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물론… 들어가야지.”
“…유더?”
단원들을 진정시키는 일을 도와주러 온 줄 알았던 유더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스티버가 멀리서 입을 벙긋거렸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유더는 그를 향해 안심하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은 뒤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안에 물건을 두고 왔다는 사람은 누구야?”
“나야.”
모여 있던 이들의 뒤쪽에서 줄곧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 단원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피에니 모플. 실제 활에 보이지 않는 바람 화살을 걸어 쏘는 능력자였었지.’
비록 하루에 5발 정도만 쏠 수 있는 게 한계이기는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라는 특성상 발전 가능성이 높은 유용한 능력이었다. 유더는 그녀가 등에 멘 활을 곁눈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에 두고 왔다는 물건이 정확히 뭔지 들을 수 있을까.”
“활골무가 든 가죽 주머니야.”
피에니가 드러난 맨손을 내려다보며 울적하게 대답했다.
“훈련을 끝낸 뒤에 분명히 챙긴 줄 알았는데…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떨어트린 걸 미처 몰랐어.”
“없어진 건 언제 알게 되었는데?”
“훈련장에서 나와서 조금 걷자마자 바로 알았어.”
피에니는 주머니가 사라진 것을 깨닫자마자 훈련장으로 돌아갔으나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던 황궁기사단 기사들에게 가로막혔다. 그녀를 염려하여 함께 따라와 준 동료들이 항의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차가운 경멸과 비웃음뿐이었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 내가 주머니를 좀 더 잘 확인했어야 했는데…….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피에니.”
피에니의 곁에 서 있던 다른 단원이 분노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든 건 그냥 활골무가 아니라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활골무를 기사 놈들이 밟아 부술까 걱정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 우리는 우리가 그러고 싶어서 여기 있는 거야. 미안해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그의 말에 모두가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더는 스티버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도 중요한 물건을 떨어트렸다고만 들었을 뿐, 정작 이런 사연을 지닌 물건인 줄은 몰랐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스티버.”
여기까지 들었으면 들어가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담아 이름을 부르자 스티버가 복잡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후우……. 알겠어. 그런 거라면 들어가서 찾아와야지. 그런데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방법이라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유더는 조용히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훈련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나뉘어졌다고 해도 그건 훈련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한정된 것이지, 단순한 방문을 제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들어가서 찾아오면 그만이죠.”
“으, 음. 그래. 단순해서 좋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명쾌하구먼.”
유더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스티버가 하늘을 한 번 바라보다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묻겠는데, 만약 저들이 공격해 온다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요.”
유더는 썰물처럼 갈라진 단원들을 가로질러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앞에 서서 몸을 돌렸다.
“스티버. 설마 그들에게 질까 걱정되십니까.”
“…….”
미소와 함께 내뱉은 도발 섞인 한 마디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잠시 후 제일 먼저 침묵을 깬 이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스티버였다.
“그럴 리 없잖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문제없지 않은가. 유더는 뒷말을 생략했지만 듣는 이들은 모두 그 뜻을 이해했다. 마침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단원들이 일제히 깊은 흥분에 사로잡혀 떠들기 시작했다.
“좋아.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 들어가도 되는 거지? 들어가서 본때를 보여줄 테다!”
“자, 잠깐만.”
주먹을 쥐고 기세등등하게 들어갈 준비를 하는 단원들의 곁에서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피에니가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단장님이 안 계신 상태인데 혹시 이 일을 나중에 알게 되시면 뭐라고 하시겠어…….”
유더는 그녀를 돌아보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그거야말로 가장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니까.”
“뭐?”
그는 이 일을 뒤늦게 알게 된 키시아르가 이런 흥미로운 사건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리라는 데에 돈이라도 걸 수 있었다.
“그래, 결정이 났으니 들어가자고. 피에니가 흘린 가죽 주머니를 찾는 사람은 즉시 손을 올려 큰 소리로 외쳐 주고 경계를 늦추지 마.”
스티버가 시원하게 목소리를 높여 단원들에게 마지막 공지를 했다. 한번 결정을 내리고 나니 속이 편안해졌는지 거침없는 태도였다.
“혹시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무조건 나나 유더를 찾도록 해. 뭐, 여기에 그럴 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당연하죠.”
단원들이 큰 소리로 호응했다.
그들은 여태까지 쌓인 모든 울분을 털어낼 기세로 살기 등등하게 훈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수십 명이 흩어져서 훈련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공간이었기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찾으려 해도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뭐 하는 짓이냐!”
그때, 가장 가까이에서 검을 휘두르던 기사가 곧장 다가와 호통을 쳤다.
“들어오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했는데 기어이 침입을 해? 당장 나가라. 3초 내로 물러나지 않으면 경고를 무시한 죄로 공격하겠다.”
“자자. 다들 흩어져서 찾자고.”
