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제게 받아내실 것이 있는 제국의 폐하와 단장님께서는 그 무모함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겠지요. 저는 무모하고 비겁한 자이기에 오직 그것만을 믿습니다.”245화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가 에제인에게 받아낼 것?’
그게 뭘까. 단순히 넬라른의 왕좌에 앉기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여 돕기로 한 게 아니라 대가로 무언가를 받기로 했나?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나라끼리 이후 일이 잘 되었을 때 외교적, 혹은 군사적 도움을 약속하는 일은 흔했으나 에제인의 말은 왠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유더는 답을 기다리듯 키시아르를 바라보는 에제인의 얼굴과 여전히 미소를 벽처럼 두른 채 침묵을 지키는 키시아르의 눈을 번갈아 살폈다.
“…무모하다 말씀드렸던 것은 아무래도 취소해야겠군요.”
서로의 의중을 살피듯 맞닿았던 시선을 거둔 키시아르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충분한 계산이 뒷받침된 무모함은 도박이 아니라 승부라고 불러야겠지요. 과연 2왕자께서는 승부사로 불리기에 걸맞은 분이시군요.”
“과찬입니다.”
에제인의 담담한 답에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혹 방금 나눈 대화에서 제가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말을 하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키시아르의 기준에서 에제인 왕자의 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붉은 눈동자 위로 일순 반짝이며 스치고 지나간 빛을 보면서 저런 면만은 참으로 변치 않는 사내라 생각했다.
“괘념치 않습니다. 시작부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제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가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셔야겠지요.”
“하하, 이런. 너무 티가 난 모양이군요.”
키시아르가 속내를 들킨 양 과장된 태도로 웃음을 터트렸다.
“본래의 예정을 틀어 단장님께서 직접 저를 돕기 위해 와주신 것만 해도 저는 충분히 오르 제국 측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서로 간에 이리 따뜻한 말이 오고 가니 시작이 좋군요.”
경쾌하게 답변한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제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일 새벽 곧바로 출발하려면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 2왕자의 침실과 시종들을 가둔 방 외부는 저희 마병단원들이 밤새 번갈아 지킬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내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 다른 의미를 띤 듯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 * *
“왕자님으로 태어나면 언제나 행복하게 사실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키시아르와 에제인이 각자의 방으로 먼저 돌아간 뒤 시종들의 감시와 불침번 순서를 정하기 위해 응접실에 남은 단원들은 당초의 즐거웠던 감정을 다수 잃은 상태였다.
“어떻게 시종 세 명이 전부 배신자일 수가 있어? 왕자님은 정말 훌륭한 분 같으시던데…….”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해진 에문의 중얼거림을 들은 가케인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와 동의의 뜻을 표했다.
“너무 충격받지 마, 에문. 계속 모른 채 두었다면 더 심각해졌을 일을 칸나 덕에 빨리 해결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왕자님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마음이 안 좋아.”
울적하게 코를 훌쩍이는 에문의 곁에 앉아 있는 칸나도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가케인과 함께 에문을 위로했을 그녀도 지금만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불침번 순서를 적은 종이를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유더는 불침번 순서 정하는 일이 끝난 뒤 뒷정리를 하면서도 여전히 멍한 그녀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걸었다.
“칸나. 아까 그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
“아……. 유더.”
칸나가 깜짝 놀란 얼굴로 유더를 돌아보았다가는 이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난 괜찮은걸. 아무렇지도 않아.”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참지 말고 누구에게든 편하게 말해도 돼. 마음에 짐을 남기는 건 임무를 할 때도 안 좋으니까.”
괜찮다는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유더의 표정을 본 칸나가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을 들을 만한 거리에 있는 동료는 없었다. 유더가 칸나에게 다가가자마자 모두 무슨 대화를 하려는지 눈치챈 듯 자리를 피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심각해 보였어?”
“조금.”
“이상하네. 예전엔 이런 거 잘 숨기는 편이었는데……. 마병단에 있다 보니 얼굴 근육이 너무 느슨해졌나 봐.”
뺨을 두어 번 두드린 칸나가 약간 발개진 얼굴로 슬쩍 웃었다.
“그런데 진짜로 그 일 때문은 아니야. 관련이 없는 건 아니긴 한데…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거든.”
“다른 것?”
“응. 우리 마병단에 대해서 말이야.”
칸나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넬라른의 2왕자님을 그렇게 오래 모셨다던 시종들도 배신을 하는데, 마병단은 과연 계속 괜찮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
“뭐… 배신자가 있어 봤자 알아낼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 전에 단장님께 암살자들이 왔던 일도 생각났고… 그때는 모르는 암살자들이 왔었다지만 앞으로는 또 모르는 거니까……. 에잇. 내가 무슨 재수 없는 소릴 하는 거람.”
스스로 말하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또다시 머리를 긁적인 칸나가 유더를 올려다보았다.
