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그들이 본래 목적지였던 작은 도시에 들어서기 전, 기어이 흐리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병단원들은 제각기 단복 겉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고, 넬라른인들도 망토를 둘러 머리가 직접적으로 젖지 않도록 방비했다.
비가 오는 건 제법 불쾌한 일이었지만 한 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도시를 방문하려는 이들이 적어진 탓에 본래대로라면 도시를 꼼꼼히 지켰을 경비병사들의 수가 평소에 비해 극도로 적다는 사실이었다.
“진주탑에서 의뢰한 임무를 위해 파견된 붉은나비 기사단…과 조력자로 고용된 용병들……. 좋소. 신분패와 증명서 모두 확인했으니 들어가시오.”
비를 막기 힘든 관문 곁에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 서 있던 병사들은 나단이 내민 가짜 신분패만 대충 확인하고 빠르게 통과 선언을 내려주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도 밖에 나온 이가 없어 안개질풍마의 특이한 모습이 눈길을 끌지도 않았다.
“본래는 뒷문 쪽 산을 이용하여 좀 돌아서 들어올 생각이었는데, 비가 온 덕에 한결 편하게 되었군.”
눈에 띄는 외모를 망토와 모자로 깊이 감춘 키시아르가 시원하게 중얼거리며 말을 몰았다. 그들은 곧 도시를 가로질러 인가가 거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어느 낡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이곳이…….”
“이번 일을 위하여 서부에 파견한 펠레타 기사단에서 미리 준비해 둔 안전가옥입니다.”
칸나의 혼잣말에 친절히 대답해 준 나단 주커만이 말에서 내려 저택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십시오. 저는 말들을 안전한 곳에 들여보내고 나서 따르겠습니다.”
일행은 모두 말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오랫동안 관리를 잘 하지 않은 듯 묵은 먼지 냄새가 났으나 여러 사람이 묵어도 될 만큼 충분히 넓었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 두 사람이 키시아르의 앞에 무릎을 꿇고 기사식으로 인사를 했다. 평상복을 입고는 있으나 허리에 검을 찬 모습이나 절도 있는 기세를 보면 펠레타 기사단의 일원들임에 틀림없었다.
“너무 늦으시기에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 무사히 와 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중간에 잠시 일이 있었지. 자네들이야말로 수고가 많았네.”
간단하게 기사들의 노고를 치하한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에제인 왕자 일행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사정임은 알고 있습니다만, 비에 젖은 몸으로 곧장 본론을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일단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에제인이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행은 펠레타 기사들의 안내를 따라 하룻밤 묵을 방을 안내받았다. 유더는 단장 보좌로서 키시아르의 바로 옆방을 배정받았다. 침대가 둘 있는 것을 보면 다른 한 자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나단 주커만의 자리인 듯했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듯한 침대를 바라보다 아직도 물이 떨어지는 망토 끝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망토만 젖고 안은 깨끗해서 다행이군…….’
젖은 망토를 벗어 벽에 건 뒤 침대에 앉아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오늘 내내 그리 힘을 많이 썼으니 당연하겠지만, 반점이 제법 퍼진 상태였다.
‘하지만 색은 이제 거의… 조금 붉어진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아.’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아도 아픈 부분은 전혀 없었다. 이 정도면 당장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듯했다.
‘평소보다 힘이 더 강하게 잘 발현되는 듯 느껴진 건 여전했지만 일에 지장이 왔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단순히 생각하면 키시아르의 힘을 흡수한 이후 전보다 더 강해졌다고 좋아해도 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몸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기꺼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일 경, 안에 있습니까?”
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십시오.”
장갑을 도로 끼고 대답하자마자 열린 문을 비집고 나단 주커만이 얼굴을 내밀었다.
“저녁 식사가 곧 전부 준비될 예정이라고 하니 공작님을 모시고 함께 가십시오. 저는 펠레타 기사들과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식사를 이곳에서 하지 않고 곧장 다시 나가보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바로 몸을 돌릴 듯했던 나단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유더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묻지 못했던 것이 있는데 하나 물어보아도 괜찮습니까?”
“네.”
그의 의문 어린 눈빛을 보니 대충 무슨 질문을 할지 짐작은 갔다. 유더의 깔끔한 답을 들은 나단 주커만이 이내 목소리를 낮추어 질문을 이어나갔다.
