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아…….”
순식간에 죽어버린 이의 얼굴을 본 단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더는 사제 루산이 분주히 살피는 시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까지 충심을 잃지 않은 척 떠들었지만 결국에는 제 죽음마저도 수단으로 사용하여 에제인을 뒤흔들려 했을 뿐이야. 간만에 저 정도로 이기적인 놈을 보는군. …아니면 이조차도 에제인의 적들이 계획한 요소일 수도 있겠지.’
비뚤어진 욕심을 충심이라 포장하여 제 주군을, 나아가 나라 전체까지 뒤흔들려 하는 놈들을 유더는 이전 생에도 여럿 보았다. 카치안 황제의 주변에도 그런 이들이 상당히 많이 달라붙었던 탓이었다.
그런 이들은 윗사람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을 다해 충성을 바치지만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순간에는 곧장 방향을 돌려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을 주절대며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런 이들을 걸러내기란 칸나처럼 정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닌 이상,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에제인 왕자의 적들은 머리를 꽤나 잘 썼고.’
적들은 에제인이 제국의 힘을 빌리려 결심하면서 내부의 결속이 조금 약해진 때를 귀신같이 노려 가장 가까운 측근들의 배신을 사주했다.
처음부터 왕자를 결정적으로 배신하게끔 만들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들이 지닌 충성심의 허점을 노린 걸 보면 보통 교묘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들의 방식에서는 에제인을 죽이기보다 내부에서부터 와해시키려 머리를 쓴 흔적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다행히 칸나가 이곳에 있었던 덕에 아주 빠르게 진실을 꿰뚫을 수 있었다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왕자가 직접 나서서 배신자를 색출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셋 중 누가 걸려도 그를 뒤흔들 수 있게끔 불화의 씨앗을 뿌렸을 터였다.
예부터 내부의 배신자만큼 사람을, 그리고 집단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없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분열이나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키시아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가진 능력만으로는 그야말로 전설이 부럽지 않을 사내가 가진 힘을 모두 봉인하다시피 지내고 있는 것도 모두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 때문이 아니던가.
‘…아. 방향이 또 그쪽으로 가다니.’
유더는 무심코 떠올리고 만 키시아르에 대한 생각을 머리를 흔들어 지웠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루산이 시체를 모두 살폈는지 죽은 시종의 눈을 감기고 작게 기도문을 외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루산 사제. 사인은?”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묻자 루산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분들께서도 예상하셨듯이 독을 삼켰습니다. 왼쪽 어금니가 검게 변색되어 있더군요. 잠시 살펴보았을 뿐이라 정확히 어떤 독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독약 자체는 우리 모두 언제나 가지고 있었던 물건일 겁니다. 설마 이렇게 사용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만.”
에제인이 느리게 대답하며 죽은 시종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느끼는 감정이 분노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조차 감히 추측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랬군요. 그러면 독약에 대해 더 찾아볼 필요는 없을 듯하니 시체는 일단 수습하여 저쪽으로 옮기지요.”
“네.”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이 말없이 일어나 시체를 들어 옮겼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이는 내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던 멜번뿐이었다.
“멜번.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네가 남았군.”
“…….”
“너도 다른 이들처럼 먼저 할 말이 있거든 해 보아라.”
드디어 왕자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시종에게로 향했다. 멜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꽉 맞잡은 두 손에 꾹 힘을 주었을 뿐이나 유더는 내심 꽤나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설마 저자까지 에제인 왕자의 정보를 넘겼을 줄이야…….’
칸나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그녀가 뭔가를 잘못 읽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나머지 두 시종이야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니 그렇다 쳐도 멜번은 이전에 황궁 정원에서부터 줄곧 에제인의 곁을 지키던 자였다.
오늘 몬스터와 싸우던 도중 재회했을 때도 유더를 보자마자 저보다 먼저 왕자를 구해 달라고 애타게 부탁했으며, 표식도 제일 먼저 꺼내 들 만큼 충성스러운 시종마저 사실은 왕자의 정보를 넘긴 자였다니.
에제인 왕자의 주변에 믿을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가. 볼수록 놀랍고도 입 안이 썼다.
“저는…….”
멜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찌푸린 채 저를 바라보는 에제인을 향해 눈을 들어 올렸다가는 잠시 후 다시 내렸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왜지? 네가 가장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에제인이 어두운 눈으로 나직이 반문했다.
