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어젯밤 저지른 일?”
키시아르가 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슨 연관 말이지?”
“어제 단장님이 갑자기 잠드신 뒤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실은…….”
이 이야기를 듣고 키시아르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으나 유더는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가 키시아르의 기운을 살피려 몸에 손을 댔을 때 일어난 힘의 반발, 그로 인해 터져 나온 붉은 기운, 그림처럼 눈에 보였던 네 개의 힘. 반쯤 홀린 듯한 상태에서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돌이켜보며 이야기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래서, 이후 기력이 다하고 나서는 저도 모르게 깜박 잠들고 말았습니다.”
말을 끝낸 뒤 유더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걱정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결국 단장님의 뜻을 묻지 않고 멋대로 저지른 일이니 면목이 없습니다. 오자마자 곧바로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키시아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숙인 고개 위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게 끝인가?”
키시아르가 물었다.
“……제가 기억하는 한은 그렇습니다.”
“혹 더 말하지 않은 건 없고?”
“없습니다.”
“정말로?”
“네.”
잠시 후 키시아르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몸을 의자 뒤로 젖혀 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네가, 나를.
고저가 없음에도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의 그런 목소리를 유더는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고개를 들어 표정을 보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자 잠시 후 뒤이은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우연히 일어난 듯 보이는 모든 기적 중 실상 진짜 우연은 거의 없어.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 황궁에서 확인을 받고 나서도 돌아오는 내내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네. 진짜 요정이 다녀갔든, 아니면 내가 인지하지 못한 어떤 원인이 있었든.”
“…….”
요정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귀에 걸렸으나 유더는 계속해서 묵묵히 제 무릎만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반점은 정말 다 사라진 게 맞나?”
“예? ……아, 네.”
갑자기 화제가 바뀌며 뜻밖의 질문이 들려왔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나서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못 믿겠는데. 손을 이리로.”
키시아르가 여전히 뜻을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유더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 저어하며 주먹을 쥐었다.
“장갑이라면 제가 벗겠습니다.”
“불공평하지 않나? 멋대로 잠든 이의 기운을 주물렀으면 이 정도는 나도 하게 해 주어야지.”
그게 무슨 논리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키시아르가 어서 손을 내놓으라는 듯 제 손을 내밀어 흔들었기에 유더는 결국 어색한 움직임으로 검은 장갑을 낀 오른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엄지와 검지만으로 우아하게 그 손을 받아쥔 키시아르가 이내 장갑 끝을 잡아당겨 벗겼다. 쓸데없을 정도로 느릿한 움직임이 마치 벌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서 연한 멍 같은 얼룩이 번진 손등이 드러났다.
“다 사라졌다더니?”
“아까 술과 쪽 일을 돕고 올 때 능력을 쓰느라 조금 번진 모양입니다.”
“그래. 거기서도 힘을 썼단 말이지…….”
찌르는 듯한 시선이 뺨 위로 선명히 느껴졌다. 손을 쥔 힘이 강해져 순간적으로 손끝이 움찔 떨렸다.
“하나같이 무모하지 않은 부분이 없어 무어라 할 말이 없군.”
“…죄송합니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아니. 되었어.”
키시아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가 쥔 손 안에서 흰빛이 스르르 흘러나왔다. 통증도 없이 부드럽게 스며든 힘이 사라지고 나자 깨끗한 손등이 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단장님?”
“뭐라고 하면 좋을지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이 안 나는군.”
루산에게 치유 받아도 충분할 것을 왜 굳이 힘을 쓰는가 싶어 조심스레 불렀으나, 돌아온 건 답이 아니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치유가 끝났음에도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키시아르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를 그만큼 걱정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리 말해도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게 갑갑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안도 좀 솟는 것 같고. 가슴 안쪽도 몹시 이상해.”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아질수록 깨끗해진 손등을 문지르는 긴 손가락의 감각도 더욱 느릿해졌다.
“어렵군.”
희미하게 남은 아주 작은 자줏빛 점 부분이 그 속삭임에 반응하듯 오싹거렸다.
“……화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유더는 그 오싹한 감각을 삼키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화?”
“발정기의 전조증상도 예기치 못하게 사라졌다고 말씀하셨고… 읏.”
순간 손등을 문지르던 손가락 끝이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하게 피부를 누르는 바람에 말이 끊기고 말았다.
“아니. 그건 화낼 일이 아니지. 내가 어떻게 나를 위해 행동한 이에게 화를 낼 수 있겠나. 오히려…….”
침묵하는 유더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잇던 키시아르가 스르르 녹아 내면이 드러난 얼굴을 감추듯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걱정이 되어서 참을 수가 없는데.”
