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유더는 손을 내밀어 에제인이 말에 편히 올라탈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안색을 살폈다. 젊은 왕자의 눈빛은 아까 막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투와 부상의 충격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도 금세 빈틈을 감추고 단단해진 모습을 보면 과연 남다른 인재였다.
“공작 전하… 아니, 단장님께 듣자 하니 당신의 직책이 단장 보좌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에제인 또한 유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듯 질문을 했다.
“예.”
“젊은 나이에 벌써 경의 칭호까지 하사받았다니 정말 대단한 인재였군.”
“아닙니다.”
“그리 겸손하지 않아도 돼. 능력이 뛰어난 건 자랑할 일 아닌가.”
“저 말고도 경의 칭호를 받은 마병단원들이 이 자리에 많습니다.”
담담한 대꾸를 들은 에제인은 그건 몰랐다며 몹시 신기해했다. 키시아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유더에 대해서는 들었어도 나머지 단원들의 정보까지는 못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당신 호칭은 뭐라고 하면 될까. 아일 경? 아일 보좌?”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부디 편하신 쪽으로 불러 주십시오.”
이전 생에는 아일 단장으로 불렸었지만 지금의 마병단 단장은 그가 아니었다.
“흐음. 그러면…… 유더?”
유더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안개질풍마의 말갈기를 지나치게 세게 움켜쥘 뻔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지 에제인이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 목숨을 구해준 이이니 이번 기회에 더욱 가까이 알고 지내고 싶어서 말이야. 어렵다면 말하게.”
왕자가 그리 부르겠다는데 제가 무어라고 거절하겠는가.
게다가 에제인은 그냥 일개 소국의 왕자가 아니었다. 이전 생처럼 일이 돌아간다면, 이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군으로 평가받게 될 제왕의 싹이자 강력한 힘을 지닐 각성자가 될 사람을 상대로 특별히 척을 지고 싶지 않은 건 유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또다시 반복되어 닥쳐올지 모를 미래를 대비하려면 더욱 그렇지…….’
비록 이전 생의 에제인 왕은 세계가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유더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거나 쉬이 도와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마지막까지 실력을 높이 평가해 죽음을 막아주려고는 했던 사람이었다.
유더는 간만에 제가 참으로 정 없고 계산적인 놈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좋아. 그러면 유더로.”
에제인이 낮게 웃었다.
“목숨을 구해 준 인연의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멜번과 자리를 바꾼 보람이 있었어.”
‘…자리를 바꾸어?’
아무래도 에제인 왕자는 그를 구해 준 유더에게 이전보다 훨씬 대단한 호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유더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며 무어라 말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과연 몸에 흙더미를 덮어씌운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도 이리 호감을 보여줄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각성자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이 워낙 커서 그런 모양이니 저러다 말겠지.’
“유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나누었던 마지막 말, 기억하나?”
“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이거 섭섭한데. 각성자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나누기로 약속했었잖아.”
“아…….”
일방적으로 그 비슷한 이야기를 에제인이 하기는 했으나 유더가 거기에 답을 한 기억은 없는데, 어느새 에제인의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바뀐 듯했다. 유더가 침묵을 지켰으나 젊은 왕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마병단에 한 번 구경 삼아 찾아가 볼 생각이었기에 했던 말이었는데 갑작스럽게 귀국해야 할 일이 생겨 그러지 못한 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하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마주친 걸 보면 역시 인연은 인연인 거겠지.”
“그러셨군요.”
“그때 당신이 황궁 정원에 있었던 이유는 역시 보좌 일 때문이었나?”
유더는 순간 멈칫한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예. 뭐…….”
사실은 사고처럼 닥쳐온 2성 발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궁에 며칠 머물렀을 뿐이나 그것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부분은 더 자세히 묻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이따가…….”
유더의 속내를 모를 에제인이 무어라 말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앞쪽에서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제인 왕자.”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우나 대화의 맥을 끊을 만큼은 단호한 부름이었다.
“제 부관이 아까 말한 대로 암살자들의 사체 조사를 마무리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역시 별다른 증거는 남기지 않았더군요. 이대로 흔적을 지우고 떠나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그가 적절히 말을 건 덕분에 에제인과의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유더는 내심 다행이라 여기며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마치 그 순간을 노린 것처럼 키시아르의 눈이 정확히 이쪽을 향했다.
“…….”
잠시 후 다른 이들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살짝 키시아르가 눈을 찡긋하고는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도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유더는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겨우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키시아르는 우연히도 그 순간 말을 건 게 아니었다. 에제인과의 대화가 유더에게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도록 명백히 의도를 가지고 끼어든 것이었다.
