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표정이 굳은 시종들이 서로의 시선을 피해 머뭇거리며 땅만 쳐다보았다. 그 불편한 침묵을 깬 이는 세 시종 중 유일하게 에제인에게 아직까지 한 마디도 반발하지 않았던 멜번이었다.
“…정말로 우리 중에 배신자가 없다고 믿는다면 뭘 망설이겠어.”
잔뜩 잠긴 목소리로 흘러나온 나직한 한 마디에 다른 두 시종이 그를 쳐다보았다.
“우린 모두 왕자님을 위해 죽어도 좋다고 맹세하고 여기에 왔지. 왕자님께서는 무슨 수를 쓰시든 건강히 넬라른으로 돌아가셔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분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그렇다면 지금이 그 마음을 증명할 때지.”
멜번이 품속에 손을 넣어 표식을 꺼냈다. 그것은 우유처럼 뿌연 빛을 띤 마정석 위에 음각으로 문양을 새겨넣은 생김새로, 언뜻 보아서는 허리춤에 매다는 장신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
유더는 그가 표식을 쥔 손을 조금씩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떨림의 이유가 단순히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멜번이 표식을 꺼내자 뒤이어 다른 시종들도 머뭇거리며 표식을 꺼냈다. 칸나는 그 중 가장 왼쪽에 있던 시종의 표식부터 받아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내내 에제인의 명령에 반발했던 자로, 여전히 의문에 찬 표정을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이걸로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안에 깃든 정보를 읽어낼 거예요.”
“정보를 읽는다고요? 그게 무슨…….”
칸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곧장 표식을 양손에 모아 쥔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유더는 그녀의 손 안쪽에서 미약하게 일렁이며 흘러나오는 기운의 흐름을 보았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그 기운이 강해질수록 칸나의 손에 들어가는 힘도 더욱 강해졌고, 감은 눈꺼풀이 움찔움찔 떨렸다.
잠시 후, 칸나가 눈을 떴다. 찌푸린 미간 사이로 일순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이 표식, 2왕자님께 받은 물건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왕자님의 침실 시종으로 선택받은 날 받은… 표식입니다.”
시종이 더듬대며 대답했다.
“넘겨주어서는 안 되는 물건. 그렇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건 누구나 추측할 수 있죠.”
“그런데 당신은 그런 중요한 표식을 왜 누군가에게 건네주었죠?”
“예?”
매서운 빛을 띤 새파란 눈동자가 시종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허옇게 질린 시종이 숨을 삼키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군요.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넘겨준 적이 있잖아요. 대신 뭔가를 받았죠. 종이에 적힌…….”
“이, 이보십시오. 정보를 읽는다느니 하면서 아무 말이나 떠보려는 모양인데, 저는 그 정도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자가 아닙니다. 배신자를 찾아내려면 좀 더 말이 되는 방법으로……!”
“제국을 향해 떠나기 전날, 보름달이 뜬 밤. 발루 궁의 서쪽 회랑 끝 눈먼 현자의 조각상 앞. 므셋디의 땅! 그래도 모른다고 할 건가요?”
칸나의 입을 막으려는 듯 큰 소리로 고함치려던 시종이 이어진 말에 순간적으로 우뚝 멈추었다.
“어……떻게?”
입을 떡 벌린 그의 목 안에서 쌕쌕거리는 숨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는 의심에 찬 눈으로 칸나의 얼굴과 에제인 왕자, 그리고 동료 시종들을 정신없이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 누가 제국에 알렸지? 누구냐. 누가 나를 모함하려고…….”
그는 칸나가 정보를 읽은 게 아니라 누군가 그에 대해 제보했다 믿는 듯했다. 정신없이 제 결백을 주장하는 남자의 부릅뜬 눈꺼풀 위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왕자님. 저는 아닙니다. 저 제국인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저는……!”
“……므셋디는 차기 관리관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지역 중 한 곳이었지.”
그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채 앉아 있던 에제인 왕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나를 배신하면 너에게 그 땅을 준다고 하더냐, 젠?”
“아닙니다. 왕자님!”
시종이 곧장 부르짖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제국으로 떠나기 전날 킨디를 통해 저를 불러내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자마자 아무 말도 듣지 않고 곧장 돌아왔습니다! 결백합니다!”
“…그렇다면 데일라. 데일라가 누구죠?”
그러나 시종의 외침은 또다시 들려온 칸나의 말 때문에 이내 멈추고 말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에제인 왕자가 느리게 대답했다.
“젠의 아내의 이름이군.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 아아.”
시종이 벌벌 떨며 에제인과 칸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칸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분도 이 표식을 빌려 간 적이 있었네요. 이유는… 그 표식을 대고 당신 대신 도박 빚을 유예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걸 숨기고 싶어 했어요. 그것도 오래되지는 않은 일이에요. 그렇죠?”
“…….”
“그런 수치스러운 일은… 왕자님께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라 말했죠.”
칸나의 곧은 시선이 얼빠진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시종을 겨냥했다.
“이것도 아니라고 할 건가요?”
“……왕자님!”
젠이라는 이름의 시종이 얼굴을 가린 채 무릎을 꿇었다.
“하, 한 번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한 번이면……. 떠나기 전에 왕자님을 수행할 인원에 대해서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이번 일과는 하나도 관련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결국 그는 무너져 내렸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에제인 왕자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동안, 키시아르가 재빨리 에문에게 눈짓을 했다.
“에문. 어둠 속에 너를 제외한 대상을 잠시 가두어 두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었지.”
