린 젊은 왕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전 생의 에제인 왕을 처음 만났을 때, 유더는 그를 철벽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단단한 벽을 두르고 왕좌에 앉아 있던 그의 얼굴에서 인간적인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에제인이라는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넬라른의 왕’, 그 자체처럼 보였다.
넬라른인들은 나라의 힘을 부강하게 만들고 그들을 보호해 준 젊은 왕을 존경하면서도 언제나 어려워했다. 그가 아무런 폭정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유더와 함께 사절로 향했던 이들은 그러한 에제인의 모습을 보고 유더와 몹시 비슷하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신경 쓰지 않았던 그 말이 과거로 돌아와 지금의 에제인을 마주한 지금에서야, 어쩐지 무슨 뜻으로 했던 말이었는지 알 듯도 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새로운 고민이 유더의 머릿속을 흘러 지나갔다.
‘이대로 그가 과거와 같은 길을 걷도록 두는 게 과연 최선일까.’
그가 넬라른으로 무사히 돌아간다 해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그저 이전 생의 반복이 될 뿐이다. 명군 에제인 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과가 될 수 있겠지만 그 본인에게 최선이 되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힘만이 모든 답이 되어주리라 생각하게 되면 결국 힘 외의 다른 것들을 등한시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결국 다른 모든 것을 전부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스스로는 괜찮다고 여기더라도 결국 그것은 비틀리고 일그러진 삶밖에 될 수 없었다.
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키시아르와 만나 깨달은 사실들을 그 또한 미리 알 수 있다면, 각성한 후 힘을 얻고 나서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지금처럼 절박하고 텅 빈 얼굴로 제 주변을 믿지 않게 되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나을 듯했다.
‘시도 정도는 해 보아도 괜찮겠지.’
에제인이 각성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유더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주제넘을지 모르나 제가 왕자님께 잠시 어떤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봐.”
마음대로 하라는 듯 에제인이 대꾸했다.
“왕자님께서는 난국을 타개할 힘을 원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혹 어느 날 갑자기 각성자가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실 것 같으십니까. 사소한 능력이 아니라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한 각성자 말입니다.”
“지금 내게 예언이라도 하는 건가?”
에제인이 묘한 눈빛으로 반문했다.
“당신은 예언 능력도 가지고 있어?”
“그런 능력은 없고, 그저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에제인의 얼굴 위에 미약한 실망감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글쎄. 원하기는 했으나 그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하지만 내가 그런 힘을 손에 넣는다면… 아마도 무척 기쁘겠지. 나와 넬라른을 어지럽게 만들던 모든 위협을 떨칠 수 있을 테니까.”
에제인이 한숨을 내쉬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가는 도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그 위협을 모두 떨쳐낸 이후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어떨 것 같느냐니. 그게 무슨 뜻이지?”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왕자님의 뒤를 따르리라 확신하십니까?”
그것은 정말 직접적이고도 위험한 발언이었다. 에제인의 성정을 믿고 내지른 말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에제인이 질문했던 ‘힘 때문에 키시아르를 따르느냐’는 말의 가장 좋은 답이 되기도 했다.
유더는 무언가 느꼈는지 입을 꾹 다문 에제인을 향해 조용히 마지막 말을 건네었다.
“답을 해 주실 수 없다면 넬라른으로 돌아가시는 동안 저와 다른 이들이 단장님을 모시는 모습을 지켜보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그들은 그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왔다. 에제인은 제 방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말이 없었다.
그가 유더의 말에 곧장 화를 내지 않았다는 건 일단 생각해 보겠다는 답의 표현에 가까우리라. 마지막까지 그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 여전히 힘만이 답이라 여긴다면 거기까지겠지만 유더는 그래도 그가 무언가를 깨닫기를 바라기로 했다.
***
“아일 경. 저는 넬라른 시종들을 감시하며 밖에서 먼저 말들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 공작님을 모시고 다른 분들과 함께 나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길었던 하룻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았다. 비가 그친 하늘은 언제 흐렸느냐는 듯 몹시 깨끗했다. 유더는 저보다 먼저 밖으로 나간 나단을 대신해 또다시 키시아르의 침실로 향했다.
“단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린 뒤 고리를 돌리자 언제 준비를 마쳤는지 벌써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키시아르가 그를 맞이했다.
