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
이전과 같은 열망과 허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깊은 감정을 전하려 드는 것만 같은 입맞춤이었다.
열려 있던 입술 사이로 놀라 흘러나온 숨결이 그대로 빨려들어 가는 감각에 등골이 절로 떨렸다. 비틀거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다른 손이 다가와 허리를 단단하게 감쌌다. 빈틈없이 닿은 몸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박동이 거칠게 뒤섞였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넘겨주는 감정들을 이해조차 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삼켰다.
“끝까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바라지 않고 가버리려는 내 보좌를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
끊어질 듯 가느다란 속삭임이 입술 사이로 넘쳐 흘러나왔다.
“어떻게 너와 같은 이가 내 앞에 나타났는지…….”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일그러진 붉은 눈동자가 너무나 가까이 보였다.
거울처럼 투명한 그 눈동자를 통해 유더는 키시아르가, 그리고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율이 흐를 만큼 선명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
마치 빛을 보듯 저를 보는 눈 속의 격렬한 갈망을 읽어낸 순간 너무나 이상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그 무게를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자 키시아르가 그것을 말리려는 듯 또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감싸 쥔 뺨 안쪽에서부터 마치 불꽃이 옮겨붙듯이 열이 올랐다.
어젯밤의 그도 뺨에 손이 닿았던 그 순간 어쩌면 이런 감각을 느꼈을까.
닿은 것만으로도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게 되는 무력한 기분과 그보다 조금 더한 뜨거운 안타까움을?
얼마나 흘렀을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입맞춤이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닿지 못했던 기간 동안 쌓인 안타까움을 해갈하려는 듯 깊었던 결합이, 떨어졌다 다시 붙을 때마다 조금씩 부드러워져 최후에는 작은 새가 쪼는 듯 간질간질한 감각을 전하며 끝이 났다.
머리가 뜨거운 물로 꽉 찬 듯한 충족감과 여운 속에서 유더는 젖은 입술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키시아르의 어깨에 고개를 숙여 숨을 골랐다. 머리가 온통 멍했다.
“…오늘 넬라른의 2왕자가 서부에 다다랐다는 연락을 보냈더군. 예정보다 조금 빠르게.”
끌어안은 허리를 놓지 않은 채 키시아르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첫 번째 파견대는 그래서 일정을 당겨 내일 출발하기로 했다. 본래는 너와 이미 선발된 몇 사람뿐이었겠지만, 지금은 계획이 달라졌지.”
칸나가 말했던 키시아르의 첫 번째 파견대 참가 소식이 아직 꺼지지 않은 열기 속에서 흐릿하게 떠올랐다.
“정말 함께 가실 겁니까…….”
“혼자 두면 너는 너무 무모해지니까.”
다가온 손이 유더의 머리칼과 땀이 밴 뒷목, 뼈가 단단한 귀 뒤쪽에 이르기까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은 사실도 하나 더 있고.”
“…무엇입니까?”
“내일, 황제 폐하께서 공개적으로 내가 신검의 주인임을 발표하실 예정이다.”
순간 숨이 멎을 듯한 놀라움이 밀려왔다. 유더는 느른했던 열기조차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아페토 가의 조력자들 위주로 남아 있던 마지막 재판도 이제 다 끝났거든. 관련한 일로 조사가 아직 이루어지는 중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제 때가 된 거지.”
제왕의 검흔이 새겨진 벽 앞에서 말했던 대로. 생략된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가슴 부근이 뜨거워졌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 발표한다고 곧장 믿어줄 이들은 여기 없으니까.”
키시아르가 유더의 귓가를 어루만지며 낮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내보이기 위한 일보이기도 하지.”
황제와는 이미 오늘 만나고 왔을 때 모두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자세한 부분은 말해주지 않았으나 지금 들은 소식만으로도 충분히 감회가 새로웠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아직 축하를 받기엔 조금 이르긴 하지만… 고맙네.”
키시아르가 드물게도 솔직한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마치 소년 같은 그 미소를 보며 유더는 문득 제가 어제 저지른 일을 이후에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내려가야 했다. 곧장 준비해야 하니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쉽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키시아르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머리칼과 귓가를 매만지는 손길이 도무지 멎을 줄을 몰랐다.
“그래. 가야지.”
몇 번을 더 매만지며 끌어안았던 팔에 힘을 한 번 꽉 주고 나서야 겨우 키시아르가 손을 떼었다. 유더는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뒤 그를 향해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런데 단장님.”
“음?”
“제가 무모한 짓을 한다 하셨지만, 단장님께서도 이후 어제처럼 위험한 일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신검의 주인이 되실 분이라면 더더욱 조심하셔야겠지요. 제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단장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로 저지른 일들은 부디 조금만 감안해 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유더는 그의 답을 듣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여러 가지 기분이 뒤늦게 뒤통수를 잡아당기듯 찾아들었다. 고양감, 초조함,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미적지근한 열기 같은 것들이 뒤섞여 침착함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대체 키시아르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충동은 왜 닿으면 닿을수록 해소되기는커녕 더 강해지기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
키시아르는 이번 서부 파견 임무를 위해 마병단을 총 세 개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파견대는 소수정예로서 넬라른의 2왕자 에제인과 접촉해 그를 보호하여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았고, 두 번째 파견대는 그보다 조금 늦게 서부로 향해 몬스터들이 어디까지 발생했는지 현지 상황을 정찰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수도에 남아 마병단을 지키고 있다가 첫 번째와 두 번째 파견대가 서로 합류한 뒤에 필요 여부를 판단하여 파견 여부를 결정할 셈이었다.
