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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44화 (244/805)
  • 244화

    결국 멜번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깊이 숙였다.

    “…입을 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설마 그 예전 일까지 각성자 분께서 읽어낼 줄은 몰라 방심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도 들었으니까요.”

    그는 진실을 말하기 전 머뭇거리다 한 마디를 먼저 토해냈다.

    “다만 저는… 오늘 일로 인하여 왕자님께서 어려움을 겪게 되실까, 오직 그것만이 저어됩니다.”

    그 말에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 듯 움찔거리던 에제인의 입술이 결국 힘없이 다물렸다.

    그도 느꼈을 것이다. 멜번은 세 시종 중 정말로 유일하게 스스로가 아닌 에제인만을 끝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니 변명은 그만두고 말이나 해.”

    “그렇지요…….”

    길게 숨을 내쉰 멜번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사실 처음부터 왕자님의 주변을 살피고 보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궁에 들어온 자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첫 시작부터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왕자님을 모시는 사이 점점 더 진짜 시종으로서 충심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에는 제가 궁에 들어온 목적을 이룰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하여 4년 전 왕자님이 국경에서 공을 세우시고 궁으로 돌아가시던 시기를 기점으로 그들과는 완전히 연을 끊게 된 것입니다.”

    “궁에 간자를 집어넣을 정도의 세력이라면 그리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는 않았을 텐데?”

    “그 정도는 저도 대처할 각오를 하고 저지른 일입니다. 실제로도 여태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멜번은 보기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시종 중에 있을 다른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칸나라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선동하기까지 했으니.’

    그렇다면 과연 멜번을 궁에 집어넣은 이들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훨씬 전의 어린 시절부터 에제인의 곁에 사람을 붙여 감시하려 한 것일까.

    “그래서, 너를 보낸 이들은 대체 누구였지?”

    에제인이 멜번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추측해낸 이름들을 읊었다.

    “다른 왕자들은 아니라고 했고, 보잘것없던 어린 시절부터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했을 이라……. 3왕비인가? 아니면 마렌타 부인?”

    “…….”

    “블롭스 백작? 케멀 장군? 필리아메트 전 시종장?”

    “…….”

    말로는 보잘것없는 어린 시절이었다면서 어쩐지 나오는 이름들이 끝도 없이 많았다. 모두의 표정이 묘해지든 말든 줄줄이 낯선 이름들을 읊던 에제인이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자 기어이 긴 한숨을 내쉬고 잠시 공백을 지켰다.

    “전부 아니라면, 혹시 부왕이신가.”

    그것은 마치 절대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꺼내듯 아스라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이름에 처음으로 멜번 또한 움찔 반응했다.

    “정말로 부왕인가?”

    “아닙니다.”

    멜번이 엎드린 채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정말로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뭐란 말이냐.”

    에제인 왕자의 시선이 멜번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도 아니다, 저도 아니다……. 설령 네가 듀번의 간자였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테니 뭐라도 답을 하란 말이다.”

    “…….”

    그 순간, 멜번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변화했다. 말 한 마디 없었으나 그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뭔가를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에제인이 정답을 눌렀다는 사실이었다.

    “……듀번. 정말로 듀번인가?”

    에제인이 느리게 물었다. 멜번의 어깨가 떨렸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에제인 왕자의 얼굴에서 순간 모든 감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엎드린 시종을 앞에 둔 채 그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는 잊고 있던 이전 생의 짧은 정보 하나를 떠올렸다.

    ‘넬라른의 왕, 에제인 아파난 넬라른의 친모는 듀번과 내통하여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은 유드레인 아일이 마병단 2대 단장이자 오르 제국을 대표하는 사절로서 넬라른의 젊은 새 왕을 만나러 가기 전 읽었던 정보였다.

    듀번과 넬라른은 사라인 대삼림을 사이에 두고 국경이 맞닿아 있는 국가들 중에서도 유독 사이가 나빴다. 몇 십 년이 넘게 국경지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작은 국지전이 일어날 정도였으니 양국 사이의 감정은 그보다 더 나쁠 수 없을 정도였다.

    에제인 왕은 왕자 시절 그를 도와 줄 외척 세력이 거의 없어 고생했다고 알려졌다. 방금 떠올린 정보가 사실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대로라면 2왕자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그가 오랫동안 험한 국경에서 지내다 귀환한 이유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내부 세력을 모으기 힘들었던 이유 또한 단숨에 납득되었다.