“왜냐하면 나는 네 배신이 가장 이해할 수가 없거든.”
그 말에 멜번의 손이 또다시 작게 떨렸다.
“너는 젠보다도, 페이티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고 몇 번이나 나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려 했었던 충성스러운 자였다. 네가 나를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아무 힘도 없던 시절에 이미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 국경지대에 홀로 보내진 어린 왕자 따위는 식사에 장난질만 해도 금방 죽었을 테니까.”
“…….”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너라면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곁을 지켜주리라 믿었다. 내 측근 중 단 한 사람을 믿을 수 있다면 그건 너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너조차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고? 왜?”
고저가 없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가시 박힌 듯 느껴지는 건 그 안에서 에제인이 느낀 참담함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돈이 문제였나? 아니면 명예? 가족은 없으니 그걸로 협박을 당하지는 않았을 테고. 내가 네게 섭섭하게 대한 적이 있었던가?”
멜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을 기다리던 에제인이 그에 화가 났는지 결국 감정을 일부 드러냈다.
“나를 건강히 넬라른으로 보내야 한다 말했던 너의 그 말도 사실 거짓이었나? 정보를 읽는다는 각성자의 능력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기에 그리 당당히 표식을 꺼냈지?”
“…….”
“대답해라, 멜번. 나를 더 이상 모두의 앞에서 수치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면.”
“제가…….”
그제야 멜번이 겨우 입을 열어 더듬더듬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소용없을 텐데 어떻게 입을 놀리겠습니까. 다만… 제가 젠과 페이티에게 했던 말은 거짓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멜번이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저는 누군가에게 제안이나 협박을 받은 적도 없었고, 왕자님께서 제게 섭섭히 대해주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젠과 페이티가 누군가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사실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고 원통합니다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에제인의 눈가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서렸다.
“지금 네가 억울하다고, 내 정보를 넘겼다는 마병단원의 말은 거짓이라고 그리 주장하려는 것인가?”
그러자 멜번은 또다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에제인의 눈동자 위로 고통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차라리 돈 때문에 그랬다고, 내가 가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해. 이런 식으로 기만해 보았자 무엇을 얻지?”
“저는 왕자님을 기만할 마음이…….”
“그러면 대체 네가 왜, 어째서 나를 배신했는지를 말해!”
멜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더는 이번에야말로 두 번째 시종과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멜번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멜번이 입을 열지 않자 결국 에제인이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칸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군. 다시 한 번 힘을 빌려 주겠…….”
“제, 가 왕자님의 정보를 넘긴 것은… 4년 전이… 마지막입니다.”
힘을 빌려 달라는 말이 끝나기 전, 끊어질 듯 작은 목소리가 멜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왕자님께서 국경을 떠나 왕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셨던 그때… 저도 왕자님을 기만하던 짓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저는… 왕자님을 배신한 죄에서 깨끗한 자는 아닙니다만 정말로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에제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른 이들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믿지 않는다면 그저 조금 자세한 변명일 뿐이겠지만 어쩐지 유더는 그가 진실을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칸나가 말한 것도 ‘세 시종 모두 어떤 이유로 왕자의 정보를 넘긴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을 뿐이었던가?’
칸나는 시종들이 정보를 넘긴 대상과 시기까지 같다고 확언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부분은 확실히 읽어내지 못했기에 그러했을 터였다.
칸나가 능력으로 읽어내는 정보는 정확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유더가 생각한 부분을 다른 이들도 깨달았는지 놀라움에 가득 찬 눈빛이 여기저기서 오갔다. 칸나 또한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세 시종이 모두 동시기에 같은 상대에게 왕자의 정보를 넘긴 게 아니었고 멜번의 말이 사실이라 가정하면 칸나가 읽어낸 정보에도 해당되지만 그의 말 또한 거짓은 아니었다.
“4년 전?”
“……예.”
“그 이전부터 네가 이미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고? 아니. 애초에 그때는 아무도 나를 중요한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던 때였을 텐데 대체 너는 누구에게, 언제부터 내 정보를 넘겼다는 거지?”
멜번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에제인이 날카로우면서도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네가 그 일을 관두었다 말했음에도 죽지 않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건 둘 중 하나겠지. 상대의 정체가 그만큼 충격적이거나, 아니면 강제로 그 부분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했거나.”
“…….”
“어느 쪽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