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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36화 (236/805)

236화

“여기 오니 분위기가 확실히 우리가 있던 곳하고는 꽤 다른 것 같아.”

서부에 속한 몇 개의 도시와 마을을 연속으로 지나친 뒤 칸나가 조심스레 평을 내렸다.

“사람들의 표정이 평범해 보여도 곳곳에서 긴장감이 읽혀.”

정보를 읽어 들이는 능력을 지닌 그녀의 말이 아니라도 유더의 눈에 비친 서부는 확실히 여유가 없었다. 아직 몬스터가 국경 안쪽에서까지 대량 발생하는 시기가 아니라지만 타국에서 입은 피해 소식이 알음알음 전해진 탓인 듯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사라인 대삼림을 굳이 통과해서 갈 예정이라니……. 넬라른의 2왕자님은 정말 사정이 급하신가 봐.”

‘그렇겠지. 모르긴 몰라도 왕위와 목숨이 걸려 있을 테니…….’

유더는 칸나의 말에 속으로만 대답하면서 땅을 박차고 달리는 안개질풍마의 흐린 발굽 소리에 집중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오늘 밤쯤 에제인 왕자와 만나기로 했다는 작은 도시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어쩐지 몇 시간 전부터 하늘이 흐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점점 더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아까보다 더 흐려졌죠? 비가 오기 전엔 도착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유더의 오른쪽 뒤편에 바짝 붙어 따라오던 루산 사제가 하늘을 살피는 기색을 눈치챈 듯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며칠을 제대로 자지 않고 말을 달렸어도 아직 기력이 남아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몹시 초췌했다. 아마도 일반 말을 타게 했다면 진작 기절했으리라.

“네. 그래도 크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하… 그럼요. 저도 걱정은 안 해요. 이렇게 대단하신 분들하고 함께 가는데 무슨 걱정이 들겠어요.”

거뭇해진 눈 밑을 문지르며 루산이 씩 웃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어서 도착해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 느껴지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린 유더는 맨 앞에서 일행을 이끌 듯 달리고 있는 감색 망토의 끝자락에 눈길을 주었다.

키시아르는 그를 잘 모르는 자라면 그간 몸이 좋지 않아 칩거를 했었던 게 거짓말이었던가 의심할 만큼 지친 기색 없이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한쪽 팔에 방향을 알리는 마도구 팔찌를 차고 간간이 확인하면서 망설임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등 뒤로 신검 오르의 칼집 끄트머리가 규칙적으로 흔들리며 제 존재를 알렸다.

‘황제는 예정대로 그 소식을 발표했을까.’

키시아르는 그들이 떠나오기 전날, 황제가 새로운 신검의 주인을 발표할 예정이라 몰래 말해준 바 있었다. 그러나 이후 이틀이 넘는 시간을 달려 서부까지 오는 동안 유더는 그와 관련된 추가 소식이나 소문은 조금도 듣지 못했다.

뭔가를 들을 틈도 없이 그저 내내 달리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유더는 키시아르의 허리에 찬 신검을 볼 때마다 자꾸만 그 부분이 궁금해져 신경이 쓰이고는 했다.

‘정작 본인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데 내가 이래서야…….’

“모두, 잠시 멈추도록.”

그때, 제일 앞에서 달리고 있던 키시아르가 손을 높이 들며 신호를 보냈다. 일행이 모두 멈추어 서자 그가 초원만 가득 펼쳐진 지평선 너머 어느 방향을 가리켜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뭔가가 다수 움직이는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

유더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며 힘을 주자 정말로 무언가가 어른거리며 움직이는 듯도 했다.

‘각성자의 기운이라면 좀 더 선명히 보였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고… 뭐지? 몬스터인가?’

“몬스터와…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단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가케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립니다.”

소드 마스터인 나단 주커만도 비슷한 답을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듯해. 그러면 가보도록 하지. 다들 주의해서 따라오도록.”

그들은 본래 향하려던 방향에서 조금 벗어나 다시 말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멀리서 어른거리던 것들의 정체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어서… 도망…!”

두세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이들이 땅 위에서 불쑥 치밀어오른 길고 뾰족한 무언가를 피해 구르며 싸우는 중이었다. 짐처럼 보이는 물건들은 여기저기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고, 부상자인지 시체인지 모를 이들도 몇 명 정도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예상보다 다급해 보이는 상황에 일행은 곧장 말에서 내렸다.

“어떻게 할까요, 단장님.”

“일단 구해야겠지.”

유더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한 키시아르가 주변을 한 번 돌아본 뒤 곧장 명령을 내렸다.

“에문. 가케인. 어둠과 그림자를 이용해 생존자의 모습을 숨기고 이쪽으로 구해 데려오도록.”

“네!”

“칸나는 데려온 이들을 대상으로 정보를 파악하고, 루산 사제는 치료를 부탁하지. 그리고 힌과 핀, 유더와 나단은 저 몬스터를 막는다. 꼭 죽이지 않아도 되니 무리하게 달려들지 말고 생존자 구출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느낌으로 움직여. 알겠나?”

