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곧장 뛰쳐들어갈 수 있게끔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방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멍한 얼굴을 한 에제인은 느릿한 걸음으로 방 밖으로 걸어 나오다가는 앉아 있던 유더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유더는 먼저 말을 걸지 않고 내려다보고만 있는 왕자의 상태를 살피며 작게 물었다.
“자다가 잠시 깼는데, 물이 없더군.”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왕자가 물을 찾기 전에 그의 시종들이 알아서 그 정도 시중은 모두 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소 특수했다. 유더는 물을 가져다 줄 이조차 없어져 버린 에제인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드릴 테니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직접 떠다 마셔도 충분하니까.”
아무래도 자다가 깨어났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저 답답하여 방 밖을 벗어날 핑계를 찾은 게 아닌가 싶었다. 능력으로 물을 담아주는 건 간단하지만 그가 원하는 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일부러 방에 다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더는 저를 외면하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는 왕자의 뒷모습과 시종들의 방을 번갈아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들과 왕자 중 누구의 곁에 더 가까이 있어야 할지 고르라면 당연히 에제인 쪽이었다.
“그러시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다는데도.”
왕자는 저녁 식사를 했던 부엌으로 향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이 물통을 찾지 않고 먼 허공을 맴돌았다. 결국 비로 얼룩진 창 앞에서 멈춘 에제인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바깥을 바라보기만 했다. 밤이 깊어 비는 거의 그쳤으나 귀를 기울이면 아직까지도 부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다른 이들이 일어날 때까지 서 있을 셈인가 싶어 유더가 망설이기 시작했을 때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어 낮게 중얼거렸다.
“…저 밖에 우물이 있군.”
그의 말대로였다. 부엌 창문 바로 앞쪽에는 뚜껑이 덮인 우물이 있었다. 유더가 아무 답도 하지 않자 에제인이 몸을 돌려 부엌 구석의 작은 곁문 쪽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마음을 풀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고민 속에서 유더는 그의 뒤를 따랐다. 물방울처럼 떨어지기보다는 안개와 같이 공기를 가득 메운 비가 문을 열자마자 곧장 그들의 머리칼을 적셨다.
유더가 말없이 슬쩍 손을 움직여 두 사람의 머리를 적시는 빗방울들을 멀리 흩어지게 하자 에제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비를 막을 옷도 당신에겐 필요가 없겠어.”
“아닙니다.”
“당신과 같은 보좌가 있어 단장님은 정말 든든하시겠지.”
그 말에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더가 입을 다물자 굳이 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듯 에제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닫힌 우물의 뚜껑을 열지도,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향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더 아일. 당신은 혹시 넬라른의 역사가 오르보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아뇨.”
“제국의 시황제는 대멸망을 막고 오르를 세우면서, 자신을 도운 나라들과 영원한 동맹을 맺었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언제나 신의로서 돕겠다는 내용이었지. 비록 후대에 그것이 변질되면서 속국화되는 바람에 동맹이 깨지고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지만, 과거의 흔적은 아직 넬라른 이곳저곳에 남아 있어.”
느릿한 목소리가 땅을 두드리는 미약한 빗소리에 뒤섞여 흐릿하게 들렸다.
“이를테면… 그래. 넬라른의 왕궁에 있는 눈먼 현자의 조각상이 그렇지.”
눈먼 현자의 조각상은 아까 그의 시종 중 한 사람이 배신을 위해 다른 이들을 만났던 장소로 칸나가 짚어냈던 곳이었다. 조각상을 언급하는 에제인의 얼굴 위로 차갑고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가는 사라졌다.
“넬라른인들은 그 현자의 정체가 제국을 떠난 이후의 대마법사 루마라고 믿고 있지. 제국은 부정했지만 말이야.”
“…….”
“진실은 모르겠지만 넬라른에는 그 눈먼 현자가 남겼다는 유물이 몇 가지 남아 있는데, 나는 그중 하나를 오르에 넘겨주기로 약조했다.”
말은 담담하게 흘러나왔으나 내용은 놀라웠다. 유더는 내내 궁금해했던 사실을 스스로 밝히는 에제인 왕자의 심중을 가늠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답을 알 수 없어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 태도가 전혀 놀라지 않은 탓이라 생각했는지 에제인이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안 놀라는 걸 보니 이미 단장께서 언질을 하셨나? 아니면 이번에도 사실은 그게 놀란 얼굴인 거라 답할 건가.”
그것은 황궁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 유더가 했던 말이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씀을 제게 해 주시는 연유를 모르겠기에 생각 중이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내가 전부터 아는 사람이라 할 만한 이는 당신뿐이잖아. 무어라도 말하고 싶은데 상대가 있어야지.”
