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단장님?”
“……아.”
그제야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서 시선을 돌린 키시아르가 유더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언제 왔지?”
“식사 시간이 되어 문을 계속 두드려도 답이 없으시기에 열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혹 몸이 안 좋으십니까?”
그토록 예민한 사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는 건 여간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주기가 지나자마자 곧장 몸을 혹사하며 서부로 온 게 역시 무리한 일이 아니었을까.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묻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몸은 문제없어. 잠깐 생각을 좀 한다는 것이 그만 너무 집중한 모양이야.”
유더는 그가 보고 있던 지도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서부 쪽 지도인 듯한데…… 곳곳에 붉게 표시된 건 뭐지?’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키시아르는 지도를 완전히 접었다. 어차피 중요한 사안이라면 궁금해하지 않아도 추후 알게 되리라. 유더는 지도에서 관심을 거두었다.
“배도 고플 텐데 답이 없으면 먼저 가서 먹고 있지 그랬나. 내가 착석하지 않는다고 아래사람들까지 식사를 하지 않는 그런 딱딱한 규칙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배는 별로 고프지 않고, 단장님께서 식사를 거르지 않으시는 쪽이 당연히 우선입니다. 주커만 경도 같은 부분을 걱정했습니다.”
“아……. 그렇군. 나단이 부탁하고 간 건가.”
눈치 빠르게도 전후사정을 알아챈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먹으러 가지.”
“네.”
“오는 동안 피곤하지는 않았나? 능력을 많이 썼을 텐데.”
키시아르가 문을 열고 나가며 물었다. 유더는 그의 뒤를 따랐다.
“오히려 너무 기력이 넘쳐서 문제였으니 괜찮습니다.”
진심 어린 답이었으나 키시아르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었는지 잠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그래 보이기는 하더군. 그간 단에 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갇혀 있는 기분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랜만에 밖에서 반점의 고통이나 제약 없이도 마음대로 능력을 쓰느라 해방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단에서 일을 하는 동안 하기 싫은 일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느꼈던 적은 없었다.
혹 제가 그동안 일을 하기 싫은 티를 냈었나?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느리게 대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만…. 혹 제 태도에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까.”
“아니. 아무 문제도 없었지.”
키시아르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문제는 항상 내게 있고.”
농담인 듯, 아닌 듯 의중을 알기 힘든 대답이었다. 유더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키시아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단장님?”
덩달아 멈추어 선 유더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은 사내가 머리칼 위쪽에서 무언가를 떼어냈다. 먼지인 줄 알았던 그것은 자세히 보니 은빛 머리칼 조각이었다. 말을 함께 타고 오는 동안 에제인의 머리칼이 그리 옆에서 날리더니 기어이 한 가닥이 달라붙었던 모양이었다.
“신경이 쓰여서.”
“……말씀만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제대로 씻지 못한 데다 비까지 맞은 몸이다. 묻어 있는 게 에제인의 머리칼 조각만은 아닐 터인데 거기에 서슴없이 직접 손을 대다니, 황족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러다간 정말 언젠가 불경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지.’
하지만 전처럼 단호하게 피하지 않는 제 쪽도 문제는 문제였다. 유더는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넬라른 2왕자와 함께 말을 타고 오는 동안 이야기를 꽤 하는 것 같던데.”
“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전에 황궁에서 마주쳤었던 때부터 그쪽은 너를 꽤 좋게 본 모양이지만… 오면서 보니 어떻던가?”
어떻냐는 건 에제인을 어떻게 느꼈는지 물어보는 것인가.
유더는 말을 타고 오는 동안 나누었던 에제인과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아직 왕자이면서도 케일루사 황제의 협력을 얻어낼 정도로 능수능란한 외교능력을 보여준 데다, 앞으로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함께 해야 할 사람이니 가까이서 그를 여러 번 본 유더의 평이 궁금한 모양이지만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오늘 에제인과 나눈 대화라 해 보아야 각성자가 부럽다느니, 마병단이 과소평가된 것 같다느니 하는 말이 전부가 아니던가. 유더가 가진 에제인에 대한 인상은 아직 대부분이 이전 생에서의 기억과 정보 쪽에 편중되어 있었기에 그것을 지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처음 뵈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마병단과 각성자에게 여전히 큰 흥미를 지니신 듯 보였습니다. 제국에 오기 전부터 마병단에 관심을 두셨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그리고 또 무얼 말해야 하는가.
그가 미래에 손에 꼽힐 만큼 강력한 각성자가 될 것이며 그 힘을 통해 넬라른의 국력을 오르 제국과 비견해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한 나라로 성장시킬 명군이 되리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인재를 중요시하여 사형을 앞둔 유더에게도 마지막까지 구명의 손을 내밀었던 그런 성격은 이때부터 이미 싹이 있었던 모양이라 느꼈지만 그 부분도 물론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유더는 최대한 오늘 에제인과의 만남만을 떠올리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부상을 입으셨음에도 충격을 금방 떨치고 일어나시는 것을 보면 강한 성정을 지니신 분인 듯합니다.”