“저희가 아까 해치운 몬스터의 약점이 꼬리 아래 묻힌 본체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병단에서 가르치는 몬스터 도감에는 당연히 없을 테고, 저희가 수집한 정보에도 존재하지 않던 몬스터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리 알고 있던 듯 보이시더군요.”
역시 이 질문일 줄 알았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미리 생각해 둔 대로 답해 주었다.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맞으니까요.”
나단의 눈동자 위로 놀라움이 떠올랐다.
“알고 있으셨단 말입니까? 어떻게……?”
“저는 그 몬스터를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 이미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때의 경험으로 그 몬스터의 본체와 약점에 대해 알게 된 것뿐입니다. 그때야 경험이 적어 그리 희귀한 몬스터인 줄은 몰랐습니다만……. 오늘 다시 보니 기억이 나더군요. 제가 눈이 좀 좋은 편이지 않습니까.”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 마주친 몬스터도 말하자면 지금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 마주친 건 맞고, 유더는 본래도 처음 보는 몬스터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 능한 편이었다. 직접적으로 몬스터에게 힘을 쓸 수 없는 대신 관찰만은 질리도록 하다 보니 생긴 요령 아닌 요령의 결과물이었다.
“그래도 기억이 빨리 난 덕에 아무도 다치지 않고 그 몬스터를 잡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
뻔뻔하고도 반박할 길이 없는 주장에 나단이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충직한 기사의 눈 속에서 서서히 의문이 사라지고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함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아일 경의 능력이라면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이었더라도 몬스터를 수십 정도는 해치우실 수 있으셨겠지요.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군요.”
미안합니다, 주커만 경. 사실 이전 생의 저였다면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 혼자서 몬스터를 수십 마리 잡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유더는 차마 아직 말해줄 수 없는 답을 삼키며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단이 나간 뒤 유더는 속으로 열을 느리게 세었다. 일어나 다시 문을 열어 내다본 바깥쪽에 나단 주커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썩혀서 같은 편이 피해를 보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려 돌아와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말을 할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변명은 그저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는 말뿐이었다.
언제쯤 제 약점에 대해서도 제대로 밝혀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멀리서 수프 냄새가 고소하게 풍겼다.
“와. 이게 얼마 만의 제대로 된 음식 냄새람.”
“난 뱃가죽이 찢어질 것 같아.”
맛있는 냄새를 귀신같이 파악한 단원들이 건너편 복도에서 곧장 문을 열고 뛰쳐 나왔다. 모두 비를 닦아내고 잠시 휴식을 취해서인지 이전과 달리 몹시 표정이 밝았다.
“유더! 유더도 같이 먹으러 가자.”
“나는 단장님을 모시고 가야 해서. 먼저 가.”
“유더는 단장님이 안 드시면 밥을 못 먹으러 가? 단에서는 안 그랬잖아.”
“지금은 임무 중이고… 내가 단장님의 보좌니까.”
나단 주커만의 부탁도 있었지만 그 점은 생략했다.
“나라면 절대 못 참아!”
“내가 보좌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단장을 바로 옆에서 모셔야 하는 보좌의 비애에 안타까움을 느낀 듯 엘더 남매가 사이좋게 유더의 등을 두드려준 뒤 후다닥 복도를 따라 뛰어갔다. 그 뒤를 따라 가케인과 칸나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유더의 어깨를 두들기며 각기 작은 속삭임을 남겼다.
“유더. 같이 있어 줄까?”
“맛있는 게 있어도 다 안 먹고 남겨둘게.”
“……괜찮아. 둘 다 고마워.”
설마 단장인 키시아르가 먹기도 전에 음식이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인사였다. 유더는 방금 전까지 냉정하게 고민하던 생각들을 순간적으로 잊고 두 동료를 향해 웃고 말았다.
“단장님. 식사를 드시러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모든 동료들이 식사를 위해 출발할 때까지도 키시아르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더는 잠시 기다리다 그의 침실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내었다.
“단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등잔불을 켜둔 채 탁자 앞에 앉아 무표정하게 지도를 들여다보는 사내의 옆모습이 보였다.
“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