    그런 적국에서 어린 시절부터 곁에 간자를 붙여 두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은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이전이라면 그저 타인의 일이라 여겨 생각지 않았을 의문이 유더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제 아랫사람들에게 몹시 관대했던 에제인 왕자와, 거짓을 품고 그를 모시다 결국 진심으로 충심을 품게 된 시종의 모습에서 순간적으로 키시아르와 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검은 장갑 안에 감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키시아르는 그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지만 유더는 달랐다. 모시는 이를 상대로 간직한 비밀의 무게로 따지자면 이 자리에서 그보다 더한 이는 없을 것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긁히는 듯 불편해져 유더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쯤 되어서야 겨우 에제인 왕자 또한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알아낼 것은 이제 모두 알아냈다 생각되니 이제 젠의 구속을 풀어주십시오.”

    왕자는 멜번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몸을 돌린 그가 키시아르에게 부탁을 하자 곧 에문이 어둠을 거두어 갇혀 있던 젠을 풀어주었다.

    “와, 왕자님! 제,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한 번만 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곧장 왕자에게 매달리려던 사내가 엎드려 있는 멜번과 멀지 않은 곳에 눕혀져 있는 페이티의 시체를 본 순간 끅 하고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말을 멈추었다.

    “아……. 아아.”

    “젠, 멜번.”

    그런 시종들을 향해 에제인 왕자가 전에 없던 서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너희들의 처분은 넬라른으로 돌아간 이후 결정하겠다. 그때까지는 자살 및 자해를 금하며, 도망친다면 즉시 죽일 것이다.”

    이전까지는 다소 장난스럽고 인간적이었던 표정 위에 딱딱한 벽이 생겼다. 놀랍게도 그 표정이야말로 유더가 이전 생에 알았던 에제인 왕과 가장 흡사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말해도 주군의 마음을 돌리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는지 젠이 자리에 주저앉아 허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 물러가라.”

    왕자의 축객령을 들은 키시아르가 곧장 단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힌, 핀. 저들을 2층 침실에 가두어 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두 시종은 보기보다 힘이 아주 센 남매의 팔에 잡혀 얌전히 2층으로 끌려갔다. 에제인은 마지막까지 그들의 얼굴을 외면했다.

    “…여러분께서 저를 도와주기 위해 먼 길을 오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마침내 주변이 모두 조용해진 뒤 왕자가 일어나 모두의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왕자의 지나치게 내밀한 속사정을 들은 탓에 내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단원들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아닙니다. 오늘 일이 혹여나 밖으로 흘러나갈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키시아르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왕자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한 답을 내놓은 그가 단원들을 돌아보자, 모두가 일제히 밖에는 절대 언급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 그러면, 넬라른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제 어찌 결정할 생각이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키시아르는 방금 전까지 일어난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그의 그런 태도에 화가 날 만도 하련만, 에제인 왕자는 오히려 힘없이 웃었다.

    “역시 다른 길은 없을 듯하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일정의 변화 없이 사라인 대삼림을 통과해 가실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뜻이로군요.”

    에제인이 아직까지도 탁자 위에 펼쳐져 있던 서부 지도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네. 저는 반드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넬라른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흐음……. 너무 위험하여 마병단이 도울 수 없다 판단하더라도 말입니까?”

    키시아르가 유들대는 미소를 띤 채 질문했다. 유더는 아마도 그것이 키시아르의 방식대로 에제인을 시험하는 방식이리라 짐작했다.

    ‘마병단 입단 시험을 치러 갔을 때 봤던 태도와 너무 똑같아서 약간 그리울 정도군…….’

    “단장님과 마병단은 저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을 뿐, 목숨을 바치러 오신 것이 아님은 알고 있습니다. 이동하던 도중 더 나아가기는 무리라 판단하신다면 제가 어찌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담담하게 대답한 에제인이 잠시 후 키시아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경우 저는 혼자서라도 나아갈 것입니다.”

    “배신한 시종 두 사람과 혼자서 말씀입니까?”

    “예.”

    “에제인 왕자께서는 훌륭한 전략으로 듀번과의 오랜 국지전을 다수 승리로 이끌었다 들었습니다만, 그건 너무 무모한 답이 아닌가 싶군요.”

    “세상에서는 무어라 말하는지 몰라도 저는 그리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다만 단 한 번도 적 앞에서 포기한 적이 없을 뿐이지요.”

    다만 단 한 번도 적 앞에서 포기한 적이 없을 뿐.

    순간적으로 가슴을 뚫는 듯한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에제인은 그 시선 앞에서 그저 당당히 두 발로 서 있었다. 말마따나 뛰어난 검사도 아니며, 마법사도 아니고 아직 각성자조차 아닌 왕자는 곁을 지키던 충성스러운 시종들마저 없는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멋진 말이지만 실질적인 생존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좌우명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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