“흠. 또?”
“……고작 두 번 만나뵈었을 뿐이라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두 손을 드는 기분으로 말을 더 짜내는 걸 포기하고 대답하자 키시아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도 내 보좌가 그를 제법 좋게 본 모양인데.”
“굳이 말하자면 그분께서 저를 좋게 보아주신 것이겠지요.”
유더가 키시아르의 보좌라고는 하지만 그는 현재 갓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데다 이제 겨우 경의 칭호를 받았을 뿐인 햇병아리였다. 마병단에 들어온 지는 1년도 되지 않았고, 그 마병단 또한 이제 막 태동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평민 출신인 그가 감히 한 나라의 왕자를 평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키시아르나 되니 내게 이런 걸 묻기도 하는 거겠지만…….’
“이 임무는 왕자를 돕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나, 동시에 그가 누구인지 살피는 자리이기도 하지.”
떠들썩한 식당 쪽을 앞두고 키시아르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가 왕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인지, 폐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계속 볼 거야. 그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 쪽을 판단하려 하겠지.”
“…….”
“그러니까, 조심하게.”
마지막으로 슬며시 어깨를 쓰다듬은 키시아르가 이내 먼저 식당으로 들어섰다. 긴 테이블의 끄트머리에서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던 단원들과 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늦으셨습니다.”
“잠깐 보고받은 부분을 살피느라. 앉아서 계속 들게.”
“네!”
유더는 그의 뒤를 따르다 가케인이 비워 둔 옆자리에 착석했다. 상석으로 향한 키시아르가 손을 대지 않은 수프와 빵 앞에 앉자 바로 곁 의자에 앉아 있던 에제인 왕자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죄송하게도 저희가 먼저 식사를 들었습니다.”
“예를 지키는 자리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급히 준비한 음식들이라 입에 맞으실지 걱정이군요.”
“아닙니다. 굉장히 맛있습니다. 워낙 빠르게 길을 떠나오느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었는데, 이리 따뜻한 음식을 간만에 입에 넣으니 피로가 전부 풀리는 기분입니다.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에제인 왕자의 인사에 그의 시종들도 덩달아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러시다니 음식을 준비한 이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어떻게 대화만 나누고 계신데도 저쪽은 저렇게 다른 세계 같을까?”
유더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칸나가 신기해하는 얼굴로 몰래 중얼거렸다.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드시고 있는데 말이야.”
“소리를 내지 않고 드실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니겠어?”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술과 단원 에문이 배부른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나무 그릇에 나무 수저로 먹어도 소리가 날 텐데 저쪽은 하나도 소리가 안 나잖아.”
“그런가……. 그것도 그렇네.”
“유더. 칸나가 네 수프를 같이 받아오면서 고기를 많이 담아줬어.”
칸나와 에문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이 바로 곁에서 가케인이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니까 많이 먹어.”
그 말에 수저로 한 번 그릇 안쪽을 훑자마자 느껴지는 고기 덩어리들의 존재감이 묘하게 가슴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유더는 가케인과 마찬가지로 작게 답해주었다.
“응. 고마워.”
“뭘.”
굶주린 엘더 남매 몰래 고기를 많이 넣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고 가케인이 쑥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내가 시선을 끌고, 칸나가 실행했지. 안 들켜서 다행이었어.”
밥을 잘 먹은 덕인지 아까는 비를 맞아 풀이 죽은 장미 같던 머리칼과 눈동자에 생기가 넘쳤다. 유더는 그의 별명이 살아있는 장미라던 이야기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때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오늘 보니 이해가 되었다.
식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모두 그릇을 비운 것을 확인한 뒤 키시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제인 왕자에게 곧바로 응접실 쪽으로 향하자고 제안했다.
“가장 넓은 장소가 그곳이라고 하니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쪽에서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유더는 곧장 키시아르의 뒤를 쫓았다. 나단 주커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가 단장의 곁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응접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키시아르는 곧장 유더에게 명을 하나 내렸다.
“유더.”
“네.”
“내 침실에서 아까 테이블 위에 두고 온 지도를 가져다주겠나.”
유더는 뒤따라 들어오는 단원들을 훑은 뒤 고개를 끄덕이고 위로 올라갔다. 키시아르의 침실에 있는 지도는 하나뿐이었다. 그가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할 만큼 집중하여 보고 있던 그 종이가 아직 반으로 접힌 채 테이블 위에 잘 놓여 있었다. 유더는 그것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사이 대화는 이미 진행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