‘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를 듣고 현장을 점검하는 바쁜 와중에 이쪽에서 나누는 작은 대화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도 하지만 키시아르라면 가능했다. 나단 주커만과 유더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으나 그는 닫힌 문 안에 누워서도 바깥을 지나는 이들의 기척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2성 발현 때의 이야기를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 도와준 건가.’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리 생각하자 묘하게 가슴 안쪽이 울렁였다.
“자, 이제 마지막 인원까지 모두 말에 올랐으니 마지막으로 흔적을 지우고 떠나기로 한다. 유더.”
“네.”
현장 점검을 마친 나단 주커만이 루산 사제가 탄 말 뒤에 가볍게 올라타자마자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유더를 불렀다.
“뒷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알겠습니다.”
땅을 움직여 전투의 흔적을 싹 지우고 사체를 깊숙이 묻어버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더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순식간에 모든 일을 해냈다.
물결처럼 울렁대며 움직인 땅이 몬스터와 암살자의 사체를 집어삼키듯 땅속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간 뒤 저절로 평평함을 되찾는 모습을 보며 넬라른에서 온 이들이 두려움 반, 감탄 반이 뒤섞인 신음을 흘렸다.
“허어…….”
나중에 누군가 이곳에 와서 흔적을 찾으려 땅을 파 보아도, 사람의 힘으로 파내기 힘들 만큼 깊숙이 묻어 둔 사체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유더는 전투의 여파로 흉하게 속살을 드러냈던 땅이 깨끗이 정리된 모습을 확인한 뒤 힘을 거두었다.
“끝났습니다.”
“좋아.”
주변을 한 번 훑어본 키시아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출발하지. 가는 도중 비가 내릴 것 같으니 모두 조심하도록.”
안개질풍마를 이끄는 징표를 찬 나단이 탄 말이 가장 앞에 서고, 그 바로 뒤에 키시아르가 탄 말이 뒤따랐다. 유더는 이 임무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인 에제인 왕자와 함께 타고 있었기에 중앙을 벗어나지 않는 위치를 지키며 주변을 경계했다.
안개질풍마는 순식간에 전투가 일어났던 땅을 벗어나 거침없이 나아갔다. 유더의 등 뒤에 앉아 있던 에제인 왕자의 긴 머리칼이 얼굴 옆에서 가끔씩 나부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에제인이 문득 뒤에서 중얼거렸다.
“당신 능력은 하늘을 나는 게 아니었어? 멜번은 그렇다고 하던데.”
“……하늘을 나는 능력은 없습니다. 바람을 다루어 허공을 밟은 모습을 보고 그렇게 느끼신 모양이군요.”
“바람?”
짤막하게 반문한 에제인이 잠시 침묵하다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면 설마… 가진 능력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인가?”
“네.”
어차피 이번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유더가 힘을 쓰는 모습을 더 보게 될 테니 이 정도는 말해 주어도 될 것이다. 바람과 땅 이외에도 불과 물까지 네 개의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며 그 이외에도 몇 가지 더 특이점이 있기는 했으나 유더는 거기까지 자세히는 먼저 언급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한 개의 속성만 제대로 다루려 해도 수십 년의 수련이 필요하다던데…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하군. 각성자들 중에서는 그런 경우가 흔한가?”
“마법사들과는 다르니 똑같이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이쪽도 그리 많은 경우는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그래…….”
현재는 마병단에도 여러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자연 속성을 여럿 다룰 수 있는 이도 유더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임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지녔던 능력들이 발전하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듯 보이는 힘을 새로 체득하는 사람도 생겨날 테고, 아예 처음부터 둘 이상의 힘을 타고나는 각성자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등 뒤에서 유더의 능력에 놀라움을 토하고 있는 에제인 왕자 또한 이전 생에서는 그런 각성자 중 하나였다.
‘여섯 별이 따르는 은의 제왕. 방벽의 수호자.’
유더는 이전 생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에제인 왕의 이명을 떠올렸다가는 도로 지웠다.
“…….”
에제인 왕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숲을 가로질러 달리는 동안 얼굴에 부딪칠지도 모르는 거친 나뭇가지들을 유더가 힘을 사용해 커튼을 젖히듯 일렬로 부드럽게 휘어버렸을 때였다.
“…제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마병단의 존재에 호기심을 가졌었지만, 직접 보고 들으니 내가 알고 있던 정보들은 오히려 과소평가였다 싶군.”
유더의 귓가에 그가 내쉬는 한숨 소리가 길게 울렸다.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