스티버가 그 호통을 무시하며 손짓을 했다. 단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흩어지자 멋진 척하며 검을 쥐었던 기사가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채 멍청히 입을 벌렸다.
“내… 내 말이 안 들리나? 당장 나가라고……!”
“왜 그래야 합니까?”
유더는 스티버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계속 여기 있겠다는 것도 아니고, 떨어진 물건 하나만 찾으면 바로 가겠다는 게 그렇게 협박할 일인지 모르겠군요.”
“협박……? 감히 이 건방진 평민이 누구를 모함하려 드는 게냐!”
이 녀석들은 대체 왜 할 말이 없으면 무조건 평민 운운일까. 이전 생에서부터 달라진 게 없어 지겹다는 생각을 하며 유더가 작게 한숨을 쉬자 기사는 그 모습을 더욱 큰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 건방진 놈. 그 말버릇을 오늘 완전히 고쳐주마.”
기사가 검을 들어 유더에게 겨누자 근처에 서 있던 스티버가 찌푸린 얼굴로 시선을 보냈다. 괜찮겠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유더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 애검 알룬드에 자비심 따위는 없어. 울면서 땅을 핥으며 개처럼 짖고 애원한다 해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테니 날 건드린 걸 후회해라!”
‘묘사가 이상하게 구체적이군. 혹시 그런 취향의 변태인가.’
황궁기사단에는 분명 검을 의미 없이 뽑지 않는다는 규범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쩐지 유더가 마주친 이들은 무슨 말만 해도 씩씩대며 검을 쉽게쉽게 뽑아댔다. 그토록 자랑하던 기사도나 귀족다운 고결함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과연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지. 나는 오늘 이놈들의 기만 죽여두면 되니까.’
일단 이 녀석부터 시작해 볼까. 유더는 곧장 힘을 쓸 생각으로 기사가 손에 쥔 검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러나 그때, 일촉즉발의 상황을 느낀 듯 다른 기사들이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유더는 그들 중 키시아르를 무시했던 이들이 끼어 있음을 발견하고 굳이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까부터 바깥에서 시끄럽게 굴던 그 건방진 평민 놈들이 기어이 훈련장에 무단칩입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특히 건방진 언행을 보여 쫓아내기 전 손을 봐 주려던 참입니다!”
유더와 마병단원들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 된 기사가 큰 소리로 보고했다.
“저놈이 그랬다고?”
기사들이 일제히 유더를 노려보았다. 유더는 대답 대신 아직도 팔에 걸고 있었던 키시아르의 옷을 구겨지지 않도록 조금 매만졌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무시라 느낄 만한 행동이었다.
“허! 과연 목숨이 아홉 개는 되는 모양이구나. 직급이 꽤나 있는 놈인가?”
모든 이유를 지위의 고하나 신분 여부로 판단하는 게 참으로 그들다웠다. 유더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 기울이며 비뚤어진 웃음을 삼켰다.
“네놈, 이름이 뭐냐.”
“…….”
“하, 정말 반죽음이 되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반죽음이 될 쪽은 네놈들이겠지.’
그러나 유더는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다른 기사 한 무리가 그 순간 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전부 여기 있었군. 내가 분명 마병단원들이 갑자기 이곳에 들어와서 온통 헤집고 다니는 이유가 뭔지 알아오라고 했을 텐…….”
화가 난 목소리로 다그치며 다가오던 이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유더를 바라보았다.
“…….”
“…….”
네놈이 왜 여기에.
절규 같은 침묵에 유더가 줄 수 있는 답은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뿐이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키올레가 순간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다는 간신히 발을 멈추었다.
“디아카 경? 왜 그러십니까?”
키올레의 태도가 이상하다 여겼는지 곁에 서 있던 다른 기사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키올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창백한 얼굴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저… 사…람 한 명을 상대로 모두 몰려와 있는 거지?”
“들어보십시오, 디아카 경. 저자가 제게……!”
유더를 맨 처음에 공격하려 했던 기사가 물 만난 고기처럼 나서서 흥분해 입을 열었다. 그가 떠들어댈 때마다 유더를 향한 기사들의 적대감이 더욱 강해져 갔고, 키올레의 낯빛은 갈수록 창백해졌다.
“…래서, 감히 황궁기사단 전체를 무시하려 든 저자에게 쓴맛을 알게 해 줄 참이었습니다. 저리 겁을 상실한 모습을 보면 나름대로 직급이 있는 위치인 모양이니 일단 저자를 본보기로 혼을 낸 뒤에 다른 이들을 함께 쫓아내면 괜찮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나도 못한 일을 네가 무슨 수로?”
“네?”
이를 악문 키올레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기사가 되물었으나 그는 두 번 말해주지 않았다. 하 하고 짧게 숨을 토한 키올레가 불안과 초조함이 뒤섞인 얼굴로 유더를 보았다.
“네ㄴ…… 아니, 너…어. 대체 여기 무얼 하러 온 거냐.”