순간 기묘한 고통이 짧게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새빨간 시선이 손등 위에 남겨진 반점의 흔적을 훑듯 움직였다.
“다시 어젯밤 그 순간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너는 망설이지 않고 똑같이 행동하겠지?”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언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기에 유더는 답을 쉽사리 할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제 말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한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내리깔았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기회 쪽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말이지…….”
하아. 가는 숨을 내뱉은 키시아르가 한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몇 번의 호흡이 오간 뒤에야 그는 다시 얼굴을 드러냈다.
“그렇다 해도 너무 위험한 일이었어. 다행히도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지만,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내가 어떻게 생각했을지 짐작하겠나? 나는 아마도 어제 그런 식으로 널 찾아간 스스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그에 비하면 오지도 않은 발정기 전조가 사라진 정도가 무어 대수라고.”
“아뇨.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오히려 팔을 찢고서 나타난 그를 향해 유더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답하려던 순간 문득 어떤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설마 이 반응을 끌어내려고?’
어젯밤 나누었던 대화의 연장선 같은 기분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멈춘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가 알겠느냐는 듯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똑같아.”
그는 유더가 그를 위해 알 수 없는 미지를 감내하면서도 움직이려 결심했던 마음을, 그 충동과 욕심의 근원이 제게도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을 황급히 돌리자 키시아르가 그제야 겨우 작게 웃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니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 더 확실한 정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마. 알겠나? 나와도 아주 연관이 없는 일은 아닌 듯하니 오늘 알려준 이야기들을 토대로 더 알아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키시아르를 상대로는 도저히 말로 이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에 또다시 그 붉은빛이 제 손 안에서 흘러나와 또 다른 힘과 연결된다면, 그리하여 알 수 없는 기묘한 확신과 정신을 홀리는 몽롱함 속에 재차 빠져들어 필요로 하는 일의 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면.
과연 그 충동을 단호하게 뿌리칠 수 있을까.
게다가 그것이 키시아르와 관련된 일이라면…….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아직도 잡혀 있던 제 손을 바라보다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그런데 단장님.”
“음.”
“이 손은 언제 놓아주시는 겁니까.”
슬슬 도로 장갑을 끼고 싶은데, 잡힌 손을 빼줄 기색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느릿하게 문지를 때마다 피부에 솜털이 죄다 일어설 듯 간질거리는 감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묻자 키시아르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반문했다.
“왜. 주기도 지나갔으니 이제 허락받은 부분을 마음껏 만져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했던 말이었나?”
“…….”
스스로 만져도 괜찮다고 답했던 기억이 있는 데다 어젯밤 저지른 일도 있으니 무어라 답하기가 곤란했다. 유더는 보란 듯 제 손바닥 안쪽까지 슬슬 문질러 오는 손가락을 보다 이를 꾹 악물었다.
‘어쩔 수 없지…….’
“…아닙니다. 계속 하십시오.”
“하하.”
그러나 기껍게 계속 만질 줄 알았던 키시아르는 오히려 그 답에 허탈한 미소를 흘리며 손을 떼어버렸다. 의아해하는 유더의 얼굴을 훑은 사내가 이내 고운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시선을 아래로 깊이 내리깔았다.
“나도 참, 갈수록 심각해지는군.”
“예?”
잘 듣지 못해 반문했지만 키시아르는 미소만 지었을 뿐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로 화가 난 건 아닌 모양이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유더는 무거운 마음으로 장갑을 도로 끼고 나서 아직 제 옆에 놓여 있던 키시아르의 겉옷을 새삼 인식했다.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내내 들고 왔는데 이 짧은 사이에 잊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저, 그리고 이것도 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그건 이리 바로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오늘 내로 다시 찾아오라는 뜻으로 두고 가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 그렇지 않아도 밤을 거의 새어 피곤할 이를 그런 암호 같은 짓으로 괴롭힐 이유가 뭐가 있나.”
“그러면 왜…….”
추측이 틀렸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져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턱을 괸 채 웃었다.
“글쎄. …두고 가기가 싫어서였다고 해 둘까.”
무엇을 두고 가기 싫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마주한 시선 속의 열기를 정통으로 받아 점차 치밀어오르는 갈증을 무시하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자 키시아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일이 있어 그만 들어가려는 모양이라 지레짐작했지만 아니었다.
“유더.”
등 뒤에서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들려온 부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한 손이 뺨을 감쌌다. 서늘한 손길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위로 조금 들자마자 몸을 굽힌 키시아르가 그대로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