유더는 당연히 첫 번째 파견대에 제일 먼저 포함되었다. 본래는 그가 첫 번째 파견대를 이끄는 책임자가 될 예정이었지만 서부에서 만나기로 한 에제인의 일정이 예상보다 빨라지고 키시아르의 주기 또한 갑작스레 끝나면서 변동이 생겼다.
“다들 늦지 않고 나와주었군.”
새벽 어스름 아래 짙은 감색 망토를 두르고 선 키시아르가 제 앞에 모여선 첫 번째 파견대 소속 일원들을 가볍게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곁에는 마찬가지로 긴 망토를 두르고 안개질풍마를 다루기 위한 마법 표식을 찬 나단 주커만이 소리 없이 발을 구르는 안개질풍마 몇 필을 모아두고 익숙한 태도로 살피는 중이었다.
‘오늘 일정을 비밀로 하기 위해 미리 다른 이유를 대고 저 말들을 빌렸다고 하기에 누가 돌보나 했더니… 그간 나단 주커만이 돌보고 있었나 보군.’
나단은 이번 임무에도 키시아르의 부관으로서 동행하게 되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으나 기사의 얼굴 위로 긴장은 보이지 않았다.
유더는 뒤이어 제 옆에 서 있는 동료들의 면면을 훑었다. 에제인 왕자를 보호하면서 빠른 기동력을 발휘해야 하는 임무에 맞게, 거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선출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칸나와 소리 없이 그림자 분신을 움직여 적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가케인, 어둠을 불러 몸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술과의 에문 필랑, 단거리를 순식간에 이동시킬 수 있는 엘더 남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료부의 사제 루산이었다.
붉은 돌을 회수하는 임무 때에도 함께 했던 멤버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어 긴장감은 극히 낮았지만 그 사이에 낀 에문과 루산은 떨리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논도 함께 왔다면 좋았겠지만… 본인이 싫다니 어쩔 수 없지.’
사실 유더는 이논에게도 임무에 참여할 의지가 있는지 물어보았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딱 자른 거절이었다.
‘싫어. 내가 꼭 가야 하는 일도 아니잖아. 난 가능하면 수도를 별로 떠나고 싶지 않아. 물론 네가 루마의 가디언이란 이름으로 널 도우라고 말한다면야 가긴 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유더는 당연히 억지로 그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거절해 놓고도 결국 신경 쓰이기는 했는지, 이논은 오늘 루산을 통해 다양한 약초와 도움이 될 만한 약을 보내 왔다. 묵직한 주머니를 멘 루산의 어깨가 덕분에 축 늘어져 몹시 가엾은 모습이 된 꼴을 보니 미안하게도 조금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제 마지막으로 잠깐 만났을 때도 내게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믿어도 괜찮겠지.’
떠날 준비를 하던 도중 유더가 가장 신경 쓴 일은 몸 상태를 점검하는 작업이었다. 황궁기사단과 싸울 때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너무 힘이 매끄럽게 잘 써져 오히려 조절이 어려울 지경이었던 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상처약을 받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잠시 만난 이논은 유더의 이야기를 듣고 욕을 조금 뇌까렸지만 다행히 그가 느끼기에는 큰 이상이 없다고 답해 주었다.
‘빨리 죽기 싫으면 미친 짓 좀 작작 해. 네가 정말 미래에서 왔다 해도 적어도 목숨은 좀 아까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내 상식이 이상한 거야?…….’
“일정이 갑작스레 변경되었는데도 다들 이리 모여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길게 말할 틈은 없고, 임무 내용은 이미 전달받았을 테니 곧장 이동하지.”
이논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점검을 마친 키시아르가 낮게 입을 열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단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 뒤 미리 준비된 안개질풍마에 올랐다.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도 말에 오른 뒤 그들은 누구의 배웅도 없이 곧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저, 저, 전 이 말을 처음 타 봐요.”
수도를 순식간에 빠져나가 성벽이 멀리 보이는 위치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연기처럼 흔들리는 갈기를 꽉 붙잡은 손에서 힘을 조금 뺀 루산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거 너무 촉감이 이상해요. 정말 괜찮은 거죠?”
“괜찮으니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하면 그 녀석들도 그 기색을 느낀다고 하더라구요.”
“예? 정말요?”
가케인이 그를 달래기 위해 바로 곁에서 달리며 위로해 주었지만 루산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더 놀랐다. 놀란 토끼눈이 된 사제의 뒤에서 엘더 남매가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사제님, 겁내지 말아요. 혹시 떨어지더라도 우리가 잡아줄게요.”
“맞아요. 우리가 정말 힘이 세거든요.”
엘더 남매가 변화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루산은 그 위로를 반만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 말이 더도 덜도 아닌 진실임을 아는 다른 단원들만이 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지치지 않는 안개질풍마는 마차나 일반 말을 이용했다면 일주일이 넘게 걸렸을 길을 순식간에 달렸다.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 몸체가 유연하게 다리를 뻗을 때마다 산과 들이 순식간에 등 뒤로 사라져 갔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도 최소화하며 달린 끝에 그들은 이틀 만에 서부로 지칭되는 지역의 경계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