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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33화 (233/805)

233화

“아무도 졌다고 말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이, 이 악마……!”

“유더. 뭐 하러 친절하게 알려 줘? 아직도 기가 살아서 반말이나 찍찍 해 대는 걸 보면 전혀 패배자 같은 태도가 아니야. 좀 더 굴려. 아니면 우리가 할까?”

멀리서 구경하던 마병단원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치자 기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유더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는데. 교대할까.”

“교대할 거면 나와 핀이 제일 먼저 할래!”

교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앞으로 불쑥 나선 힌 엘더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쓰러져 있던 기사들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다. 지독한 굴욕감으로 인한 절망과 그래도 유더가 아닌 다른 마병단원들을 상대로 한다면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그, 그래. 저 정도로 약해 보이는 녀석들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 순간, 기사들의 희망을 짓밟듯 엘더 남매가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란히 거대한 빵 덩어리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응. 힘 조절이 잘 될지 모르겠어.”

신이시여!

기사들은 끝도 없이 거대해져 가는 엘더 남매를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각자 신을 불렀다. 특수한 가공을 거친 원단으로 만들어진 제복이 찢어질 듯 팽팽해지고 목 아래가 전부 거대한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질로 변했음에도 귀여운 얼굴은 그대로 조그맣게 어깨 위에 달려 있는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변화를 마친 힌이 깔깔 웃으며 한 발짝 내딛자마자 발밑에 깔린 누군가의 검이 과자 조각처럼 부서지는 광경을 보았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모든 전의와 이성을 모조리 상실한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져, 졌다! 우리가 졌어!”

“이제 제발 그만해 주십시오! 사과하겠습니다! 누가 주머니를 찢었는지도 말하겠습니다!”

유더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짧게 웃었다. 정말 마지막까지도 한결같이 비겁하고 우스운 놈들이었다.

***

“쳇, 아까워. 모처럼 몸도 변화했는데 손도 못 대다니.”

“그래도 막판에 피에니가 주머니를 찢은 놈을 상대로 투명화살을 막 쏴서 오줌을 지리게 해 준 건 재미있었잖아.”

“그건 그래.”

“단장님을 욕한 놈이 벌서다 울었던 것도 재미있었고.”

“걔도 오줌을 쌌던가? 황궁기사단엔 왜 이리 오줌싸개가 많은지 모르겠네.”

유더는 곁에서 떠드는 엘더 남매의 목소리를 들으며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은 패배를 인정한 기사들에게 오늘 일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알아서 처신을 잘 하라는 말을 남긴 뒤 마병단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 전에 아주 약간의 추가 응징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당연한 인과응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옆으로 다가온 스티버가 다른 단원들 몰래 말을 걸었다.

“그런데 유더.”

“네.”

“그… 빨간 눈 기사의 입은 정말 안 막아도 괜찮을까?”

그가 말하는 빨간 눈 기사란 키올레를 뜻했다. 유일하게 마병단의 응징 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키올레는 겁먹고 기막힌 표정 반,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표정 반쯤이 뒤섞인 채 유더를 보다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기사들을 수습해 사라졌다.

‘혼자 가버리지 않고 수습해서 간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아주 조금 변하긴 한 것도 같고.’

“괜찮을 겁니다.”

그간 지켜본 결과 키올레는 착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았지만 뒤에서 술수나 부리는 음습한 면모는 없었다. 아마도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제 귀한 혈통에 취해 편하게만 살아온 탓이겠지만 그 단순함 덕에 유더는 그를 파악하기가 다소 쉬웠다.

‘머리가 좀 더 좋았다면 그간 나와 마주치며 보고 들은 정보들을 좀 더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번 일도 기껏해야 위에 보고하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최대치겠지.’

사실 권력가의 자제로서 좋은 자질은 아니었다. 혈통을 자랑스러워하는 주제에 권력욕이 그리 넘쳐 보이지는 않고, 입만 열면 적을 만드니 오래 살아남기 어려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도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변한다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키올레가 만약 이번 생에 오래 살아남게 된다면… 그것도 변수라고 할 수 있을까.’

유더는 키올레가 안다면 모욕감에 뒤집어질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걸음을 옮겼다. 힘을 꽤 많이 썼는데도 밖으로 나오기 전보다 오히려 기운이 넘쳤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계속 지켜볼 셈이었다.

“유더! 어딜 다녀온 거야?”

마병단으로 돌아온 유더를 맞이한 이는 바쁘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칸나였다.

“잠깐 스티버와 함께 술과 쪽 일을 도우려고 나갔다 왔어. 그런데 왜?”

“단장님이 서부 출발 일정을 바꾸신다고 했어! 본래는 단장님이 제일 나중에 세 번째 파견대와 함께 출발하실 예정이었는데 첫 번째 파견대로 가실 거래. 널 찾으시던데 아직 못 뵌 거지?”

