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너무나도 네놈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서약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게 역력한 기색이었다. 저와 아는 척하지 말라는 마음이 선명하게도 들여다보이는 어색한 말투를 들으며 유더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뭐, 2성 발현 때 키올레가 부탁을 잘 들어줬으니 그 정도 소망은 나도 들어줄 수 있지.’
상대가 비록 기대 따위는 조금도 걸지 않았던 키올레라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니까.
유더는 키올레를 비롯한 기사들을 한 번 죽 훑어본 뒤 나직이 대답했다.
“무얼 하러 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여기 온 이유를 모르시지 않을 텐데 그리 묻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군요.”
“뭘 모른단 거야. 무슨 소리지?”
키올레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주실 필요 없습니다, 디아카 경! 디아카 경은 늦게 오셔서 모르시겠지만 훈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줄곧 저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훈련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계속 안으로 들어오겠다며 난리를 친 건 저쪽이 먼저입니다! 더 듣지 마십시오.”
아하. 유더는 그제야 키올레가 다른 기사들보다 더 늦게 훈련장에 도착하느라 이 일의 원인을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입구는 끝과 끝에 두 개 있으니 반대쪽으로 들어왔다면 이쪽에 있었던 마병단원들과 마주치지도 않았을 터였다.
“저희 단원이 이곳에서 훈련을 하던 도중 물건을 떨어트렸습니다. 그것만 찾으면 이곳에서 곧 나갈 것이라 말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은 건 그쪽이잖습니까. 이게 어째서 억지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연히 우리 훈련을 방해하려는 핑계가 아니냐!”
나이가 의심되는 유치하고도 악의적인 해석이었다. 유더는 제게 소리친 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사님과 달리 저희는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부단장에 단장 보좌까지 열 명이 넘게 와서 땅을 뒤지고 있겠습니까?”
“뭐?”
아연하게 반문한 기사가 잠시 후 불을 토해낼 듯 분노했다.
“이, 이 미천한 놈이 뭐라고? 내가 할 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냐?!”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빌어먹을 놈, 검을 뽑아라 당장!”
“조용히 해!”
키올레가 손을 들어 날뛰는 기사를 진정시켰다. 짙은 암적색 눈동자가 유더의 얼굴을 의심스레 훑었다.
“그러니까… 정말 물건 하나 때문에 왔다고?”
“그렇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키올레 다 디아카는 과연 어떤 결론을 낼까. 그가 말을 믿든, 안 믿든 유더가 할 일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찡그린 얼굴로 한껏 망설이는 표정을 보니 저 남자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제법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이었다면 말을 듣지도 않고 곧장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서서 공격했을 텐데 말이야.’
학습 능력이라는 게 전혀 없는 줄 알았는데 그에게도 경험치라는 게 쌓이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디아카 경!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저놈의 말을 들어주실 생각이십니까?”
키올레가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자 곁에 있던 기사들이 조바심을 냈다.
“디아카 경도 아시겠지만 저놈들은…….”
“그만 좀 떠들어. 시끄러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 기사들 때문에 폭발한 키올레가 결국 날카롭게 소리쳤다.
“생각을 하고 있잖아, 생각을! 내가 요즘 좀 조용히 있었다고 아주 우습게 보이나 보지? 내가 여기에서 가장 상급자인데, 너희의 태도만 보면 마치 너희가 상관 같군그래. 내가 결정을 내리는 게 그리 아니꼬운가?”
“아… 아닙니다.”
실제로 요즘 조용해진 키올레를 전보다 만만하게 인식한 건 사실이었기에 기사들은 순간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키올레 또한 그들이 순간적으로 그 말에 지레 찔려 했다는 사실을 동류의 감으로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는 기사들을 노려보다 이를 악물고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네.”
“5분 줄 테니 그 안에 물건인지 뭔지를 찾아내!”
“디아카 경!”
기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키올레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훈련은 그동안 잠시 중단하고 모두 이쪽으로 모여서 기본훈련식 16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시한다. 당장 움직여!”
기사들이 항의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누구도 디아카 가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감히 입을 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동료들을 불러모아 제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힘겨운 체력 운동법이라 일컬어지는 기본훈련식 16번을 시행해야만 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일단 지켜볼까.’
그토록 무시하던 마병단 앞에서 끙끙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힘을 주는 기사들의 안타까운 모습들을 지켜보던 유더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단원들을 보고 몸을 돌렸다.
“유더.”
“물건은 찾았어?”
“음… 그게 말야, 찾기는 찾았는데.”
단원 한 명이 무언가 미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좀…….”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일단 상태가 별로 안 좋아.”
“상태가 안 좋다고? 얼마나?”
유더의 물음에 물건 주인인 피에니가 다가와 들고 있던 주머니를 보여주었다.
“……이거야. 내가 간 적이 없는 저쪽 반대편 입구 쪽에서 찾았어.”
피에니의 손 위에 놓인 가죽 주머니는 칼로 난자한 듯 엉망이 된 상태였다. 안에 든 활골무는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발로 짓밟힌 듯 먼지와 흠집이 상당했다. 누가 보아도 일부러 모욕을 주기 위해 악의를 가지고 저지른 짓이었다.
유더의 눈 안에서 온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스티버의 표정도 가라앉았다.
“…누가 이런 짓을.”
“평민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뭘 충격 받은 척하는 거야?”
그때, 드디어 기본훈련식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들이 큰 소리로 들으란 듯 비아냥거렸다.
“이제 그 잘난 물건을 찾았으면 이제 그만 황궁기사단 훈련장을 더러운 발로 더럽히지 말고 나가!”