“…….”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날 동정하지 않는 눈으로 보기도 했고.”
마병단원들의 태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부 느끼고 있었던가. 유더는 조금 난감한 기분으로 동료들을 위한 작은 변명을 했다.
“불손한 태도를 대신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이해하네. 당사자인 나조차도 어이가 없는데 지켜본 이들은 오죽했겠어.”
무심히 중얼거린 에제인이 유더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만 당신도 주군을 모시는 입장이니 한 가지 질문에 답해 주었으면 해서 방금 전 이야기를 꺼냈을 뿐이야.”
“무엇입니까.”
유더는 에제인의 말을 좀 더 잘 듣기 위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만약 당신이 모시는 이가 가려 하는 길을 막는 자가 나타난다면, 어찌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무슨 질문을 하려나 했더니 죽은 시종이 던지고 간 말에서 비롯된 이야기인 듯했다. 유더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짧게 답했다.
“오늘 죽은 이의 말 때문이라면 신경 쓰실 가치가 없으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아. 나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랐어. 넬라른에는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유물들을 끌어안고 내분으로 망하느니, 제국과 상부상조하여 더 빠른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이 맞다고 생각하니까. 다만… 그런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서 말이야.”
에제인이 조용히 답했다.
“당신들과 달리 내게는 힘이 없지. 내 힘은 오로지 나를 믿어주는 이들에게서 나와. 그런데 내 결정이 그런 이들 사이에 계속해서 불필요한 내분을 일으킨다면, 가고자 하는 길이 더욱 멀어지지 않겠어? 당신처럼 훌륭한 아랫사람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이를 모시고 싶어 할지 궁금하여 꼭 의견이 듣고 싶더군.”
그런 거라면 그래도 해 줄 만한 답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지?”
“어떤 선택을 하시든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에제인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뭐… 그런 일이 앞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괜찮다는 위로인가?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어.”
“저도 그런 뜻으로 드린 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에제인을 상대로 긴 말을 하려니 기분이 이상했으나 유더는 최대한 간결하게 답을 하려 노력했다.
“저는 제가 모시는 분께서 어떤 길을 가고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 길이 옳은 길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길을 막는 이들에게 어떤 선택을 하신다 해도 저와는 상관이 없지요.”
늘 하고 있던 생각이기는 했으나, 소리를 내어 말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키시아르가 가는 길이, 그의 선택이 옳다고 여기게 된 건 처음에는 단순히 실패만 하다 죽어버린 자신보다는 과거의 그가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해 두었던 미약한 정책들이 훨씬 나았던 경험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 지킬 뿐이라 마음먹었던 건조한 관계가 어느새 이렇게나 변화했을까. 날이 갈수록 계속해서 변화하는 건 제 육신만이 아니었다. 생각도, 감정도, 가치관도 키시아르에게 뒤엉킨 순간부터 모든 것이 변했고 지금도 바뀌어 가는 중이었다.
에제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둠이 서려 검게 보이는 자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건 너무… 맹목적이지 않나?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이상할지도 모르나, 위에 선 이들이라고 언제나 옳지는 않아. 당신의 그 말은 마치 신심 돈독한 사제들처럼 들리는군.”
‘그럴지도 모르지.’
유더는 속으로 에제인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그런 의문은 아직까지도 늘 그의 가슴 속 한구석에 작게 도사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키시아르에게 이끌리는 게 과연 정상일까.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자신할까?’
하지만 결국 답은 언제나 같았다. 키시아르의 곁에 서서 그를 보는 순간에는 결국 그것이 옳다고 느끼게 된다는 확신뿐이었다.
“제가 특별히 맹목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2왕자님의 곁에도 분명 그런 이들이 이미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삼키며 유더는 다른 답을 했다. 그러나 에제인은 아무래도 그의 말을 빈말이라 느꼈는지 작게 웃고는 곧 표정을 지워 버렸다.
“고마운 말이군. 잘 알겠어. 제국에는 내가 가질 수 없는 보물들이 이미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정말 부럽군.”
그렇게 말한 뒤 에제인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가장 묻고 싶었으나 내내 억눌렀던 듯한 질문이 그에게서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시는 분을 믿을 수 있는 거지? 역시 그분이 지닌 힘 때문인가?”
‘또 힘 이야기를 하는군. 그게 그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었나.’
물론 힘이 중요하기는 하다. 유더도 이전 생에는 키시아르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말을 따른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말씀은 죄송하지만 답변하고 싶지 않습니다. 왕자님의 말씀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늘한 답변에 에제인이 눈을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