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뭘 하는 겁니까!”
그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은 나단 주커만이었다. 유더는 대답 대신 착지를 마치고 곧장 에제인 쪽을 향해 달려가면서 한 마디만을 남겼다.
“꼬리가 아니라 본체 쪽을 공격하십시오.”
“어엇! 땅 안에서 뭐가 나왔어!”
“뭐야 저거. 공처럼 생겼잖아. 꼬리가 연결되어 있는데?”
때마침 파헤쳐진 땅에서 제대로 본체를 발견했는지 엘더 남매가 법석을 피웠다.
‘본체를 발견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에제인은 유더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위치에서 조금 더 나아간 곳에 쓰러져 있었다. 흙더미를 제대로 피하지 못했는지 몸이 엉망이었다.
“넬라른 2왕자님이십니까.”
은빛 머리칼만 보아도 그가 에제인임은 확실했지만 일단 예의상 물어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목소리에 반응한 듯 에제인이 신음을 토하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마가 찢어졌는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당신은…… 그때 황궁 정원에서 보았던 그……?”
“네. 그 마병단원입니다.”
“유더… 아일. 맞지.”
놀랍게도 에제인은 유더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 마병단이 여기 있다는 건…….”
“저는 왕자님을 모시기 위해 파견된 마병단 제1파견대의 일원입니다. 약속장소로 향하던 도중 우연히 몬스터와 전투하는 상황을 발견하고 구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에제인 왕자 일행과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유더의 담담한 답을 들은 에제인의 얼굴 위로 겨우 딱딱한 경계가 사라지고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놀랍군. 이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살아난 데다 이런 식으로 당신과 또다시 마주칠 줄이야. 신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이지.”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조금 부축해 준다면.”
유더는 에제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몸을 기댄 에제인이 엉망으로 파헤쳐진 땅과 그사이 죽어 나자빠진 몬스터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해치운 건가?”
“네.”
“우리가 아무리 공격해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모든 몬스터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저 몬스터의 약점은 땅 아래 묻힌 본체 부분이죠. 그것을 공격하지 않으면 결코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아… 그랬군. 그래서…….”
허탈한 듯 작게 중얼거린 에제인이 걸음을 떼다 고통을 느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윽…….”
“발을 다치셨습니까?”
“걸을 수 있어. 괜찮아.”
내려다본 발목 한쪽이 피로 물든 상태였으나 에제인은 꼿꼿하게 걸으려 노력했다. 여유를 가장했던 표정이 무너진 자리에 선연하게 상처 입은 자존심이 언뜻 드러났으나 유더는 그것을 못 본 척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계시지요. 곧 왕자님을 이동시켜 드릴 그림자가 올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그림자?”
“아. 제 동료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이용하여 이동하면 흔들리지 않고 안전하게 사제가 있는 곳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유더의 답을 들은 에제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당신들이 부럽군.”
“예?”
“나도 검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평을 받으며 오러를 조금 모을 정도까지 수련했는데도 저 몬스터 앞에서는 좌절밖에 느낄 수 없었어. 하지만 그런 놈을 이리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당신들의 능력은…….”
노력하지 않고 생긴 힘이면서도 너무나 강하다. 그래서 부럽다고 에제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
유더가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묵을 지키자 잠시 후 에제인이 신비로운 자색 눈동자를 휘며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당신… 참 좋은 사람 같아.”
유더 아일이 좋은 사람이라니. 바로 얼마 전 흠씬 두들겨 맞은 황궁기사단 기사들이 듣는다면 경기를 일으킬 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묘해지든 말든 에제인은 저를 부축한 유더의 어깨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마주치게 된 것도 어쩌면 천운을 넘어선 운명일지도 모르지…….”
“예?”
“이상한 의미는 아니야.”
오해를 할까 싶었는지 에제인이 곧장 말을 덧붙였다.
“그저 이렇게 두 번 마주치고 나니 우리 사이에 어떤 강렬한 인연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위기상황을 맨 처음 발견한 건 키시아르다. 그러니 그렇게 치자면 그 운명은 에제인과 키시아르 사이를 뜻해야 하지 않을까. 유더는 그것을 굳이 설명하여 피를 흘리는 왕자에게 충격을 주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이 없겠지. 충격이 상당한 모양인데… 어서 치료를 받게 해야겠어.’
때마침 가케인의 그림자도 빠르게 다가왔기에 에제인은 곧 치료를 받으러 이동할 수 있었다.
“왕자님!”
키시아르와 칸나, 가케인, 루산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자마자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은 멜번이 벌떡 일어나 서럽게 달려왔다.