피에니가 울음을 삼키려는 듯 어깨를 위아래로 거칠게 움직였다. 마병단원들의 눈빛 속에 살기가 차올랐다.
“하, 노려봐? 노려보면 어쩔 테냐. 그래 봐야 쭉정이들의 단체 주제에.”
“…….”
쭉정이라는 멸칭이 쭉정이 공작으로 통하는 키시아르를 비유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건 너무 심하다고 여겼는지 몇몇 기사들이 그 말을 한 이에게 무어라 눈치를 주었으나 그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하긴, 키시아르 본인도 무시하고 갔던 놈이니 없는 자리에서 말하는 정도야 쉽다 생각하겠지.’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시선을 마주한 키올레가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그는 유더가 저런 표정을 짓던 순간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하나같이 그에게 그리 좋지 않은 결말로 끝났던 날들이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
“뭐, 뭐야.”
“지금부터 누가 우리 단원의 물건에 손을 댔는지 직접 찾아볼 생각인데, 막겠다면 지금 나와.”
키올레는 훈련에 늦게 참가했다니 이번 일에 동참하지는 않았을 터다. 비록 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가 단원들이 물건을 찾을 시간도 벌어주기는 했으니 기회를 한 번 줄 셈이었다.
“물러난다면 손대지 않겠다. 하지만 나온다면 그때는, 단추를 기억해야 할 거야.”
“저 건방진 놈이 감히 디아카 경에게 반말을!”
“디아카 경!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키올레는 기사들의 희망대로 유더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다. 모욕적인 언사에 몹시 화가 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그는 긴 침묵 끝에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뒤로 물러났다.
“…디아카 경?”
“나와 상관없는 일로 나서기 귀찮군. 일일이 상대하지 않겠다.”
거만하게 들리지만 당연히도 허세였다. 그의 눈 안에서 수확철 파티 때 유더가 단추 하나로 여럿을 손쉽게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던 기억이 선명히 어른거렸다. 그는 그런 꼴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눈앞의 새카만 마병단 사내는 키올레가 태어나서 만난 모든 이 중 가장 강력하고 포악한 괴물이었다.
유더는 태어나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내린 키올레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머지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남은 놈들은… 23명.’
그는 곁에 있던 단원 한 명에게 여태 팔에 걸고 있던 키시아르의 옷을 넘겨주었다.
“미안한데, 이 옷 좀 잠시 부탁한다.”
“어? 어어.”
“영향이 안 가게 뒤로 가 있어.”
“뭐라는 거냐, 저 건방진 놈. 하하하. 이제야 좀 겁이 나나 보지?”
유더는 저를 비웃는 기사들의 앞에 당당히 섰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지만 뽑을 생각도 없었다.
“눈물 나게도 동료를 위해 나설 생각인가 본데, 애초에 너와 우린 동등한 위치에서 결투를 할 만한 상대조차 될 수 없으니…… 어억!”
무어라 비아냥대던 기사 한 명의 발이 갑자기 미끄러지며 땅에 뒤통수를 박았다. 그는 눈앞에 불이 번쩍이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기절하고 말았다.
“맞는 말이야. 너희를 상대로 결투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지.”
기사의 발밑 땅을 움직여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기절시켜 준 유더가 입을 벌린 기사들을 향해 조용히 답해 주었다.
“나보다 훨씬 못한 이들을 상대로는 굳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으니까.”
“너… 너 이 건방진……! 으아악!”
검을 기세 좋게 뽑아 들었던 기사가 유더의 손짓 한 번에 앞으로 휙 당겨지는 검 때문에 놀라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멀리서 그 모습을 팔짱 낀 채 지켜보던 키올레가 순간 과거의 기시감을 느끼며 미간을 찡그렸다.
“기사라면서 검 하나 제대로 못 잡는군.”
“이 빌어먹을 자식!”
유더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분노하며 다시 검을 잡고 달려든 기사가 또다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땅과 검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앞으로 엎어졌다. 기이하게도 그의 얼굴이 박힌 땅이 갑자기 물컹해진 덕에 그는 얼굴이 처박힌 땅에서 빠져나오려 바닥을 짚고 몸부림쳐야만 했다.
“뭐, 뭐야. 퉤! 퉷! 우욱!”
“참 용맹한 모습인데.”
얼굴이 흙투성이가 된 기사가 입에 들어간 흙을 뱉어내며 시뻘게진 얼굴로 욕을 내뱉었다.
“개자식, 죽어!”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한 번 집어 들어 힘껏 내리치려던 검날이 마치 무른 찰흙처럼 휘어지며 꼬이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아악! 내 검이!”
애검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검을 내던진 기사가 공포에 찬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다 뒷걸음질 쳤다. 그는 창피함과 굴욕, 공포 속에서 몸을 돌려 몇 발짝 뛰어가다 또다시 미끄러져 이마를 땅에 박고 기절하고 말았다.
‘모든 이들 앞에서 최대한 추하게 발버둥 치며 쓰러지게 해 주마. 그게 너희들이 가장 뼈아파하는 일이니까.’
힘이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발현되었다. 손등의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아주 조금씩 쓰려고 하는데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넘쳐흘러 조절하는 게 좀 어려울 따름이었다.
“란덴!”
“괴물 같은 놈,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
쓰러진 기사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몇 명의 기사가 동시에 유더에게 달려들었다. 여러 명이라면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한 듯했지만 아직 오러의 조각조차 내지 못하는 평기사들의 실력은 그저 안타까움만 자아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