“예. 가둬 두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키시아르의 뜻을 알아들은 에문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시종의 머리 위에서부터 베일처럼 흘러내린 칠흑 같은 어둠이 그의 모습을 감추고, 무어라 외쳐대던 비명까지 삼켜 버렸다.
같은 자리에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는, 서로를 인지할 수 없게 된 어둠 속의 덩어리를 보며 모든 이들이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에제인 왕자가 버석한 목소리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정보를 읽는 능력이라고 하였을 때는 설마했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찾아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군요.”
“죄송하지만 2왕자, 인사는 아직 이릅니다.”
키시아르가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했다.
“운 좋게 첫 번째 사람이 배신자로 밝혀졌다지만, 그것이 ‘처음만’일지 ‘처음부터’일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방금 그자가 했던 말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첫 번째 시종 젠은 자신이 배신한 것은 사실이나, 암살자가 올 만한 정보까지는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배신자가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
“물론 왕자께서 충분하다 생각한다면 마병단은 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만.”
냉혹하게 들릴 만한 발언에 에제인 왕자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고통스러운 무표정 위로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결국 왕자가 택한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예. 단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성급한 모습을 보여 부끄럽군요. 부디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칸나, 계속하도록.”
남은 두 시종의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칸나 또한 부담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는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두 시종을 돌아보다 멜번보다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다른 시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말없이 그녀의 손 위에 표식을 올렸다.
칸나는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힘을 사용했다. 정보를 읽느라 잔뜩 찌푸린 얼굴 위로 열이 오르며 땀이 맺혔다.
“…….”
잠시 후 눈을 뜬 그녀의 시선이 두 번째 시종에게로 향했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던 칸나가 입술을 깨물다 고개를 돌려 멜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이분의 표식에서 읽은 정보를 말하기 전에 그쪽에 계신 분 것도 바로 이어서 읽어도 괜찮을까요?”
두 번째 표식에서 대체 무슨 정보를 읽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누군가가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십시오.”
멜번이 자신의 표식도 칸나에게 건넸다. 세 번째 표식까지 쥔 칸나의 손 안에서 아지랑이 같은 힘이 마구 뻗쳤다. 작은 손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저절로 경련하며 속눈썹이 움찔움찔 떨렸다.
“으… 후우, 하아.”
잠시 후, 마침내 힘이 사그라지며 칸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꺼풀 안에서 드러난 푸른 눈은 이유 모를 감정으로 일렁이는 중이었다.
그녀는 잠시 저를 외면하고 있는 에제인 왕자의 얼굴을 본 뒤, 키시아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부 읽었습니다, 단장님.”
“그래. 무엇을 알아냈지?”
칸나는 드물게도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답을 멈추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시종분들 모두, 어떤 이유로 왕자님의 정보를 다른 이들에게 넘긴 적이 있었습니다.”
“…….”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답에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당사자인 시종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인가?”
키시아르 또한 충격적인 결과라 생각한 듯 드물게 다시 한 번 답을 확인했다. 칸나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의 시선이 두 번째 시종에게로 향했다.
“저분은 제게 표식을 주시기 전 이미 포기하고 있었으니 직접 말씀하시는 편이 좋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군요.”
두 번째 시종은 자포자기한 듯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다가는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마자 에제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 페이티, 오랫동안 왕자님을 모시며 단 한 번도 자랑스럽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에제인이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작게 반문했다.
“왜 배신했지?”
“배신이 아닙니다. 왕자님께서 가시는 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제가 바로잡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시종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왕자님께서 제국의 힘을 빌리려 하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 판단하셨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결코 넬라른을 바로 일으켜 세울 수 없습니다. 왕자님만은 그러셔서는 안 되셨습니다.”
“그래서 내 정보를 넘겼다고?”
“……왕자님께서 위험해지시기를 바란 건 아닙니다. 적당히 발목을 잡을 이들을 만나 일을 실패하신다면 다시 바른 방향으로 가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몬스터가 나타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만……. 결국 일이 이리 되었으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아직도 충성에 가득 찬 듯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찬 감정은 주군을 제 뜻대로 움직이려 하다 엇나가버린 이의 아집과 분노였다. 에제인이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나는 평소부터 너의 과감한 성정을 높이 평가하여 곁에 두었다. 이번 제국행에 대해서도 그 필요성을 몇 번이나 설명하였고 모두 납득했다 여겼다. 그것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저 또한 충심으로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국과 거래를 하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입니다. 차라리 이전처럼 정면으로 다른 왕자님들과 대치하려 하셨다면 저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넬라른의 죄 없는 국민들은?”
에제인이 메마른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동안 몇 년이나 옆 나라들과의 소요전과 어지러운 정세에 지쳐 싸울 힘조차 잃어버린 우리의 국민들은 어쩌란 말이지? 다른 방법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왕자들끼리의 헛된 싸움에 희생하라고? 너는 정녕 그게 옳다는 뜻인가?”
“이제 와 말을 더해 보았자 결국 배신자의 헛된 지껄임밖에 더 되겠습니까?”
페이티라 이름을 밝힌 시종이 몸을 웅크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실패하였으니 왕자님을 두 번 다시 모실 수는 없겠지요.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고개를 숙인 시종이 감정에 북받친 듯 몸을 떨었다. 그 순간, 멀리 떨어져 이 상황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던 사제 루산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잠깐. 무언가 이상합니다. 저 사람……!”
“우욱, 컥!”
그러나 루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종은 검은 피를 울컥 토하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독을 삼켰나!”
“어서 몸을 바로 뒤집어!”
그러나 곁에 있던 이들이 다가가 몸을 뒤집었을 때 그는 이미 절명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