“무사하셨군요. 세상에……. 신께서 돌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피를 이렇게나 흘리시다니요……. 아 맙소사.”
“너도 무사했구나, 멜번.”
“예에. 이분들이 구해 주셔서 다행히 살았습니다. 저 말고도 젠과 페이티도 무사하니 너무 걱정 마세요.”
멜번이 엉엉 울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사제님. 사제님. 이분이 저희 왕자님이십니다. 어서 치유를……!”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을 치유하다 말고 허둥지둥 달려온 루산이 에제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부상이 심하시지 않으니 신성력을 조금 받으시고 하루나 이틀 정도 푹 쉬시면 금방 회복되실 겁니다.”
그는 물에 적신 천으로 얼굴과 발목, 그 외 곳곳에 묻은 피를 꼼꼼히 닦아낸 뒤 신성력을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제인은 곧 초췌해 보이는 모습만 제외하고는 모두 나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고맙군. 이리 뛰어난 사제를 여기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과분한 말씀입니다.”
루산이 머리를 긁적이며 붉어진 얼굴을 숙이자 에제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니야. 나와 내 사람들을 치유해 주어 정말 감사하네.”
“에제인 왕자.”
그때, 근처에 있던 키시아르가 가까이 다가왔다. 남다른 외모와 신체를 지닌 사내의 등장에 일순 분위기가 변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요. 이번 일을 돕기 위하여 온 마병단 단장,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라고 합니다.”
키시아르가 먼저 내민 손을 에제인이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붙잡았다.
“넬라른의 2왕자, 에제인 아파난 넬라른입니다. 공작 전하와 마병단의 명성은 익히 들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도움을 드리기 위해 왔으니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 듯하여 다행입니다.”
부드러운 인사가 오간 뒤 두 남자는 맞잡았던 손을 놓았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서로 만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두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마주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문득 조금 낯선 감상에 사로잡혔다.
“유더, 유더. 저분이 넬라른의 2왕자님이시지?”
그러나 감상에 깊이 사로잡힐 시간은 없었다. 늦게 나타난 칸나가 밝은 얼굴로 귓가에 질문을 속삭였기에 유더는 금세 묘한 감상에서 벗어나 시선을 돌렸다.
“응.”
“와. 이전에 파티 때는 멀리서만 뵈어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뵈니 눈동자 색이 정말 신비로운 분이셨구나. 아름답다. 보석 같아.”
넬라른 왕가에 대대로 물려 내려온다던 라일락 꽃 색 눈동자는 멀리서 보면 그 특유의 색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아야만 비로소 빛을 반사하여 자수정처럼 빛나는 신비한 눈동자 색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유더는 안 신기해?”
“그냥, 뭐.”
아무리 신비롭다 해도 결국 자신과 똑같은 사람의 신체 부위일 뿐이다. 새삼 특별한 감상이 들지는 않았다.
유더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키시아르와 에제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동안 이번에는 가케인도 옆에 다가와 섰다. 그는 부상자 외에도 몬스터의 시체와 그 주변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을 그림자 분신의 힘으로 옮겨 수습하고 온 참이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둘 다 여기 있었네.”
“가케인. 이제 옮길 건 다 옮긴 거야?”
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가케인이 머리를 끄덕였다.
“응.”
“힘들었을 텐데 사제님께 치유 한 번 받고 와.”
“나보다는… 유더가 다쳤을까 봐 걱정되어서 왔어. 능력을 크게 썼잖아.”
본인이 가장 지친 상태일 텐데도 유더를 걱정하는 모습이 과연 다정한 그다웠다.
“나는 괜찮아.”
유더는 그를 위해 자신은 괜찮다고 말해 준 뒤 어서 치유를 받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가케인은 그래도 걱정스럽다는 듯 유더의 장갑 낀 손을 한번 살짝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자, 그러면 이제 곧 다시 출발하도록 하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에제인 왕자의 일행들을 보호하는 형태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니, 지금부터 안개질풍마를 두 명씩 함께 타도록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키시아르가 에제인과의 대화를 끝내고 단원들에게 새로운 명을 내렸다. 난리 통에 말과 마차를 모두 잃었다는 에제인 왕자 일행을 보호하기 위해 잠시 말을 둘씩 타라는 명령이었다.
단원들은 본래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함께 타고 갈 새로운 일행을 맞이했다. 에제인 왕자의 살아남은 시종들은 가케인과 칸나, 에문과 함께 타게 되었고 엘더 남매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한 말에 탔다.
그리고 유더는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웃고 있는 에제인 왕자와 또다시 마주했다.
“이렇게 또 신세를 지게 되는군.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