“출발할 시간이 되었나 보군.”
“네.”
“식사를 제대로 못 하고 가는데 배고프지는 않나?”
“그건 제가 단장님께 드려야 할 말씀입니다.”
“나야 괜찮지만 내 보좌가 굶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평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농을 건 키시아르가 갑자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고개를 내리니 종이에 싼 작은 사탕이었다. 이전에도 받은 경험이 있는 가게의 제품인 덕에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단장님?”
“못 먹은 지 오래라 슬슬 생각나지 않던가? 한 입 먼저 먹어 둬.”
“무슨 말씀입니까. 그보다 이걸 언제 짐에 넣어 가져오신 겁니까, 대체……?”
슬슬 생각나지 않느냐니, 단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인가. 유더는 곧장 고개를 저었으나 결국 눈앞에서 반드시 입에 넣고 가라는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장지를 열어 사탕 한 개를 입에 넣어야 했다.
사탕을 입 안에 넣고 있느라 말이 없어진 유더가 우스웠는지 키시아르가 몹시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맛있나?”
“…이전에 먹었던 것과 똑같습니다.”
“맛있다는 뜻이군.”
키시아르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더의 머리를 기습적으로 한 번 흐트러뜨렸다. 이런 행동도 이제 익숙해져서인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은 정말로 적응이 빠른 동물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건 왜 주시는 겁니까.”
“말했잖나. 배고플까 걱정이 되어서라고.”
앞서 나가던 키시아르가 가볍게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어젯밤 밖으로 빠져나갔던 왕자를 별문제 없이 다시 데리고 돌아온 상이라고 해 둘까. 그쪽이 더 마음이 편한가?”
유더는 키시아르를 따르던 걸음을 저도 모르게 잠시 멈추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걱정 말아. 쉬기는 쉬었으니. 다만 혹 이상 상황이 일어날까 싶어 바깥의 기척은 계속 신경 쓰고 있었거든.”
유더는 키시아르가 방 안에서 느꼈을 기척의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였을지 의문스러워졌다. 혹 에제인과 그가 나눈 대화까지 들은 건 아니리라 믿고 싶었으나 자신이 없었다.
‘누가 들어서 켕길 만한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키시아르라서 문제였다. 유더가 가슴 속의 미약한 술렁임을 억누르기 위한 침묵을 지키는 동안 키시아르가 조금 더 자세히 말을 덧붙였다.
“밖으로 빠져나가기에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더군. 나까지 나갈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지.”
“…예. 말씀대로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물을 마시고 싶다고 내려가셨다가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 하셔서 부엌 앞쪽의 우물가에 다녀온 것뿐입니다.”
“그래. 괜찮아 보여도 한동안은 계속 속이 시끄럽겠지. 어떤 돌발행동을 벌이더라도 놀라지 않고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경계하게.”
“알겠습니다.”
다행히 걱정했던 일이 일어난 건 아닌 듯했다. 유더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준비를 마친 이들이 모두 내려와 대기 중이었다. 잠시 후 안개질풍마 외에도 어제까지는 없었던 여러 필의 일반 말과 작은 짐마차 하나를 펠레타 기사들과 함께 끌고 온 나단이 곧장 키시아르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그래, 나단. 준비를 잘했군. 하룻밤 사이에 말과 마차를 구해 오느라 꽤 귀찮았을 텐데 말이야.”
“다른 이들이 미리 여분의 말을 가져올 방안을 혹시나 하여 마련해 두었었습니다. 칭찬은 그들에게 돌려주십시오.”
유더는 그제야 나단 주커만이 어젯밤 급히 나간 이유를 깨달았다. 나단은 일반 말을 펠레타 기사들에게 넘겼고, 마차 안에는 양손을 포박한 넬라른 시종 두 사람을 넣었다.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반항도 하지 않았다.
“저희는 이들을 감시하며 뒤를 따르겠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예정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그래.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대삼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발목이 잡힐 테니 이쪽에서 보낼 신호는 주기적으로 확인하도록.”
나단 주커만이 본디 탔던 안개질풍마는 에제인 왕자의 차지가 되었다. 에제인은 시종들이 탄 마차 쪽을 복잡한 눈빛으로 한 번 돌아본 뒤 곧장 말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