“알겠습니다.”

유더는 곧장 말에서 내려 바람을 밟고 뛰어올랐다.

“아, 유더. 그런 식으로 먼저 가다니 불공평해!”

징검다리를 밟듯 바람을 밟고 훌쩍훌쩍 뛰는 동안 뒤에서 엘더 남매가 무어라 소리치며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케인의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라 미끄러지듯 빠르게 움직였다. 유더는 전투가 벌어지는 땅에 도착하자마자 막 아래에서 튀어나온 무언가에 꿰뚫릴 뻔한 사람의 팔을 쥐고 다시 한번 바람을 밟아 위로 높이 도약했다.

“으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새에게 낚아채이는 꼴로 유더에게 붙잡혀 허공으로 날아오르게 된 이가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

유더는 어쩐지 그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군. 어디서 봤지? 저번 생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이런 경우 그의 감은 높은 확률로 들어맞는 편이었다. 유더는 혹시나 하여 땅에 착지한 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벌벌 떠는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우리는 당신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메, 메메메, 멜번 클란트…….”

남자가 구하러 왔다는 말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멜번 클란트?…. 멜번……. 멜번이라.’

“아.”

몇 번 이름을 되뇌는 동안 갑자기 머릿속에서 불이 환히 켜지듯 기억이 떠올랐다. 황궁 정원을 걷다 마주쳤던 에제인 왕자와 그를 찾으러 왔던 다소 정신없던 시종의 얼굴.

유더가 구한 사내는 바로 그때 잠시 마주쳤던 에제인 왕자의 시종이었다.

“……혹시 넬라른 2왕자님을 아십니까.”

“그, 그걸 어떻게!”

남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피와 멍으로 엉망이 된 얼굴 위로 공포와 경계가 어렸다.

“이전에 황궁에서 잠시 뵌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화… 황궁 말입니까? 기억이 잘…….”

“마병단원이라고 하면 알겠습니까?”

등 뒤에서 엘더 남매가 능력을 쓰는지 무언가 엄청난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멜번이 헉하고 신음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아아! 기억납니다! 그, 그때 정원에서 길을 잃은 왕자님을 뵈었던……!”

“맞습니다.”

“마병단. 마병단이라면 저희 쪽과 곧 만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더듬대면서도 연신 ‘맙소사’를 연발하는 멜번의 얼굴 위로 겨우 환희가 번졌다.

“네. 그게 바로 저희들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유더의 질문에 멜번이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던 도중 암살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처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자극했는지 갑자기 땅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더군요. 그, 그런데 왕자님. 저희 왕자님이 아직 저쪽에 계십니다. 저보다 어서 그분을 구해 주세요!”

유더는 그가 가리킨 쪽을 향해 흘긋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엘더 남매와 나단이 땅에서 불쑥불쑥 치솟아 오르는 꼬리 같은 부분과 싸우고 있는 동안 멀리서 누군가 쓰러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알겠습니다. 일단 먼저 가 계십시오.”

가케인의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몬스터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는 멜번을 번쩍 든 유더는 그림자에게 그를 짐짝처럼 넘겨준 뒤 곧장 몸을 돌렸다.

“으아아악!”

새카만 그림자에게 안긴 멜번이 혼비백산해 몸부림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유더는 다시 한번 바람을 밟아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아주 잠시 새처럼 체공하는 동안 아래쪽 정황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사람들의 움직임, 몬스터가 공격하는 모습, 그리고 에제인 2왕자의 현재 위치까지도.

‘여기서 보니 확실히 알겠군. 저건 본체를 땅 아래 두고 꼬리만 내뻗어 공격하는 몬스터가 분명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몬스터 도감에도 이름이 없지만 이전 생에서 몇 번인가 상대한 적이 있었다. 놈은 길고 강인한 검은색 꼬리로 사냥감을 꿰어 잡아먹고 살았는데 대개는 식물 정도로 만족했으므로 인간이 사냥당하는 일은 몹시 적었다. 그러나 땅 아래 깊숙이 묻혀 있는 본체가 자극당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꼬리에 비해 훨씬 작고 연약한 본체는 놈의 약점이었다.

‘아무래도 에제인 왕자 일행이 암살자를 상대하다 놈의 본체가 묻힌 곳을 건드린 모양이군.’

놈을 상대할 때는 꼬리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되었다. 무조건 본체를 먼저 드러나게 한 뒤 그것을 공격해야만 빠르게 해치울 수 있었다.

유더는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선명히 박아둔 뒤 그대로 손을 아래로 뻗었다.

“모두 물러나!”

그리고 하강하면서 그대로 거대한 힘을 일으켰다.

귀를 찢을 듯한 바람 소리와 함께 옷자락과 머리가 정신없이 펄럭였다. 유더의 손 안에서 흘러나온 힘에 반응한 아래쪽 일대의 넓은 땅이 순식간에 움푹움푹 패이며 위로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연약한 풀과 부드러운 흙이 사방으로 비산하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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