“뭐?”

“그게 정말이야, 칸나? 단장님은 분명 자리를 비우셨었는데… 언제 돌아오신 거지?”

충격적인 소식에 귀를 의심한 유더가 반문하는 것과 동시에 옆에 있던 스티버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칸나가 그제야 그를 인식한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앗, 스티버. 미안해요. 단장님이 자리를 비우셨었어요? 저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아까 주커만 경과 함께 오시더니 일정 변경 이야기를 하시면서 유더를 봤는지 물어보시더라구요.”

“칸나. 단장님을 직접 뵈었어?”

유더는 평소답지 않게 다소 빠르게 물었다. 칸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러면 건강은…… 아니. 고마워. 지금 바로 올라가야겠어.”

건강에 문제가 없어 보였느냐고 물으려다 직접 보러 가는 쪽이 빠르겠다는 결론이 한 박자 늦게 찾아들었다. 유더는 팔에 걸쳐둔 키시아르의 옷을 움켜쥐며 칸나와 스티버를 뒤에 두고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유더 아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단장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반응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치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초조함을 삼키며 서 있으려니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그러나 나타난 이는 예상했던 나단 주커만이 아니라 키시아르 본인이었다.

“…….”

깜짝 놀랐으나 동시에 깊은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초조하게 뛰던 심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하게 느려졌다. 유더는 흰 단복 차림의 키시아르를 올려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전신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같은 위태로움도, 깨질 듯 불안정하게 날뛰는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단하고 여유로운 키시아르였다. 그 사실을 확신하고 나서야 겨우 깊은숨이 은밀히 흘러나왔다.

“숙소에서 사라졌다기에 어디를 갔나 싶었어.”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 동안 유더를 찬찬히 살폈던 키시아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뒤쪽 훈련장에도 없고, 식당에도 없던데 어딜 다녀왔지?”

“단장님께서 남기고 간 것을 돌려드리려고 나갔다가 잠시 술과 단원들의 일을 조금… 돕고 왔습니다.”

“일? 그사이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반문한 키시아르가 잠시 후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마음이 급해 계속 밖에 세워둘 뻔했군. 들어와서 이야기하지.”

유더는 그가 내준 빈 공간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단장실 풍경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주인이 돌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앉게.”

손님용 테이블 앞에 앉은 키시아르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유더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재빠르게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칸나에게 일정을 변경하실 예정이라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들은 그대로.”

짤막하게 대꾸한 키시아르의 눈동자 위로 부드러운 웃음이 스쳤다.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신기하게도 몸이 몹시 가볍더군. 어제까지만 해도 기운이 거칠어 몸이 찌뿌둥했었는데,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평온했어. 혹 내가 느끼는 감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잠시 황궁에 다녀왔지.”

나단 주커만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갔다더니, 황궁으로 갔던 것이었던가. 유더는 조금씩 빠르게 뛰는 심장의 움직임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목울대를 작게 울렸다.

“그러면…….”

“궁중마법사 청장과 폐하의 주치의 모두 내가 주기를 넘겼음을 확언했네. 곧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 말해주더군.”

맙소사. 정말로 제가 해낸 것이다.

마치 홀린 듯 이루어졌던 어젯밤의 신비한 일들이 머릿속을 단숨에 스치고 지나갔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었던 손에서 힘을 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말해야 자연스러워 보일지 알 수 없어 잠시 망설이다 겨우 한 마디를 흘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기운만 진정된 게 아니라 곧 오리라 짐작했던 발정기의 전조까지 모조리 가라앉은 것을 제외하면 말이야.”

“…….”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진 양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발정기의 전조가 가라앉아?’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부분은 솔직히 누구도 확답해줄 수 없는 부분이라 나 스스로 느낀 본능적 판단에 의지해야겠지만, 말 그대로야. 어제까지는 분명 곧 그것이 다가올 듯한 예감과 미열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것도 싹 가라앉았더군.”

“착각이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하지만 그걸 확인하자고 멀쩡한 몸을 더 침실에 박아두는 건 낭비라는 결론을 내렸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아니. 어제 일어난 일 모두가 이상한 것투성이였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기가 지나간 것만으로 그 신중한 키시아르가 갑자기 출발 일정을 당길 리 없는데, 그의 상태가 나아졌다는 점에만 집중하여 그 부분을 미처 먼저 생각하지 못했다.

‘엉킨 기운 덩어리에만 손대려 했던 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부분까지 잘못 건드린 거라면…….’

갑자기 더욱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유더는 곧장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단장님, 저…….”

“할 말이라도 있나?”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유더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깊이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제가 어젯밤 저지른 일이… 단장님의 변화한 몸 상태와 연관이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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