“아무튼 이번 일을 통해 내 능력으로 알아낼 수 있는 범위가 아직 많이 모자라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간 함께한 동료들을 의심하는 건 물론 싫지만 내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오늘처럼 빈틈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참으로 고마운 말이었으나 유더는 얼마 전 능력의 발전 때문에 생긴 은밀한 고민을 그에게만 이야기하던 칸나를 동시에 떠올렸다. 정보를 읽는 능력이 점차 발전하면서 원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의 감정 같은 부분까지 때로 읽히곤 한다던 고백을 하던 때 그녀의 표정이 어떠했었던가.
정보를 알아내는 능력은 분명 대단하지만 유더는 그녀가 배신자를 알아내기 위해 스스로 고통받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이전 생의 유더 아일이었다면 떠올리기 힘들었을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유더는 그러한 뜻을 담아 낮게 대답했다.
“마병단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나머지 단원들이나 단장님께 접근하기 전에 내가 처리할 테니까.”
“뭐?”
“봤잖아. 네가 말했던 그 때도…….”
붉은 돌을 회수하기 위해 향했던 곳에서 키시아르가 암살자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유더는 그들을 단신으로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정보를 미리 알아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눈앞에 닥친 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리고 유더는 그런 쪽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마병단은 걱정할 필요 없어.”
칸나가 묘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유더를 보았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잠시 후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맞는 말이네. 내가 우리 단 최고의 능력자신 단장 보좌님을 두고 무슨 주제넘은 고민을 혼자 했담.”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칸나의 표정이 밝아졌으니 되었다 싶었다.
고민을 해결한 칸나는 편안한 걸음으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유더는 그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가 어느새 다시 돌아와 있던 나단 주커만과 마주쳤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돌아와 공작님께 보고를 마치고 그사이 일어난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병단 분들이 내부 감시를 담당해 주신다기에 저희 펠레타 기사단은 숙소 외부를 번갈아 지키기로 했으니, 지원이 필요하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나단 주커만은 에제인 왕자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에 대해 사견을 붙이지는 않았다. 신중한 그다운 행동이었다. 유더의 알겠다는 답을 들은 뒤 나단은 곧 늦은 식사를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유더는 홀로 남아 제 불침번 순서를 재차 확인해 보았다. 그의 순서는 새벽이 깊었을 때쯤이니 가능하면 지금 일찍 쉬어두어야 할 듯했다.
‘…….’
옆방과 맞닿은 침대에 누워도 들려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더는 아까 전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집중하여 지도를 살피던 키시아르를 떠올렸다.
에제인에게는 사라인 대삼림으로 가던 도중 지나치게 위험하다 판단하면 안 갈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리 쉽게 발을 뺄 생각이었다면 지도를 그렇게나 신중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을까.
‘내가 너무 무모하다는 이유로 첫 번째 파견대에 들어오기로 결정했다는 말이 전부는 아닐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모두 나서도 과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임무라 판단했던 건 분명하지.’
그렇다면 에제인은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에게 대체 무엇을 대가로 주기로 약속했을까.
이전 생에서는 아마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니 추측을 해 보려 해도 약간 짐작 가는 부분조차 없었다.
유더는 잠시 나무를 쌓아 만든 낡은 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일어나, 가케인. 이제 내 차례야.”
“…아. 벌써 교대 시간이 되었어?”
새벽이 되어 눈을 뜬 유더는 곧장 겉옷을 챙겨 입고 검을 찬 뒤 복도로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반쯤 졸며 앉아 있던 가케인이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내가 좀 더 해도 괜찮은데.”
“무슨 소리야. 피곤해서 졸고 있었으면서.”
능력을 많이 써서 피곤해했던 건 가케인 쪽이 아니었던가. 유더는 오히려 지나치게 멀쩡해 스스로의 몸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러한 의도를 담아 반문하자 잘생긴 얼굴 위로 붉은 물이 살짝 번졌다.
“아. 그렇구나. 나 때문에 더 빨리 나온 거야? 미안…….”
“이런 일로 미안할 필요 없어. 당연한 거니까.”
평소에는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훌륭한 체격의 소유자인 가케인이지만 능력을 써서 피로해지는 건 그와는 다른 문제였다. 실전에서 그렇게 많이 사용한 일은 처음이었으니 내부의 기운이 엄청나게 소모되었을 것이다.
“들어가서 쉬어.”
“응. 고마워, 유더.”
가케인은 불침번을 서는 동안 시종들의 방과 에제인의 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짧은 보고를 마친 뒤 제 침실로 돌아갔다. 유더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일도 정말 오랜만에 해 보는 기분인데.’
혼자서 긴장을 풀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요령은 있었다. 유더는 오늘 그가 사용했던 능력들을 다시 떠올리고 그동안 해 왔던 수련 내용을 생각하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에제인 왕자의 방 안쪽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